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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공부(엄기호.2018.2.3) 토론

by 책이랑 2018. 1. 31.

사회구조와 변화는 일상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
저자: 엄기호
"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의 페다고지를 만드는 것을 삶의 화두로 삼고 있다.

페다고지 Paida(어린이) + Agogos(지도하다.이끌다) = 어린이를 가르치는 기술과 과학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재능과 소질을 이끌어서 개발케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회구조와 변화는 일상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

공부 공부 - 10점
엄기호 지음/따비



  • 대학 진학을 위한 시험공부
  • 누구에게는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계발


자기 착취


‘공부의 전환’이 필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이유
자기를 배려하고 돌보는 공부

 ‘연속성’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의 성장과 공부를 연결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갱신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삶이 연속적으로 진행될 때, 그것은 성장하는 삶

책을 내며 4
들어가며 설령 천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10

01 공부할 이유가 사라지다
1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28

신분 상승, 공부의 목적/ 예측 가능성, 사회의 약속

/ 공부하는 몸이 만들어지다

/ 두 가지의 공부와 몸의 문제

/ 변별력, 신분 상승 시대의 공부


어날 때부터 소비자인 아이들은 교육에 대해서도 ‘소비자적 마인드’로 접근하며, 자신의 학습 노력 자체도 소비로 보게 되고, 교사의 교육법이나 학교가 운영되는 모든 방식을 상품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실 이렇게 일본의 공교육이 타락(?)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생활이 빈곤하고 가난할 때는 공교육이 기능한다. 즉 가난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지 않으면 사회가 위험하다는 위기의식을 가질 때 오히려 공교육이 잘 작동했다. 일본은 패전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동체 전체가 어떻게 함께 잘살 수 있는가를 이야기했다. (그것이 언제 무너졌는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이 부유해지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부터 서서히 공교육은 위기를 맞게 됐다. ‘우리’가 잘 산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른들은 ‘공동체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육성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아이들을 길러낸다”는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151727042&code=960202#csidx3e0398f4c6b8282adb0923e108f22e0 

/ 신분 상승과 반학교 문화

과거의 권위주의적 학교 시스템은 사회가 요구한 것이다. 100명의 학생이 있다면, 그들 모두가 시민적인 성숙을 이루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학교에 공공성이나 시민적인 성숙을 요구하지 않고 있다.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레벨이 높은 사람을 길러 내려 골몰하는 게 오늘날의 학교다. 1번부터 100등까지 등급을 매긴다. 1등 한 아이에게는 최대한 모든 자원을 나눠주고, 100등 한 아이에게는 벌은 준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교육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2 자아실현과 탈학교 문화 58
책임에서 욕망으로

/ 소비자본주의와 청소년의 등장

3)소비자유의 독재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는 데 있어 직면하는 어려움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보다 많은 소비주의 상품을 취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우리가 함께 몸담은 시민 사회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위험을 감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오직 개인의 부와 명성만을 얻고자 하는 극단적인 물질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 나의 정체성은 '타인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

자유는 곧 소비권리라는 등식을 넘어서야만 새로운 글로벌 사회에 대한 구상을 시작할 수 있다. (p.277-278)



/ 학교 바깥이 세계인 탈학교 문화

/ 교실 붕괴와 학교 폭력

/ 꿈이 억압이 되다

3 교육 불가능과 즐거운 학교 82
중산층과 기획의 대상이 된 교육

/ 성과사회의 주체가 된 ‘공부하는 학생’들

/ 또래집단의 식민화

/ 성과를 내지 못하는 ‘불안한 학생’들

/ 무기력한, 하지만 행복한 학생들 그리고

■ 일반적으로 부유층 가정의 아이들이 빈곤층 가정의 아이들보다 학력이 높게 나온다. 그 이유에 대해 보통 부유한 가정이 자녀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보다 더 내밀한 이유가 있다. 바로 부유층 자녀들은 높은 학력을 딸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이익을 회수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지만, 빈곤층 자녀들은 학력의 효용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학력의 차이'가 아니라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가 있다. '노력의 차이'가 아니라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이다. '학력의 차이'는 간단하며 계량이 가능하지만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는 '공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취급하기 곤란하다. '목표하는 바를 위해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것을 온 가족이 믿고 있고, 실제로 그 노력의 성과를 향유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공부해도 소용없다'고 공언하고 지금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원인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을 비교하면,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91쪽-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리스크 사회에서 노력과 성과 간의 상관관계가 붕괴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상관관계는 전 사회적으로 균일하게 붕괴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으며, 어느 한 계층에서 집중적으로 붕괴되고 있다. 즉, 리스크 사회에서 리스크는 모든 사회 성원에게 균등하게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계층별로 리스크의 강도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노력과 성과가 상관하지 않는 리스크 사회에고, 그렇기 때문에 `노력해 봤자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는 사람들은 가장 많은 리스크를 떠안고 있는 계층인 것이다.


