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15일 2017 순성놀이에 참가했습니다.
한양도성해설은 매주 일요일 1시 30분에 도성 4군데에서 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종로구와 중구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어요.
도성길라잡이 매주 일요일 1시 30분
http://tour.jongno.go.kr/tour/main/contents.do?menuNo=110428
그러나 한양도성을 하루에 한바퀴 도는 "순성놀이"는 일년에 딱한번 매년 10월에 열립니다.
그래서 공고를 봤을 때 꼭, 참가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먼 곳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 한양도성은 반가움의 상징이고 몇날 며칠을 걸어서 왔으니, 먼발치에서 한양도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드디어 한양이구나’ 싶은 안도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보러 온 선비들 중에는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며 급제를 비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도성민들에게도 전해져 ‘순성놀이’라는 놀이가 생겼다. 순성풍습은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한 선비들이 도성을 돌며 급제를 빌었는데 이것이 도성민들에게도 전해져 봄과 여름이면 짝을 지어 성곽을 돌면서 경치를 즐기는 순성 풍습으로 자리잡았다고 해요.
< 조선시대 선비들은 과거급제를 빌면서 순성놀이를 했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순성을 서대문이나 동대문에서 시작했다면 동그랗게성벽을 한번 돈 다음 가운데를 통과하여 다시 서대문으로부터 동대문 또는 동대문으로부터 서대문까지 한양도성 가운데 길을 통과했다고 해요. 시작할 때 마치는 곳에 짐을 두고 시작했다고 하고요, 그렇게 하면 가운데 중(中)자가 그려지고 과거에 통과하게 된다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순성은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꼭 하루 만에 마치지 아니하면 효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인왕산 구간에서 윤선비가 다리를 쉬고 있네요.
과연 윤선비는 무사히 순성을 마칠 수 있었을까요?^^>
‘일주코스’는 한양도성 18.6km를 걷는 것인데요, 산 4개를 넘으며 10시간 넘게 걸어야 하고 중간에 약 7km 가량의 끊긴 구간도 있으니, 이전에 구간코스라도 경험이 없다면 더욱더 가이드가 있는 순성놀이에 참가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러나 저는 체력도 모자랄 것 같고, 오후에 다른 일정이 있어서 4개의 구간코스중 목멱코스를 신청했습니다.
목멱코스는 광희문 → 자유센터 → 국립중앙극장 → n서울타워 → 백범광장 → 숭례문(남대문)의 여정이며 4시간 반정도 소요된다고 안내가 되어 있었어요. 일요일 아침 9시 50분에 목멱코스가 시작되는 광희문에 도착했습니다.
광희문은 사대문중 하나인 동대문에서 남산쪽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광희문은 위치상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긴 하지만 남소문은 아니었다고 해요. 음양설에서 동남쪽은 왕가의 ‘황천문(皇天門)’이라며 불길하게 여겼기에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굳게 닫혔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동남쪽에 있었던 탓일런지. 도성안에서 무덤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시신은 모두 지정된 성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와야 했는데 , 그런 성문으로 지정된 곳은 이곳 광희문과 아이들 시신이 나갔던 소의문(서소문)이었습니다. 특히 광희문 밖 일대에는 공동묘지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시신들이 나가니까 굿을 할 일이 많아서 당(집)이 많은 마을이라고 해서‘신당(神堂)’이라 부르던 것을 구한말 신당(新堂)이라 고쳤었고 지금은 다산동으로 동이름이 바뀐 상태입니다.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 원래는 '무녀촌'이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23461
또한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이문을 통과해서 송파나루에서 남한산성으로 갔는데요,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 꺼리는 문인데 왕이 이곳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은 왕의 격식을 차릴 틈이 없이 그만큼 황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80년대 후반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이 성문 밖에 전염된 사람들이 산 채로 버려져 마치 이 곳은 생지옥이 연상되었다고 합니다. 또 1907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에 불복한 한국군의 저항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었는데, 일제는 남대문 인근의 큰 접전에서 사망한 한국군 시신 120여 구를 모두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는 가족들이 찾아가 묻으라고 했습니다. 이에 광희문 앞에선 며칠간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1920년 이전만 해도 이곳에는 묘지가 많았고,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죽음과 왕의 도망, 그리고 다치고 죽은 군인들이 버려진 이곳은 아프고 슬픈 장소였습니다.
