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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 읽기 5기 (5) -슬픈짐승, 모니카 마론 (2020.7.25)

by 책이랑 2020. 6. 30.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문학동네

독일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서독, 동독 출신의 두 남녀가 겪는 격정적인 사랑과 집착을 그려낸 이 소설은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던 '독일 통일'의 모티프 '사랑'이라는 주제를 짜임새 있게 결합시키며, 구동독의 '기이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통일 후 엄청난 변화를 겪은 이들의 삶과 사랑을 성숙하고도 강렬한 문체로 형상화했다.

작가는 '나'와 프란츠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에 여러 사람들의 사랑과 사회 문제를 연결시키면서 흥미와 긴장감 속에서 독일의 통일이라는 주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나간다. 주인공 '나'의 회상 속에는 동독에서 자란 여자와 서독에서 자란 남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한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을 낳은 독일의 역사가 교묘하게 짜여 있다.

2009년 독일 국가상을 수상한 현대 독일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모니카 마론의 대표작으로, 구동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던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사랑과 열정이라는 모티프를 전면에 내세워 작가의 문학 세계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주인공인 '나'는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서 상명하복으로 모든 것이 통제되었던 시스템에 순응하여 박물관에서 공룡을 연구하면서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하나를 낳은 전형적인 동독 여성이다. '어느 날 갑자기' 독일은 통일이 되었고, 그녀는 낯선 자유를 맛보게 된다. 그 '자유'로 그녀는 잊고 살았던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다가 서독 출신의 프란츠라는 중년 남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거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P.10 내 생애의 에피소드에 또 다른 에피소드를 추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때 나는 거울을 모두 깨뜨려버렸다. 

p.10
나의 마지막 연인, 그 남자 때문에 나는 세상을 등졌다. 나를 떠났을 때 그는 안경을 잊고 내 집에 두고 갔다. 나는 몇 년 동안 그의 안경을 썼자. 건강하던 내 눈을 그의 근시와 뒤섞어 흐릿한 눈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어느 날 닭고기 누들수프를 만들고 있을 때 안경이 주방 돌바닥에 떨어지면서 알이 깨져버렸다. 그때 이미 내 눈은 원래 타고났던 좋은 시력을 잃은 뒤라서 안경이 없어도 아쉽지 않았다. 그 이후로 안경은 내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점점 뜸해지고는 있지만 나는 가끔씩 안경을 썹노다. 내 연인이 그 안경을 썼을 때 무엇을 느꼈을지 느껴보기 위해서다. 
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내 연인과 브라키오사우루스 외에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15쪽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신과 세상은 브라키오사우루스를 잊었었다. 야넨시 교수가 텐다구루에서 그것의 뼈 몇 개를 발견할 때까지 1억 5천만 년 동안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지상의 기억에서, 어쩌면 심지어 우주의 기억에서조차도 사라졌었다. 야넨시 교수가 그를 발견한 후에 우리는 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리가 그를 다시 꾸며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작은 뇌, 그의 먹이, 습관, 동시대 동물들, 그의 오랜 종족 생활 전부와 그의 죽음을 다시 만들어낸 것이다. 이제 그는 다시 존재하며 모든 아이가 그를 알고 있다. -15

p.15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잊고 싶은 것을 기억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왜 많은 사람들이 체험할 가치조차 없었던 사소한 사건들을 기억 속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는 마치 사용된 인생의 증거로서 쓸모가 있다는 듯 백 번도 넘게 다시 그것을 뒤져 보여주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내 인생에는 잊히지 않아야 할 것들이 많지 않았다. 간직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만 모으면 내 인생은 상당히 짧은 생이 되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직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던 사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에는 망각이 죄악시되었다. 나는 그것을 당시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은 그것을 생명을 위협하는 횡포라고 생각한다. 