■ 소비자 마인드는 등가교환을 희망하고, 등가교환은 무시간 모델이기 때문에 고등교육의 장에서도 아이들은 '공부'할 동기가 사라진다. '시간'을 배제한 곳에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는 실러버스syllabus라는 게 있다. 예전의 수업개요나 학습요강 같은 것으로, 이를 더 구체화한 것이다. (중략) 

나는 이것이 고등교육 자살의 한 징후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미리 알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해서는 배움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움이란 자기가 배운 것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주체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공부를 끝낼 시점이 되어야 비로소 무엇을 배웠는지를 이해하는 수준에 도달한다. 공부는 이런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전과 후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으면 공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152

`소비주체로서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어놓는 정신적인 경험이 필요함



■ 음악을 듣고 나서 리듬과 멜로디를 음미할 수 있는 것은 `이제 들리지 않게 된 악음`이 아직 남아 있고, `아직 들리지 않는 악음`의 예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들려오는 악음만으로는 음악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음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음이 이미 예감으로 들립니다.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 중에 있을 때만 음악은 음악이 됩니다. 그러므로 음악을 듣는 것은 `배움`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 ...,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시간의 역동 속에서 행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4) - XJ

산다는 것은 이른바 하나의 곡을 일생 동안 연주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한 갖가지 행동과 말의 진짜 의미는 그 곡을 마지막까지 듣지 않으면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개관사정...`, 즉 관뚜껑을 덮은 후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죽은 후에 비로소 그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모든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의 하나로 `음악`을 들었던 이유는 `시간 의식을 갖기`, `인간은 시간 속의 존재라는 것을 알기`가 지성의 기초라는 것을 고대의 성현은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205) - XJ

하지만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익히는 최고의 자질은 바로 이런 힘이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자질을 향상시키는 능력. 교육의 목표는 이 능력을 습득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육의 `입구`에서도 `출구`에서도 시장원리가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그 때문에 아이들도, 졸업생을 맞이하는 사회도 배움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배움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은 노동의 의미도 모른다. (191) - XJ

■ ‘언어 교육, 진로 교육, 영성 교육’ 등을 통해 ‘솔루션’으로서의 교육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한다.




02 자기계발의 공부에서 자기 배려의 공부로
4 폐기나 보완이 아니라 전환이 필요한 이유 112

공부와 시간 주권

/ 성공, 자아실현의 실체

/ 노오력과 무한한 잠재력

/ 자아실현에서 자기 배려로의 전환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려면 ˝나는 누가 뭐라 해도 하나밖에 없는 존재다˝라고 선언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의 역할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라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었을 때 비로소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자기 찾기`라는 행위를 하고자 한다면 `나 자신을 포함한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를 가지고, 그 속에서 나는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출처: http://booksreview.tistory.com/468 [책이랑]

5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 136
한계, 극복에서 다룸으로

/ 전문가, 자기 한계를 아는 자

반면, “숨의 길이를 안다.”라는 말은 비교와 극복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내가 ‘모르던 나’를 ‘알았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숨의 길이를 모른 채 물속에 뛰어들었다면, 내가 자신을 잘 몰라서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숨의 길이를 알면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남과의 비교가 중요하지 않다. 내 안에서, 자신에 관한 모름에서 앎으로 이동한 데 초점이 맞춰진다. 아는 것이 나를 살리고 돌보게 한다. 여기서는 앎이 곧 실천이다. 알아야만 비로소 나를 보호할 수 있다. 한계를 아는 것은 자기를 살리는 실천이기 때문에 기쁜 일이다.

pp.139-140


▲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철학자인 우치다 타츠루의 '힘빼기' 인생론.

저자는 '어깨에 힘을 빼면 삶이 유연해진다'며 성장과 비교에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의를 돌려 몸의 소리를 들어보자고 제안한다.

성장하고자 지나치게 애쓰는 나머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이기주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길 권하며 '무리하지 말라', '애쓰지 말라'는 인생론을 설파한다.

