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캬(samkhya 혹은 sankhya) 이론이란 뜻.
요가(yoga) 한자로는 유가(瑜伽).
요가는 통일의 뜻으로 쓰이는 말로서 가장 넓은 의미로는 마음과 몸의 통일 즉 의근(意根)과 작업근(作業根)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고, 보통은 마음의 통일을 말한다. 그래서 객관(客觀)에 중점을 두면 오감(五感)의 통일이어서 숨을 고르게 하고 의지를 집중시켜서 오감으로 하여금 외계에 붙어버리지 않도록 해서 마음 하나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통일이라고 한다. 주관(主觀)에 중점을 둘 때는 나의 통일이 되는데 나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넓게 볼 때는 오감(五感), 오기(五氣), 의지(意志), 이성(理性), 즉 자아를 만들어 가지고 있는 전부를 가리키게 된다. 그때의 나의 통일(atma-yaga)이란 자아의 통일이다. 그러나 좁게 볼 때의 나는 몸 마음을 차지하는 주되는 중심 나만을 가리잤고 한다. 그때의 나의 통일은 나에 의하여 내근(內根)을 통일한다는 뜻으로 나를 주로 한 통일이 된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것은 이성을 주로 하는 부디 요가(buddhi-yoga), 선정(禪定)에 의한 쟈나 요가(dhyana-yoga), 지식에 의한 즈나나 요가(jnana-yoga), 신념에 의한 박티 요가(bhakti-yoga), 이욕(離欲)을 주로 하는 산야사 요가(sannyasa-yoga), 실수(實修)를 주로 하는 아뱌사 요가(abjuasa-yoga), 이론을 주로 하는 삼캬 요가(samkhya-yoga), 실행을 주로 하는 카르마 요가(karma-yoga)가 된다. 안팎 어디로 보든지 다 마음의 통일 아닌 것 없기 때문에 일반으로 요가라면 마음의 통일로 번역함이 적당하다. 마음의 통일이라는 뜻을 주로 하게 될 때는 마음이 한 방면으로 집중되는 것이므로 경향(傾向), 주의(主義), 신앙(信仰), 교의(敎義) 하는 뜻이 된다. 각 장의 제목에 쓰인 요가는 대개 그런 뜻이다. ① 마음의 통일이 향하는 상태를 주로 할 때는 수행(修行), 수양(修養), 실수(實修), 상유가(常瑜伽) 하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다. 제 5장에서 말하는 요가는 그런 것이다. ② 마음 통일의 방법을 주로 하게 될 때는 행법(行法), 관법(觀法), 상응법(相應法), 유가법(瑜咖法) 하는 말로 할 수 있다. 이것은 ②,④와 서로 통하고 한다. 쓰인 예는 적지만 제 8장 12 같은 것은 여기 속한다. ③ 마음 통일의 결과 즉, 실지(悉地 곧. 成滿位)를 얻은 과상위(果上位)를 또 요가란 말로 표시할 수도 있다. ④제2장, 4장에 그 예가 많다. 마음의 통일로 얻은 힘 즉, 실지(悉地)를 얻은 사람의 현력(現力)을 자재력(自在力), 환력(幻力), 유가력(瑜伽力)이라고 하고도 한다. 제 11장, 18장에 그 예가 있다. ⑤ 그리고 마음 통일을 향하고 있는 사람, 혹은 그것을 이미 얻은 사람을 요기(yogi)라고 하는데 그것을 행자(行者) 혹은 유가행자(瑜伽行者)라고 번역한다. 제6장에 거기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⑥ 마음 통일이 된 사람을 특히 육타(yukta) 혹은 요가 육타(yoga-yukta)라 하고 그 현재 동사를 요감 유지(yogam yuj)라고 해서 ‘마음을 통일한다’ 혹은 ‘요가를 닦는다’ 하는 뜻으로 쓴다. 제 5장, 6장에 가장 많이 쓰인다. ⑦ 전체 18장 700절 중에 요가란 말이 쓰인 것이 157개나 되고 보면 이 책이 스스로를 요가 교전(yoga-sastra)이라고 한 것은 과연 적합한 것을 알 수 있다. — 「세계성전전집」
그릇된 생각으로 인하여 사람은 비(非)를 시(是)로 알게 된다.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아르쥬나는 친족과 친족 아닌 사람을 차별하게 됐다. 이것이 쓸데없는 차별이란 것을 밝히기 위해 크리슈나는 몸(자아 아닌 것)과 아트만(자아)을 구별하고 몸은 항구하지 못하고 여럿인 데 대해 아트만은 항구하고 하나인 것을 알려준다. 힘씀은 사람이 다스려가는 속에 있지 거기서 나오는 결과에 있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해야 할 것은 오직 그 결과에는 관심말고 제 행동의 방향 혹은 의무를 결정하는 데 있다. 집착 없는, 혹은 무사한 정신으로 제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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