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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치가

by 책이랑 2017. 6. 12.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 10점
이정철 지음/역사비평사

꽤 긴 시간 동안 ‘제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을 썼다. 그러면서 ‘제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세상에 대해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얼마나 깊고 넓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가치가 구체화된 것이라는 점이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제도가 액체나 고체 같다면 사회적 가치는 공기 같다고나 할까? 어렴풋한 봄기운이 얼음을 녹이고 겨우내 죽은 듯 보였던 나무에 새순을 돋게 하듯이. 앞으로는 ‘제도’뿐 아니라, 그것을 움직여 나가는 사회적 ‘가치’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 같다. 

잠곡 김육, 안민을 실현한 정치가

저자는 김육에 관해 본격적으로 서술하기에 앞서 “어떤 정치가가 좋은 정치가인가?”라고 묻는다. 국가가 존재하고 우리가 그 속에 사는 한 정치가는 반드시 필요할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정치가를 뽑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는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을 먼저 보자. 김육이 죽고 난 뒤 충청도 사람들이 슬퍼하며 서로 와서 곡을 하고 부의금을 내려 했지만 김육의 아들 김좌명은 그것을 받지 않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그 돈으로 비석을 세운다.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다. 지금 평택에 있는 ‘대동법시행기념비’의 원래 이름이다. 대동법을 시행해서 세금을 고르게 해준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조문한 예가 두 사람 있는데, 한 사람은 이이요, 또 한 사람은 김육이다. 백성들이 김육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육의 젊은 시절은 신산하고 고달프기 그지 없었다. 성균관 유생 시절에 정인홍이 올린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광해군 대에 오현종사와 관련하여 이언적과 이황이 아닌 성운과 조식이 문묘에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 사건에 관해 상소를 올리고,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됨에도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잠곡으로 은신하여 직접 농사 지으며 숯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인조반정으로 서울에 올라온 뒤 계속된 장원급제로 뒤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젊은 시절의 고난은 이후 그가 개혁을 추진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머리가 아닌 몸과 생활에 배어든 백성의 삶은 그가 흔들림 없이 개혁을 추진한 토대였던 것이다.

김육은 자신의 평생 정치적 목표를 ‘안민’에 두고, 정치의 핵심을 누가 권력을 갖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안민’을 구현해낼 수 있는가로 보았다. 그는 현실의 복잡함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추상적인 원칙만 내세우지 않았고, 직무에 적합한 사람을 뽑아 썼으며(심지어 동전 유통과 관련해서는 사대부와 논의할 수 없고 저잣거리의 사람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을 정치적 외풍에서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생각하는 정치란 어디까지나 현실 문제 해결의 도구이고, 그것은 곧 민생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수립이었다. 대동법이 완성된 것은 이러한 그의 신념과 실행이 가져온 결과다.

정치가는 당위적 요구에 민감한 실천적 지식인과 구분되며, 정책이 지향하는 방향과 목표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이미 규정된 절차나 관행에 집중하는 관리와도 다르며, 현실이 내포하는 복잡성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변주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학자와도 다르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김육을 좋은 정치가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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