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는 저술 활동 초기인 1837년의 한 일기에서 이미 소음이 사유를 돕는다는 말을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장 창의적이 되는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혼란과 소음에 맞설 때다. 그렇게 적당한 환경을 찾지 못할 경우, 내 사유는 막연한 사념을 붙잡아보려는 피로한 노력 끝에 죽음을 맞는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지난 후의 한 일기에서는 길거리에서 그런 소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정신에 긴장이 심한 나 같은 사람은 이완이 필요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완에 도움이 된다. 몇몇 사람과 따로 만나는 일은 이완에는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20 주위가 소란스러울 때 생각이 잘 되고, 주변이 조용할 때보다는 주변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쓸 때 집중이 더 잘 된다고 키르케고르는 주장한다. 어느 일기에서는 도시생활의 시끌 벅적함이 실은 즐겁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거리의 악사가 손 .
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멋지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p.49
주체의 실종
후설의 1931년 논문 「살아 있는 현재의 세계와 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주변세계(Die Welt der lebendigen Gegenwart und die Konstitution der ausserleiblichen Umwelt)」는 보행을 중요한 경험, 곧 우리가우리 몸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우리 몸은 늘 여기에 있음의 경험이다. 움직이는 몸은,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여러 ‘거기들‘을 통로로 삼거나 목적지로 삼는 ‘여기‘ 라는 지속성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은 몸이고 변화하는 것은 세계라는 것, 이것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세계의 유동성 속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와 자아를 이해하고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이렇듯 후설의 논의는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물으면서 감각과 지각 대신 보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험 이론들과는 구분된다. pp. 53-54
카브레라의 명패와 십자가(민예풍 그리스도 조각상이 붙어 있는, 키 큰 사람만 한 길이의 울릉불퉁한 나무 십자가)가 보여주듯이, 순례는 고행이다. 다시 말해 순례는 고생을 통해서 축복에 이르는 영혼의 경제활동이다. 축복이 고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고행이 사람을 축복에 값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명확히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정리가 필요한 문제도 아니다. 순례를 그야말로 영혼의 여행으로 여기는 관행은 거의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 금욕과 고행을 영혼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시각 또한 거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p.84
그로부터 10년 이상 지난 후의 한 일기에서는 길거리에서 그런 소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정신에 긴장이 심한 나 같은 사람은 이완이 필요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완에 도움이 된다. 몇몇 사람과 따로 만나는 일은 이완에는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20 주위가 소란스러울 때 생각이 잘 되고, 주변이 조용할 때보다는 주변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쓸 때 집중이 더 잘 된다고 키르케고르는 주장한다. 어느 일기에서는 도시생활의 시끌 벅적함이 실은 즐겁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거리의 악사가 손 .
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멋지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p.49
주체의 실종
후설의 1931년 논문 「살아 있는 현재의 세계와 몸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주변세계(Die Welt der lebendigen Gegenwart und die Konstitution der ausserleiblichen Umwelt)」는 보행을 중요한 경험, 곧 우리가우리 몸을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우리 몸은 늘 여기에 있음의 경험이다. 움직이는 몸은,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하나의 통일체로, 여러 ‘거기들‘을 통로로 삼거나 목적지로 삼는 ‘여기‘ 라는 지속성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은 몸이고 변화하는 것은 세계라는 것, 이것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그렇다면 여행은 세계의 유동성 속에서 자아의 연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세계와 자아를 이해하고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이렇듯 후설의 논의는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물으면서 감각과 지각 대신 보행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험 이론들과는 구분된다. pp. 53-54
카브레라의 명패와 십자가(민예풍 그리스도 조각상이 붙어 있는, 키 큰 사람만 한 길이의 울릉불퉁한 나무 십자가)가 보여주듯이, 순례는 고행이다. 다시 말해 순례는 고생을 통해서 축복에 이르는 영혼의 경제활동이다. 축복이 고행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고행이 사람을 축복에 값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명확히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정리가 필요한 문제도 아니다. 순례를 그야말로 영혼의 여행으로 여기는 관행은 거의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 금욕과 고행을 영혼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시각 또한 거의 모든 문화권에 존재한다.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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