힘만 조금 뺐을 뿐인데 - 10점
우치다 타츠루 지음, 전화윤 옮김/오아시스

 19
지칠 때 솔직하게 “아, 너무 힘들다”라고 말하고 적절히 넘길 줄 아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태도입니다. 지친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겹다는 것은 활동적이라는 증명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위의 자신’에 도취되어 있으면 몸과 마음이 비명을 지를 만큼 아파도 좀처럼 쉬지 못합니다. 지쳐서 멈춰 서기라도 하면 나약한 자신을 탓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도, 정신에도, 가혹한 일입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소중히 아껴야 합니다.
 31
세상이 말하는 ‘중년의 꼰대’는 바로 ‘견디는’ 자세가 극적으로 인격화된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회사에서 상사의 욕설을 견디고, 부하의 막말을 참고, 클라이언트의 안하무인도 참고, 만원 전철을 타야 하는 장거리 출퇴근을 참고, 무뚝뚝한 아내의 얼굴을 참고, 아이들의 침묵이 주는 경멸을 참고, 거액의 대출금을 참고, 닳아버린 양복 팔꿈치를 참고, 치질의 고통을 참고……. 이렇게 온몸이 인내로 둘러싸인 이들이 ‘중년의 꼰대’라는 존재입니다. ‘불쾌함을 견디는 나’를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그때부터 ‘꼰대가 되는 길’은 탄탄대로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쾌한 인간관계만을 계속 선택하게 됩니다.
 112
자신이 공간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비교적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공부’를 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나를 위치시키는 것, 그것을 ‘역사적 시각’이라고 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이후 이것은 ‘사고’의 기본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나는 ‘매핑mapping’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매핑’이란 ‘내가 지도상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특정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도 속 어디에 있는가는 ‘지금ㆍ여기ㆍ나’를 중심으로 삼는 한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도를 본다’는 것은 일단 ‘지금 · 여기 · 나’ 를 괄호 안에 넣고 그곳으로부터 멀어진다고 상상하면서 상공에 임시로 설치해둔 ‘새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이니까요.
 142
신체는 자신의 의사에 따라서 자유롭게 조작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닙니다. 자율신경이 통제하고 있는 내장뿐만 아니라 사지와 골격, 근육 모두 각각의 방법으로 독특하게 자율적입니다. 자고 있을 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신체의 이곳저곳을 뻗거나 굽히거나 구부리거나 하는 것은 신체가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움직임입니다. 신체는 본래 스스로 ‘바람직한 상태’를 추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짓밟고 휘어지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영악한 지혜입니다. 따라서 신체가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힘에 몸을 맡기고 몸이 가장 움직이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모드를 전환하면 몸을 완전히 다르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신체를 주의 깊게 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 충분한 시간, 한계에 도달해보는 유일한 길

/ 자기 배려를 위한 관점의 전환

6 자기를 배려하는 법 164
내가 배려해야 하는 나는 ‘무엇’인가

나에게 속한 것 

①소유 -활용

②육체 - 한계를 넘어서지 않게 활용

③지위나 정체성


④욕망 - 다스림

/ ⑤이름, 나와 나에게 속한 것의 경계
-관계망(뿌리+족보 포함) - 돌보아야 할 대상

/ 배려의 대상인 나, 모른다

나를 돌본다는 것은 나의 영혼을 돌본다는 것(p.177)
자기배려의 출발점은 자기자신을 모른다는 데서 출발(p.178)
자아실현과 자기 배려는 반대입장:
        자아실현은 자기를 안다는데서 출발, 자기 배려는 자기를 모른다는데서 출발
        자아는 실현의 대상이 아닌 발견의 대상(p.180)

           

/ 자기 배려, 자기와의 만남

/ 오직 물을 뿐, 자기를 안다는 것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신이 배우면서 어떤 기술과 방식을 사용하는지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p.184)
스승은 제자의 배우는 방법에 맞는 화두를 줘서 배움을 촉진함
공부란 바로 태도임
저자인 나는 "오직 물을 뿐"일 때 내자신이 가장 잘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됨
체험의 과잉, 겪음의 빈곤을 겪는 사람도 있슴
(p.188)

스승의 필요성: 
“배움을 통해 배우는 자를 성숙시키는 것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적 콘텐츠가 아니라, ‘나에게 스승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내 외부에 나를 훨씬 초월한 지적 경위가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지적 한계를 넘어섭니다. 배움은 바로 이 돌파를 의미합니다. 돌파는 자신이 설정한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한계는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것처럼 나의 외부에 있어서 나의 자유와 잠재적 가능성의 발현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책 ‘교사를 춤추게 하라’, 우치다 타츠루 저)

수행자의 중간현상의 경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대인관계는 스승과의 만남이다.

