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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복원)

by 책이랑 2020. 8. 31.

나는 1970년,  전라남도 함평군 합평읍 자풍리 노송마을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혼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내 위로 세살 위의 오빠가 있었다. 우리집은 큰집과 같은 골목에 있었다. 네이버 지도의 거리뷰를 보니 아직도 그 집은  남아 있다. 한 1970, 80년대 정도의 모습이다. 세월이 간건가, 안 간건가 싶다.  

 

오빠를 낳던 날, 나를 낳던 날, 두 날 다 어머니는 혼자서 아기를 낳을 뻔 했다. 저녁먹기 전에도 산기가 있었지만,  큰집에서 저녁을 차리고 먹고 치우고, 혼자서 집에 올라와 진통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혹시나  하고 우리집에 올라왔던 큰엄마가 탯줄 자르고 하는 마지막 부분을 도와주셨다고 한다.  큰어머니는 감정이 풍부한 대신 변덕도 많고, 엄살도 많으신 편인데(큰어머니에 대한 엄마의 평가), 우리 어머니는 엄살이 1도 없으셨다. 큰어머니는 남편을 일찍 여의셨고, 그 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중에는 아들, 딸이 서울로 돈벌러 가버려서 혼자 살게 되었다.  집에 혼자 있는게 너무 무서우셨다고 한다. 나중에  "자네, 그때 되게 무서웠겠네. 그때는 자네 마음이 어떨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 미안하네."  이렇게 사과를 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오빠 위로 낳은 두 딸을 지 삼일만에, 낳은 지 일주일만엔가 모두 잃었다. (군복무기간이 만3년이 넘어서 그랬는지 그때도  아빠는 없었다고 한다), 휴가로 집에 온 아빠는 동네 친구들이랑 술만 마시다가 어렵게 낳는 세번째 아이인 오빠를 한번도 안아주지 않고, 다시 군대에 가버렸고, 50년이 지난 후에도 엄마를 슬프게 만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몸져 누워계실 때도 지금 해도 너무 서운하다고 분노하셨다. (하...진짜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살던 집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화살이 아버지에게로.....)
각설하고  두 딸을 잃은 후, 몸이 약해진 엄마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풍을 맞게 되었는데, 그때 동네 사람들이 엄마보고 귀신 들렸다고 하고, 저 여자는 이제 영영 아이를 못낳을 거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1972년,  엄마와 오빠, 나는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도로 보니 차로 3시간 28분걸린다고 나오는데 그때는 버스-기차-버스를 타고 7~8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서울은 (1965년을 제외하고) 매년 14~60만 명씩 인구가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했다고 한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국가 주도의 근대화, 산업화 정책의 결과로 많은 농촌 인구가 서울로 유입되었고, 여기에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붐으로 인한 자연증가가 더해진 결과인데, 1년, 또는 2년 만에 분당 또는 일산 등 신도시의 인구만큼 늘어나는, 세계 도시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로 폭발적인 증가라고 한다. 우리집도 그때의 서울의 인구 폭발에 기여하게 되었다. 1972년에 600만이었다 한다.  http://data.si.re.kr/node/332

 

 

서울에서는 한강대교 옆인, 흑석동에서 살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길가의 큰고모네 집의 문간방이었다. 시대에 따라 서울의 집모양은는 이랬다고 하는데 고모네집은 1930~1940년대 한옥에 속하는 집이었다.

아빠는 명동입구에 있던 명동 한일관의 주방에서 일하셨다. 아침 네시에 나가서, 저녁 12시가 다 되어서야 오셨었다. (이곳은 1997년 1월에 폐업했고, 지금은 화장품 가게게 되어 있다.) 여름 밤에는 아빠와 고모부를 기다린다고 고종사촌 언니들과 큰길가 육교 계단에 나가 앉아 있다가 졸음을 못이기고, 졸곤 했었다.