p.16
그의 이름을 잊어버린 후로 나는 내 연인을 프란츠라고 부르고 있다. 살아오면서 프란츠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을 알았던 적은 분명히 없기 때문이다. 내 연인에게 더 멋있는 이름을 붙여주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드는 이름마다, 또는 내 연인에게 더 어울릴 것 같아 보이는 이름 뒤에는 매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잠시라도 알았던 다른 사람이 떠올랐다. 그 이름을 쓰면 내 연인과 단둘이 있고 싶을 때 갑작기 그 사람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란츠(Franz)라는 이름도 ‘아‘ 발음을 가능한 한 길게 끌어 깊숙이 놓으면서 마지막에 살작 위로 끌어당김으로써 아주 멋지게 발음할 수 있다. 그러나 ‘아‘를 너무 강하게 발음하면 절대로 안 된다. 그렇게 하면 우둔하게 들릴 것이다. 네 개의 자음 사이에서 하나뿐인 모음이 짓밟히지 않도록 뉘앙스만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프란츠는 ‘무덤‘이나 ‘관‘처럼 멋진 저음의 단어가 된다

p.20
‘만일 그날 저녁의 발작이 내 죽음을 가상실험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정말로 그때 내가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가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p.24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가끔은 사랑이 어떤 다른 존재처럼 우리 안으로 침입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몇 달 동안, 심지어 몇 년 동안이나 주위에 숨어 우리를 엿보다가 어느 때인가 기억이나 굼들의 방문을 받고 우리가 갈망하며 숨구멍을 열 때, 그때 그것이 숨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와 우리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과 뒤섞인다.  

p.24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p.25
프란츠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내 사랑이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해 하나의 대답을 한 이후로, 사람이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내 사랑은 탈출로를 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프란츠를 처음 만났을 때 내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처음부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내 사랑이 결정했다. 프란츠와의 문제에서 내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결정을 내린 기억이 없다. 내 사랑이 그것을 내게 금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첫 순간부터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사랑이 나를 대하는 확신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는 했지만 사랑의 강요에 대해 저항하려고 오래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자제하도록 하려는 나의 시도들은 번번이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고, 매번 사랑의 계획에 복종해야 할 뿐 다른 것은 없다고 가르치며 또다시 더 큰 굴욕만을 내게 남겼다.

p.43
프란츠는 삼십 년 전이나 사십오 년 전에도 내게 했던 질문을 할 것이다. 그는 내게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프란츠가 없었을 때 내가 누구였는지 이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 아니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 년 전 나는 프란츠의 연인이 아니었다.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으로는,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가끔 나는 베를린 장벽도 프란츠가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너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프란츠가 말한다. 그래.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잊는다. 내가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내가 지금 프란츠에게 ‘그래‘가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행복이 닿을 수 없는 것이라는 내 경솔한 주장이 옳았다고, 사랑은 현실 생활 밖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것은 어쩔 수없이 연인들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트리스탄이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장애물을 하나씩 하나씩 설치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사실은 에우리디케를 구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던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도록 노래로 찬미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그는 말할 것이다. 프란츠에게 ‘그래‘가 무슨 의미냐고 내가 묻는다면 프란츠는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알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이 평범하게 성장한 자녀나 손자들까지 두고 있는 나이에,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고 심장발작의 위험이 있는 그런 나이에 이제야 놓치고 살았던 청춘의 사랑을 만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내가 기억하는 한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우스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나 자신도 사월 어느 날 저녁 뇌 안에서 양극이 바뀌기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47-48) 

클라이스트의 희곡 <펜테질레아>"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p.49)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열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 49쪽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었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직 실망을 극복할 필요도 없고 이전의 행복을 능가하지 않아도 되고, 그 무엇도 반박하거나 수정하거나 대체하지 않아도 된다. 카린과 클라우스가 서로를 위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쉬는 시간에 두 사람이 바싹 붙어 학교 운동장 울타리에 기대 서 있기 전에 다른 학생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p74

"정말이야. 차라리 그가 죽었다면 더 나았을 거야." 그녀가 말했다. 자기는 버림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도 했다. 아마 그녀는 클라우스 외에 다른 남자는 몰랐을 것이다. 카린은 아마 나라면 그런 일을 견디기가 좀 더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나라면 그런 충격에 단련이 되어 있겠지만, 자기는, 카린은 불행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80쪽