순성행사에 다녀온 후 집에 가지고 있는 책중에 <서울의 동쪽>이라는 책이 생각나서 다시 자세히 읽어 보았습니다. 동대문운동장 부근인 을지로 6가와 방산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군사 훈련 및 전술 강습을 담당했던 훈련원이 있었고 군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이책은 그림책인데 책의 맨뒤에 참고문헌이 두페이지나 되니 어린이들만 보는 책이라고 할 수는 없는 그림책입니다.
" 대한민국 보물1호 동대문, 한국 패션산업의 메카라 불리는 동대문시장, 그리고 한국 스포츠의 산실인 동대문운동장이 자리했던 서울의 동쪽 지역 육백여 년 역사를 한 권의 그림책에 담았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대문을 세운 이래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어떻게 변화하여 왔으며 이곳을 터전으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삶과 변화에 담긴 의미를 꼼꼼하게 톺아보았다."

안타깝게도 여기서부터 남산 구간이 나올 때까지는 성벽이 소실된 부분입니다. 그래서 해설사님이 동네 곳곳에 남아 있는 도성의 흔적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을을 빠져나오기 전, 계단 위에서 앞쪽을 보니 두개의 다른 방식으로 쌓은 돌담이 보였습니다. 가운데에 장방형, 수평으로 들여 쌓기를하며 쌓는 것이 우리나라의 담쌓기 방식이고 양쪽의 담은 송곳쌓기로서 돌이 마름모로 쌓여 있는데요, 일본방식입니다.
우리나라는 장방형의 돌을 수평으로 쌓되 위아래 돌이 어긋나게 쌓고 중간에 돌이 밀려나지 않도록 ㄱ자 모양의 돌을 배치아기도 합니다.
사진출처 http://thruguide.tistory.com/tag/%ED%95%9C%EC%96%91%EB%8F%84%EC%84%B1
본격적인 도성이 나타나기전에 담쌓는 것에 대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한양도성의 담쌓는 방식은 고구려의 그랭이 공법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랭이 공법은 성을 쌓는 땅에 있는 암반을 제거하지 않고 그위에 올리는 돌을 그 암반의 모양에 맞게 다듬어서 암반 위로 성을 그대로 쌓아 올리는 것으로 이미 땅에 깊게 묻혀 있는 암반들이 성곽을 단단하게 지지해준다는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지난번 지진에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피해가 없었던 것도 이러한 그랭이 공법 덕분이라고 하니 조상들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고룡선생의 녹색세상
지진도 거뜬히 버틴다 ‘그랭이 공법’
신라 건축물 불국사와 석굴암 피해 없어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A7%80%EC%A7%84%EB%8F%84-%EA%B1%B0%EB%9C%AC%ED%9E%88-%EB%B2%84%ED%8B%B4%EB%8B%A4-%EA%B7%B8%EB%9E%AD%EC%9D%B4-%EA%B3%B5%EB%B2%95
이와 대비되는 일본의 돌담을 볼까요? 일본의 오키나와 슈리성은 복원을 거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인데요, 사진에 보면 슈리성의 성담은 돌담의 선을 서로 맞물려 꽉 끼게 쌓아 쉽게 성위로 오르지 못하도록 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일본 전역에 걸쳐 이런 양식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돌담 가운데 대표적인 양식은 다이아몬드 형태로서 개 이빨처럼 생긴 모양 때문에 견치석이라고 부르는 양식이라고 해요.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 유입되어 현재 우리나라의 도시의 축담이나 도로 건설이 이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제주돌담의 원형도 급속히 훼손되고 있다는 기사도 있네요.일본형식 돌담으로 대체 제주돌담 원형 급속 훼손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466
이제 저희 일행은 장충동 100번지에 들어섰습니다.