 


네 다섯살때,  집 가운데 있는 수도가에서 서서 오줌을 눈 적이 있다.  빨래를 하고 있던 여자분들이   
"어머, 어머, 얘 좀 봐."하며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 였는데 앉아서 오줌 누는 것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그랬다. 

우리는 고모네 집, 대문쪽에 있던 두 개의 문간방 중 왼쪽에 살았고 오른쪽에는 창렬이네였다. 주인집이 아빠의 큰누나인 큰
고모네였지만 눈치를 많이 봐야 했다 한다. 우리집에 애가 3명, 창렬이네 3명. 조무래기들이 한집에 있으니 소란스럽다고 큰고모가 화를 자주 냈다고 한다. 셋방살이는 머슴이 살던 행랑에 세들어 살게 되는 거라서 주인은 세입자를 머슴과  같이 취급했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니 고모의 구박이 팍,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1976년에 5월 쯤 30분 거리의 산중턱의 흑석1동 249-1번지로 이사를 했다.

 

이사간 집은 진짜 '우리집'이었다. 1학년 6살, 4살인 우리 삼남매가 고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아주 큰 마루가 있었고  마당에 깍두기 같은 방 까지 포함해서 방이 네개 반. 대문을 들어서면 긴 마당이 있었고  대문 맞에는 깍두기 같은 방. 그리고 그 방앞에는 우물과 펌프가 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한식집 주방에서 일하고 받는 월급으로는 400만원짜리 집은 사실 살 수 없었다. 우리집 같은 집은 은행에서 돈을 빌리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억지로 겨우겨우 대출을 받아 서 샀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세입자를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집이지만 5개 방중에 우리가 쓴 방은 꼴랑1개.  큰 부엌에 붙어 있던 두개의 방중에 더 큰 방을 우리집이 썼고, 부엌은 지연이네랑 썼고 나머지 방 두 개 - 사실은 1.5개 정도 되는 크기의 방을 훈이네가 썼다.  깍두기 같은 방에는 남자 대학생과 그 누나가 살았던 것 같다.

우리집 3명, 지연이 언니네 3명, 훈이네 2명, 마루에 모여서 마당에서, 집 앞에서 8명이 놀았기 때문에 심심할 틈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잠옷을 입고 모여서 우리방에서 꽃무늬 이불을 펴놓고 탁구공을 굴려서 빨간꽃에 도착하면 몇 점, 파란꽃에 도착하면 몇점 하며 놀다가, TV에서 "어린이 여러분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입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 " 라는 방송이 나오면 불을 끄고 잠을 잤다. 어린이가 9시를 넘겨서 자면 죽는 줄 알았다.  9시를 넘겨서 자도 죽지 않는 다는 건 4학년때 나를 얕보는 남자애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밤 12시까지 시험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산중턱으로 이사를 왔어도 김치거리 등의 장을 보려면 고모네 집 근처인 흑석동 시장으로 가야했다 간장이나 과자같은 거는 나중에 집근처에 생긴 잡화점인에 갔지만. 흑석동 시장은 '연못시장'이라고도 불렸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일제강점기에 흑석동에 살았던 부자 일본인이 만든 큰 연못이 그 시장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일본인은 기노시타 사카에이다.

 

역사속의 흑석동 

[1] 흑석동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였다.  흑석동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고 흑석동에서 가까운 동작진에 대한 기록은 많다. 동작진은 조선시대 4대 도선장이었던  한강도, 양화도, 노량도, 삼전도과 규모를 나란히 하는 큰 나루터였다고 한다. 동작진은  남태령, 관천을 지나 수원으로 빠지는 대로의 길목이었다.

 

( 조선시대의 한강의 큰 나루터에는 다리가 놓여졌다.  광진- 광진교, 천호대교, 삼전도- 잠실대교 ,독도진-영동대교, 두모포-  동호대교, 입석포-성수대교, 한강도- 한남대교, 서빙고진- 반포대교, 동작진-동작대교, 흑석진-한강대교, 노량진- 마포대교, 서강진- 서강대교, 양화진- 성산대교, 공암진- 행주대교)

 

 

 

[2] 1912년 흑석리에 있던 도당칠성은 한강신사가 되었다.