만일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이 휘몰아치는 희망 전체가 자연의 야비한 속임수, 갈증으로 목이 타는 길 위에 나타난 낙원 같은 신기루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 86쪽

"진정한 기적은 우리의 몸이었다...... 우리의 몸이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사실 몸이 없다면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경우에 육신이 독단적인 행위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마치 그것을 사람들이 평생 억지로 갈라놓았던 것처럼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서로 뒤엉키게 되었을 때 마치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듯마치 서로를 찾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었다는 듯, 그리고 이 숙명을 놓칠 위험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는 듯, 기진맥진한 지고의 기쁨이우리의몸 위에 찾아왔다. " 90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p90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직 교화되지 않은 존재. 젊음이다. 노인은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맞서 ......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고안해낸다. 동물사랑, 어린이 사랑, 자연사랑. 일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 인간애. 음악애호, 일반적인 예술 애호....."91

나는 전혀 꿈을 꾸지 않아. 하지만 신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당연히 꿈을 꾸는데 그것을 잊으려고 애쓰는 것이지. 반면에 당신은 꿈을 현실이라고까지 여기는 것이고 말이야. | 96쪽

p.103
그들은 프란츠와 젊은 시절 그의 첫사랑처럼 서로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전혀 잘못된 것, 잘못된, 잘못된, 잘못된 것이었다. 나의 모든 격분이 이 하나의 단어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는 이 잘못된 그림이 프란츠 자신의 선택이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약탈, 유괴였다. 페를레베르크 선생님 같은 작고 빈틈없는 인물이 자신을 위해 예정되어 있지 않은 한 남자를 강탈한 것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없었다면, 프란츠와 내가 이십 년이나 이십오 년 더 일찍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았던 그 기이한 세월 전체가 없었다면 절대로 그녀는 그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지금 공중전화부스 안에 반쯤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p.105
도시의 황량한 혼돈 속에 나를 위한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았다. 프란츠가 사라지자 도시도 의미를 잃었다. 마치 내가 프란츠 없이 그 도시에서 산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사랑으로 번민하는 인물의 상투적인 모습을 내가 가소로울 정도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알 만큼 나는 나이가 들었다. 그러나 그저 그 상태에 온전히 빠져드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가 없었다. 희망에 가득 차서 계속 창문 유리에 몸을 부딪치지만 빠져나갈 길은 없는 곤충처럼 나는 무력해진 상태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다녔다. 프란츠는 아내와 함께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내게 속한 남자가 아니라 그녀에게 속한 남자였다. 죽자, 나는 생각했다. 죽자. 내게 닥친 고통에 맞서 죽음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107 프란츠라는 매개가 없으면 나는 그 무엇에도그 누구에게도 속할수 없는 것 같았다.

 언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프란츠에 대한 내 사랑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 p108


109 감옥의 담에 둘러싸여 자유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죄수가 비로소 자유를 갖게 되자 자유를 행복의 전제조건으로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중 하나야. 122


보통의 출세와 보통의 결혼에 대한 기대가 아직은 혐오와 경멸을 불어일으켰던 시절....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116


우리에겐 담보물들의 나사를 죄어 결국 어느 정도 그럴듯한 전기(傳記)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기억들을 오랫동안 갈고 연마할 시간이 있다. 또한 우리는 지속되는 몰락과 함께 자기 자신이 귀찮아져서, 인생에서 가졌던 것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것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도록 어느 날엔가 죽음이 다가오기를 고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멍청해지는 속도보다 부패하는 속도가 더 빠를 경우에만 해당된다. | 119쪽


"...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p.120)


‘생사를 건’ 사랑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

정말 진지해.

지금껏 그 남자 없이 살았잖아.

충분히 불행했지.

내 말은 그래도 그때 네가 죽어 싶어 하지는 않았다는 거야. 대체 왜 그랬을까?

뭐라고?