해설사님께서 "예전에 드라마에 부자집이 나오면 전화를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하십니까? '여보세요. 장충동입니다 하고 받았죠? 이곳 장충동 100-1번지는 대한민국 부촌 1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셨어요.
이곳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는 1921년, 1934년과 1938년 세 차례 분양된 문화주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개발 이전, 는 빈민촌과 화장터가 있었지만 일제는 격자로 구획된 도로와 규격을 갖추고 큰 필지로 분양을 했대요.
“..장충단의 옆부터 동으로 꺾어 넓은 새 도로,왕십리로 가는 전차도로부터 우측으로 꺾어 장충단 안쪽에 나오는 12간 도로,. 즉 島德도로는 멋지게 완성되었다.게다가 이 도로에 접속하여 약 5천 평은 整地가 되었고,화장장의 흔적도 몰라볼 정도로 멋진 주택지의 바탕이 되었다.”
이 일대에는 고 이병철 회장 자택을 비롯해서 큼직큼직한 집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분양되었던 북촌 한옥과 그 규모를 비교해 볼 때 문화주택은 세 배가량 크다고 하니 어느정도 경제력이 있었겠지요? 고향을 떠나온 일본 기업가,경성제국대학의 교수,체신국장 등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고 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유학생정도가 살았다고 합니다.
(한국인 주거독립사)①문화주택단지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562213
자 이제 우리는 큰 길을 건너서
남산구간으로 들어섰습니다.
사진의 구멍은 돌을 캐기 위해 나무를 박았던 구멍이라고 합니다. 큰 돌이나 바위를 캐낼 때는 돌 또는 바위에 먼저 정(釘)으로 쐐기 구멍을 낸 다음 주로 밤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붓는대요. 시간이 지나면 나무가 불어나겠죠. 그러면 그 힘으로 바위가 쪼개진다고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돌을 뜬다’고 표현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바위를 깨트려서 석재를 떠내는 일을 채석(採石)이라고 하기보다는 부석(浮石) 또는 벌석(伐石)이라 했고, 이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대요. 도성안과 도성밖의 십리안에서는 돌을 캐지 못해서 그 곳밖에 돌을 캐는 부석소들이 있었다고 해요. 한양에서 떨어진 아차산 등에서 돌을 캐왔습니다.
여기서부터 온전한 한양도성의 모습을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성벽 밑에는 각자성석이 붙어 있었습니다. 각자성석이란 성을 쌓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태조 5년(1396)에 세워진 것으로 내사산(內四山) ,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인왕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한 것입니다.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에 이르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 514년) 도성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한양도성은
-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습니다.
-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어
- 백악의 동쪽 첫 구간부터 시계 방향으로 천(天), 지(地), 현(玄), 황(黃) 구간이 하나이름을 붙여나가 백악 서측 끝에 있는 97번째 구간으로 끝이 나는데 그 이름은 천자분 97번째 글자인 조(弔)였습니다.
- 그리고 97개 구간들을 크게 5구간으로 나누어 각 도(道)에 담당 구역을 나눴습니다.
- 2개 구간마다 판사와 부판사 1인을 설정하였고, 사·부사·판관 등의 관리 12명을 배치하였습니다.
- 1자의 구간은 영조척(營造尺)으로 600척인데 대략 193m 정도입니다.
- 전체 둘레는 5만 9천 5백척으로 대략 18km입니다..
▶ 天 ~ 日 동북면(함경도) 백악산 ~ 숙정문 5400척(≒1.6km)
▶ 月 ~ 寒 강원도 숙정문 ~ 광희문 4800척(≒1.4km)
▶ 來 ~ 珍 경상도 광희문 ~ 숭례문 24600척(≒7.4km)
▶ 李 ~ 龍 전라도 숭례문 ~ 돈의문 9000척(≒2.7km)
▶ 師 ~ 弔 서북면(평안도) 돈의문 ~ 백악산 14400척(≒4.3km)
-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습니다.