스승은 수행자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화두를 통해 연결시켜주는 일차적인 통로이므로,

제자의 지속적인 중간현상의 경험은 스승과 관계를 맺는 입실을 통해서 강화된다.

스승과 함께 중간영역을 경험하는 것은 곧 제자가 화두수행으로 내적 변화과정을 거쳐

외적 일상세계로 복귀하는 것과 궤를 일치한다.

 

만약간화선의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일정한 화두 또는 스승의 활작략 없이 그냥 일상생활 속에서 깨닫고자 한다면,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없이 인격 형성을 하는 것과 같다.

스승은 수행자가 창조적으로 전개 발달해 가는 화두수행의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들을 걸러주고 버리도록 한다.

그러다가 수행자가 가장 명료한 답을 발견했을 때 스승은 이심전심으로 그것이 드러나도록 촉발시킨다.

그러므로 제자의 수행과정에서 스승은 매우 필요한 요소이며,

특히 결정적인 시기에는 충분히 좋은 스승의 돌봄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스승이란 영리함이나 지적 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가 성공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잘 돌 볼 수 있는 헌신에 달려 있다.

좋은 스승의 과제는 제자에게 비우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스승의 역할에 대하여 전적으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제지간의 관계는 입실을 중심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며,

그 입실과정을 통하여 제자는 마치 유아가 끊임없이 엄마의 젖무덤으로부터 모유를 공급받듯이

지속적인 수행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으며궁극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은 스스로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간화선은 지속적인 스승의 가르침 아래에서

충분한 기연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꽃망울 터지듯 깨달음에 이르는 것임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은, 스승이 그의 스승에게 율법을 배웠을 때의 ‘배움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근접발달영역은 잠재력

심리학자 Vygotsky

스승 없이 깨달음도 어렵다 
불교의 모든 믿음은 스승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경전을 배우는 것도 스승의 가르침 없이는 알기 어렵다. 경전의 내용들이 모두 성인의 진실된 만남이고 논전 역시 역대 스승들께서 수행해서 얻은 법을 제자들을 위하여 설명해놓은 것들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세속의 욕망과 무명으로 어두워져 있는 안목으로는 알기 어렵다. 따라서 스승께서 조목조목 잘 분별해 주어야만이 잘못 보지 않아 삿되게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여 자기 업대로만 보고 업식을 더욱 키우게 될 뿐이다. 계율 역시 스승의 행을 보고 따르고 또한 율장을 스승에게 배우면서 부처님과 같은 원행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계율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잘못을 하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되어 자기 업식만 키워나갈 뿐이다. 선 수행 역시 화두간택이나 점검, 인가까지 스승 없이는 할 수 없는 공부이다. 그래서 좋은 스승 만나기와 바른 법 만나기를 발원해야 하는 것이다. 
스승 없이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스승의 중요성은 재삼 강조해도 넘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스승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연후에 “스승 없이 공부하는 사람은 나 하나로 끝내야 한다.”라고 하며 스승 없이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강조하셨다. 멀리로는 부처님과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 근래로는 나를 가르쳐주신 모든 스승들에 의해서 나의 공부가 진행되고 있다는 감사의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위대한 과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 종교가 돼야 한다. 그동안 종교는 자연세계를 부정해 왔다. 모두 절대자가 만든 것이라고만 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의 종교는 자연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둬야 한다. 자연세계와 영적인 부분의 통합이야말로 진정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야말로 이런 내 생각과 부합한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상응하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 

서양의 물질문명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선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서 찾고자 했다. 믿음만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에 실망한 그들에게 불교는 여러모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인간 내면을 합리적으로 탐구할 것을 강조한 불교는 과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의 기호에도 잘 맞았다. 이렇게 선불교에서 시작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은 힌두이즘의 적극적 수용으로 이어졌다.

구루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을 전달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식은 ‘영적인 자기완성에 필요한 앎’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구루는 영적인 지혜를 전해줌으로써 개인의 영적 완성을 이끌어주는, 동양 출신의 종교적 스승을 의미

당시 미국인들은 성적 욕망을 위시해 인간의 욕구 전체를 부정하는 기독교 교리에 깊이 실망하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닌 오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체득을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로 설정한다. 믿음이 아닌 개인의 체험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목표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수행을 통해 체험을 통해 검증할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추론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았다. 