조선시대 말까지 흑석동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였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한강가에 한강신사가 생긴다.  일본인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가 흑석마을 주민들이 칠성신에게 봄, 가을 마을에  제사를 지냈던 도당칠성을 한강신사로 바꾸었다. 



* 시키 노부타로는 1869년생으로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출신이며, 자신의 토목건축회사인 시키구미(志岐組)를 통해 경부철도 속성공사를 비롯한 철도관련 청부업에 주력하여 부를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1921년에 조선의 특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천연빙(天然氷), 즉 겨울철 한강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 판매하기 위해 조선천연빙주식회사 및 조선천연빙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36년에 이들 회사와 여타 제빙회사가 조선제빙주식회사(朝鮮製氷株式會社)로 통합 전환한 이후에도 사장의 자리를 지킨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이래저래 한강과는 많은 인연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https://www.minjok.or.kr/archives/98835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구역확정 때 과천군에서 시흥군으로 넘어가 시흥군 북면 흑석리가 되었다.

 

[3]1929년 일본인 기노시타 사카에가
한강신사 근처에 명수대토지사무소를 건립했다.

1929년  기노시타 사가에는 한강 인근 저습지에 화려한 일본식 연못을 건립하여 명수호를 만들었다. (흑석시장이 연못시장이라고도 불린 이유다. 중앙대병원 건너편).  주변에 일본신사와 명수대유원지를 건립하는 등 80만 평의 부지를 개발하였다. 물론 자신이 사는 주택도 지었다. 당시 주민등록에 따르면 130세대의 일본인이 이곳에 거주했다.
* 초등학교 때, 잘사는 몇명의 잘사는 친구들에 갔었는데, 집들이 일본식이었고, 바로 이 지역이었다.  1917년에 나루배가 다니던 흑석진의 자리에 자동차가 건널 수 있는 최초의 한강다리인 한강대교가 놓여 졌기 때문인 것 같다. 

<기노시타 사가가 만든 명수대 근처 일본인 거주지역의 사진
위쪽은 한강이고 왼쪽 언덕에 있는 건물이 한강신사이다.>
http://dongjaknews.com/8991

 

 

[4]1936년 경성부 영등포출장소 흑석정 京城府 永登浦出張所 黑石町으로 바뀐다.

조선 초기 서울의 행정구역은 부(部)-방(坊)-이(里)의 위계로 편제되었다. 이(里)는 큰길에서 갈라져나간 작은 길과 그 작은 길 좌우에 배치된 필지들의 바둑판 같이 생긴 모양을 딴  글자다. 하지만 서울 사람들은 도로로 구획된 공간을 ‘공동체’의 공간으로 승인하지 않았조선 중엽부터 이(里) 대신 역을 담당하는 단위인 계(契)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계(契)도 얼마 뒤 동(洞)으로 바뀌었는데 동은 문자 그대로 물(물 수(水))을 함께(같을 동(同)) 쓰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말 ‘마을’은 ‘물’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里)나 동(洞)이나 우리말로는 모두 ‘마을’이지만, 마을의 원뜻에 부합하는 것은 물 공동체인 동(洞)이다.

하지만, 러일전쟁 이후 서울의 실질적 주인이 된 일본인들은 본래의 지명과 구획선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일본식 이름을 붙였다. 1914년, 경성부는 청계천을 경계로 그 이북,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지명은 동(洞)으로 놓아두고, 그 이남,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지명은 마치(町)로 통일했다.  

전우용의 서울탐史- 인사동과 관훈동 유래를 아시나요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466.html

한겨레 2012.12


[5]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區制度를 실시하게되어 
 경성시 영등포구 흑석정이 되었다. 