맨 아래에 글씨가 보이지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구간은 경상도 분들이 쌓았네요. 인력동원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습니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습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습니다. 또한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습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습니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습니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습니다.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7> 한양도성(중)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616018002#csidx22447cd9adc3f99814c211ec6bd04ee
이때 나라에서는 백성을 징발했을 뿐 아무것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사는 고장에서 자기 먹을 양식을 가져 와 쌓음 피땀흘려 쌓은 것이 한양도성입니다. 따라서 기록상에 성을 쌓다가 사망한 사람이 몇명이다라고 남았더라도, 집에 가서 뼈가 빠지게 일한 후유증으로 앓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자연석을 쌓은 것이니 태조때 쌓은 것이고
위쪽은 조금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 세종때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태조때 토성으로 쌓은 도성은 세종 때에 새롭게 단장합니다.
- 전국에서 백성 32만 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여
- 흙으로 쌓았던 성곽을 전 구간 석상으로 다시 쌓았고,
- 숙종 때 이를 다시 보수했습니다.
성벽에는 개보수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돌의 재질과 크기 모양에 따라 그 시기를 구별할 수 있고, 기술의 발달과정도 알 수있습니다. 태조때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다면 세종때는 평지의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성돌의 모양도 옥수수알 모양으로 다듬었습니다. 숙종때는 성돌크기가 40~50cm로 규격화되었으며 군인들을 동원하여 근대적 축성기술을 기반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습니다.
풍수지리상 상서로운 곳은 산세뿐 아니라 물길도 중요하지요. 한양의 명당수는 개천(청계천)입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동고서저이지만 서울은 인왕산이 있는 서쪽이 높고, 타락산이 있는 동쪽은 낲은 서고동저의 지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양은 접시모양의 땅(분지)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접시의 가장자리격인 인왕,북악산에서 물이 흘러들고 남산에서 흘러든 물은 개천(청계천)에 모이고 서쪽인 경복궁쪽에서 동쪽인 동대문쪽으로 흐릅니다.
<서울의 물길>
<1912년 서울 중심부의 수계 및 등고선>
그래서 동대문쪽의 성벽에는 개천의 물이 나가는 문을 따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동대문패션타운을 만들기 위해 운동장터를 팠을 때 발견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입니다.

성의 몸체인 체성위에는 여장이라고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군이 몸을 숨기는 곳으로 총안이라고하는 총구멍이 있어 조총이나 승자총통 등의 화약무기를 밀어넣고 공격을 합니다. 원총안 평평하게 근총안은 가파르게 각 뚫려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7부 능선쯤 위에 있어서 시야가 트였습니다. 나뭇잎들의 색깔이 바뀌어 가고 있었고 일년 중 가장 아름답다는 한국의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라호텔쪽으로 가까이 가기전에 정자에서 쉬면서 이제 남산의 수난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라호텔이 서 있는 자리는 우리나라 제 1호 국립묘지인 장충단이 있던 자리입니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은 홍계훈, 이경직 등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에 만든 애국열사 추모공간이며 이후 을미사변에 국한되지 않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왕실 수호를 위해 희생당한 군인들의 충절을 기려 제사를 지내게 함으로써 조선 최초의 국립묘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08년 일본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초청해 야유회를 열고 여기에 조선의 군부대신 등을 초청했다. 그리고 같은 해 일본은 장충단에서 올리던 제사를 금지했으며 결국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피살되자 그의 장례식추도회를 이곳 장충단에서 개최하였으며 장충단 비석을 뽑아 숲 속에 버렸으며 기타 부속건물들을 폐쇄했습니다. 1919년 장충단을 공원조성대상지로 만든후 벚나무 수천 그루가 심고 광장, 연못, 놀이터 등이 만들어져 결국 1921년 공원으로 개장했습니다.
또한 이토가 죽고 그의 사망 20주기가 되던 1929년 말 그의 기원하는 사찰을 건립하고 하여, 친일파 박영효, 윤덕영 등 6명의 조선 귀족이 참여하여 1932년 <박문사(博文寺)>라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모사찰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또 이 절은 그는 바로 남산의 <조선신궁>을 설계했던 사람인 일본 국수주의 건축학자 이토쥬타(伊藤忠太)가 담당했습니다.