/ 공부, 자기를 다스리며 배려하는 과정

그러나 자기를 만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옆으로 제쳐놓고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는 것과 공부를 잘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에 넋을 놓는다. 자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남에게 넋을 놓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나쳐 자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넋을 놓는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자기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식과의 관계도 망친다. 자기 자신이 성장해야 하는 문제를 자식의 공부 문제로 돌려버린다. p.191

타자의 삼대마왕

1. 내가 사랑하는 사람
2. 내가 가르치는 사람
1+2= 자식
3. 내 마음
(p.192)


재능의 문제를 기예의 문제로 전환하고
다른사람의 문제를 내문제로 전환 하는 것

문제를 배움으로 전환해야 배울 수 있다.(p193)



03 공부, 재미에서 기쁨으로
7 공부, 성장의 기쁨 196

/성장의 기쁨, 연속성

* 연속성을 지녔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후대들에게 전승될 수 있음을 뜻한다
(저자의 책 단속사회 중에서)
서사에 대한 감각이 생겨서 자기 삶을 의도적으로 살 수 있슴

/ 지적 쾌감, 관계를 파악하고 연결하는 힘
생각의 핵심은 연관 짓기
지적인 활동이란 원인과 결과, 자기 행동과 영향의 연속성을 만드는 것

공부하는 곳에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환대가 있어야 함
학생들에게는 다음의 세가지가 주어져야 함(p.209)
1.일자리-역할
2.의지처,관계 
- 뻗을 자리
3.거주할 수 있는 누울 자리
현재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1,2번을 주고 있지 않음

읽기 능력이 2년이상 떨어지면 교실수업에서서 실질적인 문맹자가 됨(210)<< 학교속의 문맹자들>> 엄훈, 우리교육 2012,29쪽

/ 과자와 성과, 쾌락의 뇌물
수업이 레크레이션으로 전락하는 현상->배움의 내용, 과정을 배우는 사람과 연관짓지 못해 흥미를 유발하는데 실패했기 때문(p.212)

일반고에서 (입시에) 별 성과를 낼 수 없는 성적의 학생들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기획하는 자원을 거의 얻지 못한다”
 “인간관계나 경험이 크게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이들 비진학 청소년이 ‘니트화’할 가능성이 높다”
 ‘무중력 청소년’이란 개념
 자신을 끌어당기는 활동이나 노동환경(‘중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는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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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6252204175&code=940202#csidxe19e7aa96c075a9b07ca234a03767dd 

/ 성장이 불가능한 시대, 재미가 기쁨을 대체하다

배운 것이 현실에 손톱만큼도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할 때 사람은 배우지 않는다.(p.214)

/ 재미에서 기쁨으로의 전환
->지성적인 것에 대한 냉소, 반지성주의 등장

서사성- 근대가 약속했던 연속적이고 성장하는 서사성을 갖춘 삶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

삶이란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무엇이 단절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이라는 깨달음
(노오력의 배신)


8 공부, 자유와 창조의 기쁨 218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기예는 자기가 할수 있는 범위에서 능수능란한 경지에 오르는 것 인듯.

/앎, 선용의 출발
- 개인에게 주어진 것: 육체적 한계, 재능
-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 신분, 재산 : 적극적 요구를 해야 할 항목
- 인간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것- 자연법칙
 자기에게 무엇이 주어져 있고 주어져 있지 않은지를 알아야 함

/ 주어질 수 없는 것과 주어질 수 있는 것

/ 능수능란함, 자유의 다른 이름
- 익힘의 과정에 스승과 동료가 필요함

/ 변용, 창조의 기쁨

/ 다룸, 익힘을 통한 기예
- 법칙을 알고 다룸으로써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존재가 됨
- 생활의 달인이 생각나네요

장인 - 10점
리차드 세넷 지음, 김홍식 옮김/21세기북스


세넷『장인』
일 자체를 위해서 일을 훌륭히 해내려는 욕망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로 파악


창조는 앎의 문제에서 다룸의 문제로 공부의 초점을 이동시킨다.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을 때, 그것도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다룸이 바로 그 사람의 탁월함의 척도가 된다. 탁월함의 척도가 전환되는 것이다. 5장에서 말한 것처럼, 탁월함은 내가 물속에서 숨을 얼마나 오래 참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숨의 길이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교육이 가진 문제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배우는 것은 많은데 다룰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기만 할 뿐 익히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익히는 것이라고는 문제 풀이밖에 없다. 주어진 문제만 풀 줄 알지 그 문제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상투적으로 하는 말도 “여러분 아시겠지요?”다.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이 아니다. 학생들 역시 상투적으로 “예.”라고 대답하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익힘이 없이, 배움에서 그다음 배움으로 넘어가는 것이다.(pp.239-240)

익힘이 없이 배움만 이어지는 상태가 10년이상 지속되다가 익힘의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이 속출(p.241)

–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절반이 틀린 것으로 드러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한다. 하버드대학의 새뮤얼 아브스만(Samuel Arbesman) 박사가 저서 《지식의 반감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실제로 물리학 반감기는 13.07년, 경제학은 9.38년, 수학은 9.17년, 심리학은 7.15년, 역사학은 7.13년, 종교학은 8.76년으로 나타났다.


