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액체현대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
▶ 지크문트 바우만은
▶ 소비주의와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제도적 특징을 액체 현대로 이론화
( 앤서니 기든스와 울리히 벡은 ‘제2의 현대’로 개념화)
▶ 액체 현대로의 변동 원인
- 소비주의, 신자유주의, 기성 정치체제의 위기
- 사회 구조와 개인 정체성을 모두 송두리째 뒤바꿔 놓음.
-구조적 차원에서의 대량 실업과 희망 없는 가난, 개인적 차원에서의 의미 없음과 외로움
▶ 그가 제시한 액체 현대에 대응 방법
- 액체 현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
- 권력에 대한 정치의 통제력 회복, 현실에 대해 비판적 사유를 갖는 회의주의적 태도
- 서로 다른 문화를 해석하고 중개하는 ‘해석자’로서의 시각
▶ 액체 현대 이론의 장점
사회를 구성하는 두 축인 구조와 정체성의 변화를 날카롭게 분석
자유와 불안의 동시 증진이 액체 현대의 특징이라는 통찰
▶대안의 탐구에서 아쉬움을 갖게
비판적 회의주의라는 소극적 태도 이상의 대안을 제시하지 않음
[2] 새로운 빈곤, 소비주의
<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 푸어(Work, Consumerism and the New Poor)>
현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빈곤층의 실상과 그것을 야기한 현대사회의 실태를 파헤
생산자들의 사회가 소비자들의 사회로 변화한 이후 등장한 소비주의에 대해 통찰을 제공
▲ 새로운 빈곤 <소비시대의 상대적 빈곤.. 자유경쟁의 패배자 전락>
사람은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행하는 존재
과거는 생산이 곧 그 인간의 가치를 입증하는 시대
근대 사회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생산자로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는 소비의 시대다. 무엇을 얼만큼 생산하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는 것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다.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기능해야 할 필요
에 의해 지배 받는다. 소비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단지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역할이 없는 자유경쟁의 패배자 취급을 받고 사회로부터 배제 당하고 심지어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기도 한다.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집단적으로 할 수 있지만 소비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소비는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선택 행위이다. 따라서 규범을 만들 필요도, 통제할 필요도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소비자로서의 역할이 일차적이고 생산자로서의 역할은 그 다음.
따라서 빈곤층은 산업예비군 혹은 실업자였던 과거와는 달리 결함 있는 소비자 혹은 비소비자로 다시 정의
소비자들은 이제 노동윤리가 아니라 미적 관심, 즉 소비미학에 따라 움직인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시간을 늘리는 것보다는 일과 놀이를 구분하는 경계가 없는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간주한다. 스타는 그런 점에서 많은 현대인들의 가장 동경하는 직업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소비사회는 장래 노동자 생산에 기여하고
노동예비군을 일시적으로 저장하는 역할을 했던 복지국가의 존재 기반을 약화시킴
냉전이 끝남에 따라 소멸된 외부의 적을 대신해 내부에서 배제된 집단의 역할이 필요해졌다는 사실을 지적
책의 말미에서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빈곤층에게 미래는 있는가?’ ‘소비의 시대에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
->“노동윤리를 장인의식의 윤리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
시장 중심의 가치평가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제약들로부터 노동을 해방하려면 노동시장 속에서 형성된 노동윤리로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장인의식의 윤리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되고 뿌리를 내린 노동윤리가 인정하지 않았던, 존엄성과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것의 의미를 인간의 본성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창조적 존재라는 사실과 더불어 집단적 빈곤에 대한 해답 또한 집단의 자발적 소박함에 근거한다는 믿음이 놓여 있다.
바우만은 근대성의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경험한 사회학자다. 모국 폴란드에서 반시오니즘을 겪고 영국으로 망명하면서 자본주의과 공산주의, 그 어느 것도 시대의 정답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근대의 문제를 유동적인 ‘액체성’으로 개념화한 접근 방법은 자신의 역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불안정한 이 시대에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문제를 진단하는 그의 통찰이 무엇보다 현실적이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옹호하는 세상!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우만에 따르면, 지금의 불평등은 이전의 불평등과 질적으로 다르다. ‘20 대 80의 사회’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다. 오늘날 전 세계 최고 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10억 명의 재산 총합과 같다. ‘0.1 대 99.9’의 사회라고 말해야 더 정확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돌연변이다. 질적으로 다른 사회적 종의 출현이다. 그런데도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없고, 불평등의 찬가, 현실 긍정의 찬가가 유행한다. 우리는 애써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마트에 가서 웃으며 물건을 사고 백화점에서 대기업이 유혹하는 상품을 바구니에 담기에 바쁘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의 희생자들 사이에서 우리는 쇼핑을 하고 웃고 떠든다.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불평등을 옹호하고 평등의 외침을 비웃는 이 기이한 현상은 어떻게 된 일인가? 불평등의 희생자들이 왜 불평등에 동의하는가?
바우만은 이 기이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는 계층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그 대표적인 새빨간 거짓말 4가지를 바우만은 이렇게 제시한다. “①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②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 대상들의 가속적인 교체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③인간들 간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④경쟁(가치 있는 사람들은 올라가고 가치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거나 추락하는 양면을 지닌)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왜 우리는 이런 거짓말에 속고 있을까? 바우만은 이 책 3장에서 왜 우리가 이런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면밀히 검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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