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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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해 장충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사찰 박문사(博文寺).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이다. 사진은 일제가 발행한 당시 박문사를 알리는 엽서. [사진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그런데 1960년대 후반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주)임페리얼은 1960년대 후반 박대통령의 지시로 외국인 접대를 위한 위락시설을 짓기 위해 장춘단 부지를 헐값인 28억 4,420만원에 불하받습니다. 이때 호텔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회사가 장충단을 헐어버리고 박문사를 지은 일본기업인 다이세이건설이라고 하네요. 일본은 박문사를 지으며 조선의 궁궐들을 마구 훼손하였습니다. 본당만 신축일 뿐 나머지 부속건물들은 대부분 조선궁궐의 건물들을 뜯어와 옮겨 놓은 것인데요, 박문사의 쿠리는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경복궁의 <선원전>이며,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와 정문으로 사용했습니다. 또 정문 옆 돌담은 광화문을 허문 뒤 그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으며, 특히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을 파괴하고 부속건물인 <석고각>을 이곳 박문사의 종각으로 사용했습니다. 체계적으로 조목조목 대한제국을 능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보면 한국의 정치인과 한국의 기업인은 정말 한국인인지 의심이 갑니다. 일본군 자위대 창설 50주년 행사가 열리는 곳이 신라호텔이고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식당출입을 제지당한 것도 신라호텔이었지요. 1988년 경희궁이 복원되기 전까지 신라호텔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정문으로 사용했습니다. 박정희와 삼성을 비롯한 재벌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돈과 권력에 나라의 정신과 영혼 따위는 다 팔아치울 수 있는 자들이며 그것도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능멸하는 자들입니다.
아, 이 분들은 그냥 일본인이 되어 일본 갔으면 좋겠어요. 정말로요.해설사님께서도 나라의 충신을 기리는 장소를 철저히 훼손한 사람에게 맡겨 그 위에 호텔을 지었다는 것에 비감을 느낀다고 하시면서
"과거를 반성 돌아보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행은 이제 신라호텔 옆을 지나고, 반얀트리 호텔마당을 통과하여
큰길 너머에 있는 국립극장 쪽으로 건너 갔습니다.
이제 석성을 보면 언제 축조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자연석을 쌓았으니 태조때이겠네요.
현재 태조 때 쌓은 도성의 흔적은 전체 성곽 중 약 11%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평지에 쌓은 토성의 흔적은 세종 때 전면 석성으로 교체했기 때문에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남산 구간에는 태조 때 쌓은 석성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태조때 쌓은 성벽에 앞에 서서 해설사님이 설명해 주셨어요. 성벽의 돌에는 <금>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여 있고 570보라는 글자도 있었어요. 이곳부터 570보 구간은 은 <금>위영에서 담당하는 구역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 성벽에는 점점 담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생기고 있는데요, 남산의 식생이 바뀌면서 지하의 물길 등이 바뀌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지금 남산은 남산의 상징인 소나무가 죽고 갈참나무들이 득세하는 중이라고 해요.
해설사님이 400개라고 하셨지만 오른쪽에 성벽을 두고 그것보다는 훠얼씬 더 많아 보이는 나무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이 다리가 내다리인가, 아니면 무쇠덩어리인가...하는 잡생각이 머리를 꽉채울 무렵,
계단이 끝났고 숲길을 10분쯤 지나니 다시 시야가 확보되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언덕을 올라 남산의 꼭대기에 도착했습니다. 해설사님께서는 사드의 영향으로 중국사람들이 안와서 이런 풍경도 다 있다며 사람이 너무 많아 걸음을 옮기지도 못할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여기가 중국인가요, 우리나라인가요. 관광은 돈벌이가 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일상을 댓가로 내줘야 하는 일면이 있기도 합니다. 이 곳 남산뿐 아니라 경북궁 서쪽 서촌, 경의선 숲길이 조성된 연남동 등에서 "우리를 좀 내버려둬. 그냥 좀 살게!" 하는 주민들의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남산 꼭대기 팔강정 옆에서 쉬면서 1920년대의 남산과 오늘날의 남산의 커다란 사진 앞에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택시타고 택시 타고 남산 한 바퀴 도는 드라이브는 가장 호사스러운 허니문이었다고 하지요?