나는 왜 죽고 싶어 하지 않았었는지 자문해본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다고 할 수도 없어. _ 본문 120~121쪽



p.121
그런데 프란츠 말이야. 그 사람도 너를 사랑하니? 아테가 물었다.
금요일이었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 프란츠도 나를 사랑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사이 토요일이 되었고 내 머릿속에는 영상들이 들어 있었다. 여권 심사대의 좁은 통로에 프란츠가 서 있고 그 뒤에 그의 아내가 서 있다. 그녀가 프란츠의 왼쪽 팔을 스치며 두 개의 여권을 밀어 넣는다. 팔꿈치로 아내를 밀치는 실수를 한 뒤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프란츠. 그래, 무엇보다도 그것, 그 미소. 미친 듯이 뛰는 내 심장은 나와 함께 곧바로 죽음을 향해 질주할 거 같은데 그는 그렇게 스쳐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생각이 그의 입가를 끌어당기거나 눈 주위를 떨리게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는 나를 잊고 있었다. 이 미소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처럼 내 기억 속에서 벌어져 있다. 그 이후로 프란츠의 아내가 내게 여자로 여겨졌다.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거나 진부하게 끝나거나 둘중 하나야 p122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듯 나는 혼자서 계속 프란츠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행복과 불행, 구원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이 한 단어, 프란츠뿐이었다. 123

"나는 그를 찾지도 않았고, 그를 기다리지도 않았어. 어느날 아침 그가 내 옆에 서 있었어. "
나에게 프란츠는 평생을 기다려온 사랑이었다. 
그 이전의 삶은 프란츠를 만나기 위한 기간이었을 뿐이다. 

나는 평생 너무 확고하게 자연을 신봉하느라 충분히 좋은 인간이 될 수 없었다...... 내게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항상 능가할 수 없는 예술작품으로 여겨졌다. 비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자연 안에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구조역학 전문기사라도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고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136

p.144
내 말 좀 들어. 너는 얻을 수 없어.
그러면 너는? 너는 무엇을 얻는데?
최소한 이성을 잃지는 않지.
미친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는 싸우지 말라.
누가 한 말인데?
러시아 속담이야. 게다가 나는 프란츠를 기다리는 중이야.
아테는 사랑이 아마 믿음의 문제, 일종의 종교적 광기일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사랑이 우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자연이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 전체는 그저 그것을 길들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프란츠를 사랑하게 된 후로 왜 내가 살아 있고 왜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것인지를 매일 물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아테에게 말했다.

더웠는데도 나는 그때까지 거위털 이불 아래 파묻힌 채 침대에 누워 계쏙 똑같은 구원의 십초를 끝없이 연속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복도, 문, 프란츠, 프란츠의 입, 팔, 그의 피부,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복도를 지나 문을 향해........계속 다시 그저 복도, 문, 프란츠, 피부 뿐이었다. 145 

"카린은 비키니를 입고 .... 손수레를 퇴비더미로 밀고 갔다. 카린은 나중에 비키니 대신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고, 마지막 몇년동안에는클라우스의낡은 셔츠를 그 위에 입고 있었다."


p.148
순수한 감사의 시간은 사랑의 첫 단계이다. 어떤 사랑이나 그럴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우리가 원했던, 또는 심지어 우리 안에 파묻혀 깨어나지 않은 채 숨어 있던 특성들이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가 더불어 사는 데 익숙해 있던 다른 특성들을 몰아낸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소심함과 우리의 악의에서 구원된다. 우리는 가장 사악한 적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우리의 행복으로 모든 나무와 모든 거리와 모든 순간을 환하게 비추고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경탄한다. 우리는 하늘과 비와 바람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고 또 마침내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프란츠가 언제 그 문장을 말했을까. 내 아버지가 옳았어. 이미지도 없고 빛도 없고 단지 프란츠의 목소리만 들린다. 날이 어두웠을 것이다.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프란츠의 팔에 안겨 눈을 감고 말없이 누워 있었을 것이다. "내 아버지가 옳았어. 사람은 인생의 것이지. 그리고 아버지를 위한 인생이 루치에 빙클러였다면 아버지는 그녀의 것이었어."-191

