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관이 생명권 보호의무에 대한 판결을 읽기 시작했다.//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아무것도」, p. 318).
이 생명권 보호의 의무를 탄핵의 사유에서 제외한 그 순간
▶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다고 말
하지만, 여기를 나가서, 어디로 가겠다는 걸까?”(「아무것도」, p. 292)라
▶ 도구가 되는 인간은 주체로서 자신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도구로 쓰이기 위해서는 한 사회에 속할 수 있는 정체성이 부여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그 사회에 속하게 된다. (17) 그러나 누군가는 도구처럼 쓰이면서도 끝내 그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 아이히만이 나치라는 사회에 속했던 도구라면, 그들의 목적을 위해 서 쓰이고 마모되어 죽더라도 끝내 그 사회에 속하지 못했던 유대인들은 도구조차 될 수 없던 인간이다.
▶ 우리가 하나가 아님을
광장에 함께 모였던 혁명의 경험 이후에 한국 문학은 역설적으로 우리라는 주체, 하나의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합적인 주체의 불가능성을 생각한다.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생각이 괴로운 착각이었음을, 그 광장에서도 끝내 누군가를 보지 않고 밀어 내는 또 다른 혁명의 계보가 그 속에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광장은 하나의 우리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장소가 아니라, 여러 단상 중에 하나가 된다
▶ 이졸데 카림은 오늘날 세계의 주요한 변화를 다원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그는 서구화된 세계에서 중심적인 정체성 의 모델이었던 개인주의가 몇 차례의 역사적 전환을 경험했다고 주장한다. 민족국가의 탄생과 정치적 민주주의로 특징지어지는 1세대 개인주의는 개인을 정치적 주체로 만들면서 이 개인들을 법적 인격으로서 평등한 (그러기 위해 동질화된 ) 주체로 환원한 다. 추상적으로 동질화됨으로써 그 고유한 내용이 비어버린 주 체들에게는 집합적인 주체를 만들어내는 ‘민족’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이 부여된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로 대표되는 2세대 개인 주의는 (내용 없는) 동등함을 대신해 차이와 불일치를 강조하면서 거대 체제로부터 이탈하고자 한다. 변하지 않는 개인이 가진 정체성을 “온전한 정체성의 규범 안에 수용시키는 일”이 2세대 개인주의의 방향성이었다면 다원화의 효과로 출현한 3세대 개
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26) 한다. 3세대 개인주의가 마주한 상황은 주 어진 정체성의 당연함을 보장해주던 힘들이 약화되면서 정상성을 주장할 수 있는 범주 자체를 상실했다. 그런 점에서 다원화의 경험이란 온전하고 완전한 정체성을 살아가는 대신에 다른 사회 적 힘들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항상 자신의 자리를 의문시하는 소수자의 삶이 일반화되는 경험이다. 자기 정체성의 정당함이 시험에 들게 된 상황을 카림은 “당연함이 축소된 자아”라 표현 한다.
(27)
1987년 이후 가장 강력한 집합적 정체성을 부여해왔던 광장에서 오히려 배제와 차별의 구조를 발견했을 때, 광장의 시민
을 만들어내던 그 힘이 어떤 한계에 직면했다는 징후를 보인다.
▶하나의 우리만이 있는 것 이 아님을 깨달을 때, 다른 우리의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그 많은 이를 인정할 때, 그 이후에야 한 발을 내딛고 나아갈 수 있는 어 떤 가능성이 있다.
한 개인의 이력이 곧 역사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사건이 병치되며 사적 사연과 공적 담론이 수평적으로 나열된다.
아저씨는 나 알아요?
그가 뭔가를 씹으며 d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알지.
어떻게 알아요.
봤지.
언제요.
매일?
이름은 알아요?
대체 궁금한 게 뭐야.
아느냐고요 내 이름이요…… (p. 70)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227쪽)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거. 제대로 연결해서 생각해야 해. 그런데 이렇게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도 몰라. 오히려 그런 것쯤 없는 셈으로 여기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도인지도 몰라. 그러니까 기억해두지 않으면 안 돼. 안 그러면 잊어먹게 되는 거야. 잊으면 괴물이 되는 거야.”(160쪽, 강조는 인용자)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그들’의 저항을 떠올린 직후 진공관에 손을 내밀다 “섬뜩한 열”(284면)을 느
끼고 손을 뗀 d의 통증에 도달하기 위해, 전작 『계속해보겠습니다』의 ‘나나’
의 말을 잠시 경유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
각합니다. (…)
소라와 나나와 나기 오라버니와 순자 아주머니와 아기와 애자까지 모두,
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
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
다.(227면)
모성 상실의 외상(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는 의미를 알지 못하다가 결정적인 계기가 작동되
었을 때 과거의 사건이 현재적 삶에 영향을 끼치는 의미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을 ‘사후성(事後性)의 원리’라고 한다.15)
) 서동욱. 2001. 데리다의 ‘차연’과 들뢰즈의 ‘차이 자체’-프로이트 ‘사후성의 논리’의 상
속자들 . 문학과학. 27권. 9호. 151쪽.
모성을 상실한 그들은 자아의 주체적 삶을 키워나가기 위해
배워야 할 경험들을 박탈당했다. 그리하여 현실을 객관적으로 응시할 힘
이 없다.
‘자기서사(自己敍事)’는 정운채가 처음 정립한 용어로 이는
개인이 각자의 삶을 구조화하고 운영하는 이야기 구조이다.29) 사람은 모
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수많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한 능력
이나 행동, 소망, 관심사, 성공 혹은 실패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것
이다. 특정 사건들을 일정한 순서에 따라 어떻게 함께 연결하는가, 또한
그 사건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기서사는 결정된다.30) 삶
에서 경험한 다양한 사건들 중 어떤 사건들을 어떤 순서에 따라 선별하느
냐에 따라 동일한 개인이 타인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
고, 혼자 있기를 선호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이
로 인해 삶의 문제에 적절히 대처하기 힘든 이들은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
함으로써 자아를 인식하고자 하며 타자에 의해 망가진 과거를 복원하고
발화와 기록을 통해 자신의 시각으로 자기서사구성의 과정을 밟고 있다.
바흐친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할 대상 밖에 위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이야기한다.31) 자기 이해를 위해서는 자신의 바깥에 위치함으로써 객
관화된 시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글쓰기 치료에서는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자아에 대한 인식을 관찰자와 피관찰자로 분열시킨 후 관찰자 자
아가 피관찰자 자아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함으로써 다양한 각도로 자
신을 볼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을 시도하기도 한다.32)
이처럼 인지와 정서와 신체가 따로 움직이는 것은
‘파씨’가 충격적인 과거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씨’는
자아를 억압하는 세계 속에 갇혀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성과 감정을 조절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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