남산의 정상부에는 나라에서 봄·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國師堂)’인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던 신성한 공간입니다. 남산은 높이가 262m인 나지막한 산이지만 고려 문종 21년(1067)에 당시 서울이 3경의 하나인 남경(南京)으로 승격하게 되었고, 조선 태조 4년(1395) 12월에 남산을 마(맞)=앞=남 뫼=산 등으로 남쪽 산이라는 말을 한자로 번역하여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칭호로 봉작하고 나라에서 행하는 굿을 베풀던 사당인 국사당을 설치하고, 일종의 산천제를 지냈습니다. 이는 고대로부터 지속되어온 산악신앙을 이어받은 것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산천에 제를 지냈습니다.
1920년대의 사진을 살펴보다가 해설사님께서 지도에 인왕산 자락에 표시된 붉은 양옥집인 딜쿠샤의 주인인 알버트 테일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셨어요. 알버트 테일러는 소년시절 광산개발자인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왔다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목격했고 외신기자로 활동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취재해서 서방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자신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난 날, 갓 태어난 아기와 아내를 만나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했다가 아들의 요람 밑에서 한국의 독립선언문을 발견한 일입니다. 그날은 기미년의 3.1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하루 전날이엇고 알버트는 발견한 독립선언서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빼돌려 서방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수원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숱한 만행을 서방 언론에 알렸다고 해요. 그런 그가 서울 곳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다가 서울 서쪽 성곽 바깥쪽에 자리하고 있던 권율장군 은행나무를 빌견했고 아내의 요청에 따라서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왕산 자락의 첫 번째 집인 딜쿠샤 입니다.
< '딜쿠샤'는 힌두어로 '이상향', '희망의 궁전'을 뜻하며 3·1운동 당시 조선에 대한 일본의 무단통치 실상과 우리 민족의 평화적·비폭력적 저항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미 AP통신사 임시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던 벽돌 가옥이다. 서울시는 '딜쿠샤'를 70년 만에 원형 복원 후 20119년에 시민개방할 예정이다. >
딜쿠샤 원형복원, 앨버트 테일러의 발자취를 찾다. 3·1 운동 유적 딜쿠샤(Dilkusha) 자료의 서울 귀환!
http://www.museum.seoul.kr/www/board/NR_boardView.do?bbsCd=1015&seq=20161220111714549&tr_code=m_sweb&sso=ok
이곳이 어딘가 했더니 지난 추석연휴에 국궁터인 황학정을 갔다가 지원이와 넘어왔던 그 길에 있는 거네요.
아래 사진은 딜쿠샤의 현재모습이고
그 앞에는 권율장군의 집터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권율도원수(權慄都元帥)집터 행촌동1-113번지
권율장군은 사실은 문과에 급제한 문신(文臣)으로서 중종32년(1537)에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남원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한 공적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해전, 진주성싸움과 더불어 3대첩으로 꼽히는 행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는 결국 왜군들이 서울을 포기하고 남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791519.html#csidxb38833018396d339f3994635ce71c4f
원래 권율장군은 인접한 필운동12번지 현재의 배화대학교 자리에 살다가 이 곳은 사위인 이항복대감에게 물려주고 인근인 행촌동으로 이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권율장군 집터 표석 바로 옆에 있는 은행나무는 권율장군 집 안에 있었다고 이 때문에 이곳을 은행동 혹은 은행나무골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렇게나 중요한 역사적 인물이 살았던 집터에 달랑 집터가 있었다는 표지석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한탄 하시는 분들도 많네요.
권율장군과 사위인 이항복 대감과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전해져 옵니다.
오늘의유머 - 괴짜 사위와 괴짜 장인-권율과 이항복의 에피소드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030727
남산 팔각정 계단에 앉으면 바로 맞은 편에 봉수대가 보입니다.