 

[6] 1946년 10월 1일 서울특별자유시 영등포구 흑석동 永登浦區 黑石洞이 된다.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흑석동이 되었다.

* '서울특별자유시'는 일제가 물러간 후 한성부의 제2대 부윤으로 부임했던 김형민이 붙인 이름이다.  ( 그러나 '서울'이란 말은 수도를 뜻하는 보통명사였고 , 서울의 지명은 한양을   행정구역 명칭으로 한성부였다. 또 수도라는 뜻의 한자어로 경주, 경도, 수선 이런 여러 용어들을 섞어 썼다.) 한성부라고 하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경성부는 일제 시대 이름이었기에 김형민 부윤은 도시의 새 이름을 순수 우리말인 '서울'로 선정했다. 

[역사라이브] "서울, 이승만 호 따서 '우남시' 될 뻔" [JTBC] 입력 2014.02.27 
■방송 : JTBC 정관용 라이브 (11:40-12:55) ■진행 : 정관용 교수  ■출연진 : 전우용 교수

https://news.joins.com/article/14017654


어머니께 우리가 이사오기 몇해 전에 흑석동에 큰 물난리가 나서, 사람들이 널빤지를 타고 떠다녔다고 들었다.  불도저 시장 김현옥에 의해 1968년부터 추진된 서울개발계획이 수립된 계기는 1966년의 홍수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말했던 그 물난리도 1966년인 것 같다.

 

내가 이사 오던 무렵 - 1973년의 흑석동 모습
나는 세살때부터  30살이 될때까지 감기에 걸릴 때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공화의원에 갔었다.

나는 2000년 11월 결혼을 해서 홍은동에 살게 되기까지, 28년간 흑석동에 살았고 지금 그 집은 흑석6구역이 되어 재건축을 거친 후, 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흑석동은 11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어떤 곳은 아파트가 되기도 했고, 돈이 되는 "금석동"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친정집앞은 아파트가 되고 있는 중이다.  친정집이 재건축 되던 기간에 어머니 아버지가 살았던 지역이었다. 엄마 아빠는 30년간 '집주인'었는데 재건축 때문에 10여년간 세입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곳의 흔적도 없어졌다.

 

 

 서울 도심부 주택가는 큰집과 작은집이 어우러져 있었다고 하고

골목을 중심으로 하나의 작은 도시공동체를 이루었다고 한다.

 


가회동 31번지는 1935년에 개발되어 한국전쟁이 나기 전까지 10가구가 자기집처럼 이웃집을 드나들며 한 집처럼 살았다고 한다.

 

 

 

 

한국에 사는 뉴욕 출신 미국인인 마크 테토가 " 진짜 서울의 삶은 이름조차 없는 작고 수 많은 골목에서  매일 숨쉬고 먹고 마시고 논쟁하고 사랑하고 헤어지며 존재한다." 라고 하는 글을 써서 서울사람들이 감탄했었다.

사실 골목이 많았던 흑석동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러 명이 어울려  선생님이 채점하는 걸  도와주고 집에 오던 길, 집 앞 골목에서 남자 중학생에게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피했고, 대학때 밤늦게 돌아오던 길에 성추행을 여러번 당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때 아빠를 도와 장사를 하게 된 엄마의 빈자리는, 옆집 아줌마들과 아이들이 나와 놀던 골목길이 없으면 메꿔지지 못했을 것이다.  고향에서 엄마가 쓰러졌을 때 한 동네에 살던 사람들은 엄마를 손가락질 했다.  시골이라서 인심이 더 좋고, 서울이라서 인심이 고약한 것만은 아닐 텐데.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끼리 상호간의 교류와  존중 또는 프라이버시의 적당한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도 흑석동, 서울의 골목들은 하나하나씩 지워져 가고 있다.

 

 



출처: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jh6_8HIP0moJ:https://booksreview.tistory.com/1315&hl=ko&gl=kr&strip=0&vwsrc=0 [책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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