/ 익힘, 배움의 기술에 관한 배움
익힘의 결과가 아닌
익힘의 과정에 있는 자신에게 집중 해야 함(p.244)


9 공부, 지적 쾌감과 향유의 기쁨 247
경탄, 배움의 출발점


/ 지식의 쾌감: 분별의 힘

/ 앎과 향유

/ 공부를 끔찍한 것으로 경험하다

/ 향유에서 소비로, 공부 구경

/ 공부, 향유의 기예로의 전환

나는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한 것처럼, 배우는 이를 잘 관찰하고 그가 가진 향유의 기예를 발견해 같이 언어화하는 일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 혹은 흔히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아름다움의 향유라는 관점에서 보고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같이 찾아보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배우는 이 스스로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위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의 말을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 협력하는 기예의 아름다움, 윤리적 아름다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언어로 자기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 아니겠는가.(p.270)

나가며 설령 자기를 얻는다 하더라도: 사회를 만드는 기예를 향하여 278
출처 289


지나친 경쟁이 학력의 '하향평준화'를 낳는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사회가 유지되려면,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다양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에서 이런 능력을 키울 수는 없다. 아이들은 심지어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 배움의 장을 만들자'라고 나서는 시민들이 생겨났다. 경쟁을 통해서는 기를 수 없는 능력, 예컨대 더불어 살아가는 힘, 점수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능력 등을 키워주는 학교 본연의 목적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합기도의 목적, '하나의 몸' 만들기" 


프레시안 : 직접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역시 작은 배움의 공동체로 알려져 있다. 한국과 일본 모두 '학교가 몸과 머리, 마음을 균형있게 키우지 못한다. 머리만 강조한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합기도 도장에서 생겨난 '배움의 공동체'에 눈길이 가는 건 그래서다. 도장 이야기가 궁금하다. 


우치다 타츠루 : 자식을 합기도 도장에 보내는 부모들은 흔히 '남에게 이기는 법'을 배우리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합기도의 목적은 그게 아니다. '하나의 몸'을 만드는 게 목적이다. 예컨대 상대방 팔을 잡았을 때 적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이 하나 생겼다고 본다. 머리가 두 개 있고, 팔다리가 네 개인 새로운 몸이 생긴 것이다. 새로운 구조물이 돼 전체적인 균형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어떻게 같이 움직일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게 합기도다. 


무도(武道)의 기본은 발의 포지션을 정하는 것이다. 어디다 발을 놓을 것인지를 안다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도장에 처음 온 사람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 일쑤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위치에 서야 할지 알게 된다. 결국 도장 전체의 밸런스(balance, 균형)가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사람들이 몇 명이 모였느냐에 따라 수련하기 전, 어느 정도 간격으로 앉아야 하는지 직감적으로 안다. 도장이라는 공간에서 자기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를 아는 건 고도의 사회적 능력이다. 얼마나 힘이 센지와는 다른 차원이다. 


"청소 강조하는 이유, 바닥이 깨끗해야 신체 감수성 높아져"


합기도 수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청소다. 도장에 오자마자 청소하고, 끝나면 또 청소한다. 어른이든 아이든 무조건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더러운 도장과 깨끗한 도장에서의 수련은 전혀 다르다. 합기도는 맨발로 수련하는데, 도장이 더러우면 발이 어떻게 되겠는가. 발바닥을 쫙 펴지 못하고 웅크리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된다. 몸의 감수성도 달라진다. 도장이 깨끗하면 몸을 펼치게 돼 신체 감수성의 감도 또한 올라간다.


결국 깨끗한 도장이 유연한 활동을 만든다. 합기도장이 해야 하는 일은 평소 생활에 갇혀 있는 몸을 여는 것이다. 신체 감수성이란 바로 이런 뜻이다. 몸과 마음을 함께 키우는 교육이란, 청소처럼 사소해보이는 일까지 아우르는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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