남산은 나라의 재난정보가 총합되는 공간으로서 5개의 봉수길에서 올라오는 정보가 취합되는 곳입니다. 5군데의 정확한 위치는 찾을 수 없고, 다만 아까 헉헉거리고 올라온 계단 옆에 있는 미군 통신부대자리가 제2봉수대터인가로 짐작하고 있다고 합니다.5개의 봉화길에서 정보가 들어오면 아침에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병조에서 그 정보를 취합해서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광희문을로 급하게 도성을 빠져나간 것은 국가기간통신망인 봉수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인조는 광희문을 통과해서 송파나루로 가서 남한산성으로 몽주했지만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의 장수에게 항복해야 했습니다. 송파나루인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해야 했습니다. 이는 절을 세번 하는데 절을 하기 위해 한번 땅에 엎드릴 때마다 무릎을 꿇고 양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는 의식입니다.
해설사님께서는 절을 받는 수함단이 매우 높고 그 위에서 이마가 땅에 닿는 소리가 들려야 해서 인조가 백여차례? 혹은 이마에 피가 철철 날 정도로 여러번 했다는 말이 있다고 하셨지만 자료럴 찾아보니 정식기록에는 없는 이야기라고 하네요. 그래서 이번에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이 장면이 담담하게 그려진다고 하죠.
해설사님은 봉수가 잘 관리 되지 않은 것은 국가 기간 통신망이 작동되지 않은 것이며 온국민의 몸과 마음 영혼에 상처를 받은 세월호 사건 역시 TRS라는 국가 기간통신망이 끊어진 같은 종류의 사건이라고 하셨어요 그당시, 재난시 작동해야 할 콘트롤타워가 무너진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이죠. 역사를 돌이켜보면 국가가 이런 상태일 때 국민들이 전쟁과 같은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반성이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권력을 가지는 사람이 국민은 안중에 없고 개돼지로 취급하는 상황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뒷세대에게 안전한 국가를 물려줘야 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겠다고 하셨어요.
남산은 ‘목멱대왕’ 칭호 받아 국가 제사 지내… 군사요충지이자 지정학적 거점
일본총독부는 처음에 남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0년 남산의 봉감관저에서 한일합병조약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장소입니다.
남산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거점지역이 되어 신성하고 친근했던 남산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을 비롯한 세군데의 신사를 지날 때면 전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이쪽을 향해서 묵념을 숙였어야 했습니다.
설명을 다 들은 후 착찹한 마음으로 "잠두 포토아일랜드"에서서 시내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이 곳은 조선시대부터 도성 안팎의 의 모습을 한눈에 볼수 있는 장소로 유명했습니다. 남산은 생김새가 누에 같다고 해서 잠두산이라고 불렸습니다.
풍수설에 따르면 “한양의 풍수에서 안산인 남산은 생김새가 누에 형상의 삼두봉인데 안산을 잘 길러야 도성에 불행이 없고 번창한다”고 여겼대요.누에산인 안산(남산)을 잘 기르기 위해 남산을 중심으로 나라에서 관장하는 '국영 뽕나무 단지' 를 지정했는데 동쪽은 잠실, 서쪽은 연세대 주변, 남쪽은 여의도 공사 때 폭파해서 매몰시킨 밤섬, 그리고 잠실 아파트 단지로부터 잠원동 신반포에 이르는 한강 남쪽 연안, 신잠실이었습니다. 이 지역 중에서 잠실은 저습지에다 한강이 실어 나르는 비옥한 토질이 쌓여 있는 곳이서서 뽕나무가 가장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또 조선시대의 양잠업은 오늘날 반도체 등 첨단 산업처럼 국가의 핵심 산업이기도 했는데요, 왕실에서는 반드시 이 잠실의 뽕으로 왕실내의 누에를 길렀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잠실리 뽕나무는 현재 생명력이 없이 형태만 남아있어 사실상 죽은 상태이지만 서울시는 나무의 오랜 역사적 가치를 존중해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해 관리 중이다.>
[명품 문화역 탐방] (13) 3호선 잠원역은 양잠박물관
https://www.junsungkinews.com/35496