프란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게 된 후로 비로소 나는 그에게 다시 감사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에게는 다시 선택의 여지가 있다.
나는 그 세월 동안 내내 여기 내 방에 앉아서 프란츠를 사랑하는 것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이 아니라면 아마 통틀어 몇달을 프란츠를 애도하며 울며 지냈을 때조차도 그것은 나의 자유로운의지였다.p150 

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썼고 .... 만일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자신의 생명의 비전을 따를 것이라고 맹세했다.156

그들은 나를 감시했어. 세 사람 모두. 프란츠가 말했다. 세 사람 중 하나가 불성실한 남편들에 대한 이야기를 바깥에서 듣고 오면 곧바로 식사 중에 위협적으로 그 이야기가 거론되었지. 그 얘기에 따르면 대부분 남편이 성교 불능이 되거나 병에 걸렸어. 아니면 새로 얻은 아내가 급사하거나 아이가 불구로 태어났어. '그 위에는 축복이 내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매번 그렇게 말하면서 나만 쳐다보셨어.-157

 프란츠가 열두시 반에 내 몸에서 자기 몸을 떼고 옷을 입고 파이프를 채우는 냉혹함은 매번 나를 광포한 무방비 상태에 남겨놓았다. .... 나는 더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것. 그 당시에 내가 무엇은 생각만 했고 무엇은 정말로 실행했었는지 더이상 모르겠다. 159

프란츠 아버지가 들려준 신곡 속의 비극,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이야기

p.167
프란츠가 작은 금발의 아내와 함께 나의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세상의 어떤 장소들이 프란츠와 그의 아내의 것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그들 것이었고, 마르쿠스 광장도 그랬을 것이고, 비아 베네토, 리마트 강변, 트래펄거 스퀘어와 포르토벨로 시장, 블리커 스트리트, 그리고 피렌체 전체가 그들 것이었겠지만, 그러나 브라키오사우르스의 작은 머리 아래의 그 1제곱미터는 내 것,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우리는 세계의 온갖 동물을 거의 다 보았어요. 그런데 당신들은 아직도 뼈대를 가지고 살아 있는 동물을 보듯 즐거워할 수 있잖아요. | 167쪽


나는 멸종한 독거성 동물에 관심을 가졌고, 프란츠는... 무리를 지어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작은 개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가. 172 

개미들의 생활은 매우 이성적으로 질서가 잡혀 있어서, 그것을 정서적으로 미화하고 싶은 아주 작은 욕구에 대해서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173 

사멸하지 않기 위해서 꿀단지 개미가 봉사를 하여 여러 개미를 살린다. 나는 개미처럼 살지 못하며 사멸의 댓가를 치르기를 기꺼이 바란다.

 또한 '1억 3,500만 년 동안 생존해온 개미처럼 그들을 위한 국가의 체계화'(p.174)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히 숨도 쉬지 못했다. 한 문장이 아직 부족했다.
항상 아버지가 진 빚을 내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버지가 옳았기 때문에, 루치에 빙클러에게 가기로 했던 결정이 정당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빚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면......
프란츠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의자등받이에 걸쳐져 있는 그의 흰색 셔츠가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한 문장이 부족했다.-192

"'대도시의 정글. 맥박이 뛰는 도시, 소음이 포효하다. 교통이 밀려오다. 사람들의 물결이 밀려오다. 건물의 바다, 도로의 골짜기... 도시의 혼돈 속에서 ... 자연이 다시 깨어난 것 같았다.' 180


아테의 친구들을 만나러 가다  한 남자가 차로 울타리를 들이받는 것을 보았다. 나는 죽을 뻔한것이다. 나의 우연한 죽음과 프란츠 사이의 연관을 찾았다.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것.'

“나는 멸종한 독거성 동물에 관심을 가졌고, 프란츠는 ....... 무리를 지어야 비로소 완전한 하나의 유기체가 되는 작은 개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가. 개미들의 생활은....... 아주 작은 욕구에 대해서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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