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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의 불교 강의

by 책이랑 2018. 12. 9.

What th Budddha Though
by Richard Gombrich


곰브리치의 불교 강의 - 10점
리처드 곰브리치 지음, 송남주 옮김/불광출판사
머리말
배경 지식
제1장 붓다는 왜 위대한 사상가인가
sabbe sankhara anicca
이세상에서 고정불변의 본질을 지닌 것은 없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 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무상(無常) 또는 비상(非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멸(生滅)하며 시간적 지속성이 없음을 말한다. 즉 영원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변천해 가며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마치 꿈이나 환영이나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즉,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매순간마다 생멸 · 변화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항상불변(恒常不變)한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의 실상(實相)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무상관은 단순히 비관적인 덧없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에 대하여 비관하거나 기뻐하는 것 자체가 상이며, 그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인간은 지위나 명예에 집착하는 탐욕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소중한 생명을 방일(放逸)함이 없이 정진노력(精進努力)하려는 정신적인 결의가 생겨나게 되며, 이러한 것이 무상관의 참된 뜻이다.

p.42
5온 
색- 오감을 통한 물리적 세계와의 상호작용

수- 감정
상- 분별작용(대상의 파악에 기여하는 지각작용)
행-samkhara:심적형성 또는 의지작용
  - 말, 생각, 행위의 도덕성에 대한 기준은 의지임 
행동을 씨뿌리면 버릇을 거두고, 버릇을 씨 뿌리면 성격을 거두며, 성격을 씨뿌리면 운명을 거둔다.
불교도의 이생과 후생에 복을 가져오는 것은 정화의 행위일 뿐 
그러나 사실 행위는 정신적인 것이기에 선한 행위는 오히려 마음의 상태를 정화하는 것
도덕성은 지적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047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며,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자신의 지성을 활용해야만 한다.

무아와 업
제2장 업설과 사회적 배경
- 선업은 행위 주체에게 좋은 결과를
악업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상벌은 아님, 그걸 주는 주체가 없기에)
- 미래를 향하여 '나는 어떻게 행옹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만들어 진 것임 057


제3장 브라만교에서 발견되는 업설의 선례
제4장 자이나교에서 발견되는 업설의 선례
제5장 붓다의 ‘무아(No Soul)’는 어떤 의미인가
제6장 붓다의 긍정 가치관, 자비
제7장 증거 문헌의 검토
제8장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붓다 사상에 있어서 불의 중요성
자기 내면의 탐진치의 불이 꺼질 때 지극한 행복을 경험하는 것이다(224)
의식은 존재가 아니라 작용임(237)
의식은 마음과 사유로부터 일어남(237)

제9장 인과율 그리고 비우연적 작용
제10장 인식·언어·열반
제11장 붓다의 실용주의와 지적 성향
제12장 붓다의 풍자, 비유로서의 브라만교 용어들
제13장 이 책은 믿을 만한가
부록
참고 문헌
색인


 45
붓다는 ‘제의’를 뜻하던 브라만교 단어를 가져와, ‘윤리적 의지’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 단순한 조치는 카스트에 기반한 브라만적 윤리를 전복시킨다.

 125
붓다의 위대한 개혁은 윤리적 가치가 외적 요소가 아닌 의지에 따라 판단되도록 만든 것이다.
 133
‘영혼(soul)’이라는 단어의 용법 자체가 그러한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기에, 불교의 무아 개념을 ‘무영혼(no soul)’으로 번역할 경우 아무리 잘해봤자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 불교에는 업이라는 강력한 연속의 법칙이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이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 ‘영혼’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혼이라는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인도 불교가 무아의 가르침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무아는 사실상 불교를 대표하는 표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하에, 영어권에서 항상 사용되어온 ‘무영혼(no soul)’보다 무아를 더 잘 전달할 표현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199
빨리어 사본에 따라 붓다가 특정 설법을 펼친 장소가 여러 곳으로 등장하는 일이 빈번했다. 나는 그 차이점을 해석하려면 또 다른 빨리어 사본을 대조해야만 했다. 놀라웠던 점은 어떤 빨리어 표현이 모호하게 보이는 경우, 한역본은 이를 생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242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베다 전통에서 의식과 그 대상은 불에 빗대어 사유되었다. 붓다는 『갈애 멸진의 긴 경』에서 동일한 사유를 활용하지만 좀 더 분석적이다. 붓다는 의식이 연료로 삼을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욕망적’ 작용이라는 점에서 불과 비슷하다고 본다.

 



 353
브라만교 최상의 창조신인 브라흐마는 붓다의 마음을 읽고 깜짝 놀란다. 브라흐마는 붓다 앞에 나타나 무릎 꿇고는, 이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며 설법의 간청을 세 번 반복한다. 브라흐마는 붓다의 동의를 얻자 그제야 자신의 천국으로 돌아간다. … 불교의 우월성을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붓다는 대단히 지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었다. 붓다는 설령 스승이라도 부적절한 발언을 하거나 잘못된 내용을 말했을 때, 제자들은 그것을 바로잡을 의무를 진다는 규칙마저 세웠을 정도였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이러한 붓다 사유의 근간에는 모든 개인이 각자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있다. 스승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자신을 일깨울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고대 인도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던 브라만교 입장에서 보면 매우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상이었다.

붓다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신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가르쳤을 뿐, 장대한 이론체계를 만들거나 고매한 이상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번잡한 이론과 신비로움으로 치장된 브라만교의 용어를 적극 차용하여 일반화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붓다는 자신의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상대방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그것이 가장 상대방을 설득하기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단어로 업(karma)과 법(dharma)이 있다.

붓다는 브라만교에서 ‘제의를 거행하는 성스러운 작업’을 뜻하던 업(karma)의 의미를 일반인의 행동 범주 안에 포함시켰다. 다시 말해 브라만교만의 종교적 의미였던 ‘업’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한 ‘행위’라는 보편적 의미로 재해석한 것이다. 이점이 붓다 사유의 독창성이며, 이것은 후에 ‘방편(方便)’이라고 불리는 붓다만의 독특한 설법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방편은 비유와 반어법을 풍부하게 사용한 설법 방식이다. 하지만 방편과 브라만교 교리의 차용은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사상을 오해하게끔 만들었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는 데 주력한다. 그래야만 붓다의 진정한 사유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의 초기경전과 브라만교의 베다 성전을 비교 분석하여 오해를 밝히고, 진정한 붓다의 생각은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곰브리치는 업설(業說)이야말로 붓다 세계관 입문에 가장 좋은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업은 붓다가 삶을 조망하는 근본 사상일 뿐만 아니라 기본 교리들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업을 기본으로, 다양한 불교 용어의 사례를 짚으며 붓다 사유의 근원을 알려주는 이 책은 지금까지 접하지 못한 새로운 붓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불교보다 ‘붓다’를 알고 싶은 독자들은 우선순위로 필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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