계단을 따라 남산의 회현자락을 통과하여 백범광장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서울시가 지난 2005~2015년까지 3단계에 걸쳐 남산 회현자락(아동광장, 백범광장, 중앙광장) 한양도성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한양도성 축조 초기인 조선시대 태조 때에 쌓아 세종, 숙종 이후까지 보수한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94.1m 길이의 옛 성곽 구간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특히 1912년 작성된 지적원도 등에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남산 중앙광장 일대 성곽이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일제가 한양공원 조성과 조선신궁을 짓기 위해 지형을 바꾸고 한양도성을 훼손한 곳이고 해방 이후에는 이 자리에 이승만 동상 건립(1956년)하고 남산 식물원을 개장(1968년)하는 등 개발이 진행된 곳이라서 한양도성은 이미 모두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됐던 곳이었지요. 하지만 땅 밑에서 비교적 양호한 형태의 성곽이 나왔으며 조선시대에 성벽을 지키거나 쌓은 것을 관리하던 관청 이름이 적힌 기와 조각을 비롯해 바닥돌, 분청사기 조각, 왜사기 등 조선초기부터 20세기까지의 다양한 유물도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지하 2.3~3m 지점에서 유구(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자취)를 확인했다. 성곽 바닥부분 1~2단을 이루는 기저부와 성곽의 몸통을 이루는 체성부는 대략 지표면 아래 3m 깊이에 있었다. 성벽은 4~5단부터 6~7단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남산 한양도성, 100년만에 땅속에서 모습 드러내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612328.html
서울시는 이곳 남산 회현자락에 2018년 한양도성 현장유적박물관을 조성하기 위해 국제설계공모를 실시하였습니다. 2018년에 정비된 모습, 기대됩니다.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 현장유적박물관 설계공모내용과 당선작입니다.
http://project.seoul.go.kr/view/viewDetailCptt.do?cpttMstSeq=164
우리 일행은 백범광장을 지나 숭례문쪽으로 내려갔는데요.성곽이 없어진 자리에는 바닥에 돌을 박아 사라진 성벽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남산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시절에 복원했다고 하는데요, 근본없이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남쪽 대문인 숭례문에 도착했습니다.
매일밤 인정(10시 무렵)에 문을 닫고, 다음날 아침 파루(4시 무렵)에 문을 열었습니다.
바닥에는 한양지도인 수선전도를 단순화 지도가 그려져 있었어요.
이로써 4시간 30분에 걸친 도성 구간탐방이 끝이 났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든 생각은 땅에는 역사가 새겨진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킨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터위에 궁궐의 건물을 부숴서 만든 자재들로 서 있는 신라호텔. 조선시대의 모습과, 일제시대의 모습, 광복 이후의 모습, 냉전, 분단의 현실이 다 섞여 있는 상태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책의 저자인 전우용씨는 "공간"과 "장소"라는 말을 썼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를 알면 "공간"은 "장소"가 된다고 했어요. 전부터 한양도성의 모습에 마음이 매우 끌렸지만 이렇게까지 자세히 서울을 살펴보지는 못했습니다. 4시간 30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단순한 공간으로 느껴지던 서울이 사람들이 살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이 벌어지던,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서 느껴지게 된 순간 이었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나니 최근에 아이 덕분에 읽게 된 <할머니 주름살이 좋아요>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어딘가 슬프고 걱정스러워 보이는 할머니에게 아이가 주름살이 걱정되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주름살때문에 그렇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그안에는 자신의 소중한 기억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할머니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아이는 주름살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할머니의 추억을 살펴봅니다.
오늘 살펴본 광희문에서 숭례문까지의 구간의 성벽, 집, 도로 등은 우리가 살아온 이땅의 주름살이겠지요?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행복할 수만은 없지만, 그 주름을 살펴보며 이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려면 무엇을 잊지말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성분밖 10리지역인 서대문 지역, 그리고 가장 큰 국립여관인 홍제원에서 의주로 가는 길, 철종의 후예가 살았다는 논골기슭에 살고 있는 저는 앞으로도 그 차체가 거대한 박물관인 서울의 모습을 더 깊숙히 알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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