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논어>를 왜 읽는가? 고전을 왜 읽는가?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 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2)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3)누구의 어떤 침묵이란 말인가
로크가 그런 관행에 대해 철저히 “침묵”함을 통해 그 관행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로크의 침묵을 이해하려면, 로크의 해당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당대의 언어적 콘텍스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그들은 기존의 관행과 권위에 정면으로 대결해봐야 소기의 성과도 거두기 어렵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크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대체로 관행을 따르면서, 그 안에서 관행을 비틀어야, 자신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민감한 부분에서 침묵하거나, 생략하거나, 관행을 비트는 방식으로 에둘러 자신이 가진 이견을 표출한다.
...
이처럼 관행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신, 관행을 비틀거나 전용하거나 침묵하거나 생략하는 행위에 동반되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해당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일견 단순한 침묵이나 생략으로 보이는 것들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간파할 수 있다.
....
누구의 해석이 옳든,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의 저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텍스트가 저자의 입과 손을 떠나 공적인 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의미는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침묵이 다른 것에 대한 발화로 해석되기도 하고, 다른 것에 대한 발화가 어떤 것에 대한 침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모순과 함께 걸었다
④ 모순적인 어법
인간의 근본 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내부에 화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열망이 공존할 수도 있다. 영화 <애니홀>에서 주인공 앨비 싱어는 불평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고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장수하려고 든다고. 그런 것은 마치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추가 주문을 하는 일과 같다고. 실로 그렇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인생이 고통의 무한리필이라면, 리필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장수를 원한다. 고해라는 인생의 술잔을 한 잔 더.
<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그러한 모순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는 이상적인 질서가 구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분투했다. <논어> 미자(微子) 편은 말한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공자도) 이미 알고 있다.”(道之不行已知之矣) 이것은 공자를 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비합리적인 행동은,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이는 꿈꾸지 못할 영웅적인 광채를 공자에게 부여한다.
5)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공동체란 일종의 해석공동체다
커뮤니케이션이 거칠어진 나머지
구호와 폭력만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를 수 없으며
곧 정치적 타락의 지표가 된다.
....
그러나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피하며 핵심적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정치공동체란 일종의 해석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원들을 이어주는 유대가 약하면 약할수록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동원되는 언성은 높아지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폭력과 과장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소통과 해석을 가능케 하는 바탕을 공유하고 유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소통과 해석의 질은 곧 정치의 질이기도 하다. 커뮤니케이션이 거칠어진 나머지, 구호와 폭력만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곧 정치적 타락의 지표가 된다. 그것은 공자가 개탄했던 당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논어> 속의 공자는 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다.
6)<논어>에는 행정의 필요를 인정하는 발언은 있어도 명시적으로 관료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찾기는 어렵다. <논어> 주석사의 큰 아이러니는, 바로 행동의 침묵을 설파한 <논어>의 구절이 관료제의 적극적인 운용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어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오규 소라이(荻生?徠)는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덕 있는 이들을 등용했기에 수고롭지 않게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秉政而用有德之人, 不勞而治) 그리고 다산 정약용 역시 얼핏 무위처럼 보이는 통치는 그 일을 대신 잘해줄 수 있는 관료를 기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해석했다. “순임금이 22인을 얻어 그들에게 각각 직책을 맡겨 천하가 이로써 잘 다스려졌다. … 그리하여 국가는 인재를 얻지 않을 수 없음을 극진히 말하였다.”(舜得二十二人, 各授以職, 天下以治 … 所以極言人國之不可不得人) 이 아이러니는 공자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와 후대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바람직한 정치공동체의 모습이 달랐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후대 주석가들의 이러한 해석들은 공자가 꿈꾸었던 국가보다는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국가의 모습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7)공맹자도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한 거다. 사람들은 신에게 뭔가 얻기 위해 기도하고 전례를 행하지만, 거기에 응답할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예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고. 예를 통해서 신에게 뭔가 얻어낼 수는 없지만, 예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라고. 이런 취지로 공자의 가르침을 해석한 것은 그 옛날의 묵자나 혹은 묵자가 묘사하고 있는 공맹자뿐이 아니다. 일본 동양학 연구의 산실인 동양문고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식민사학자로 알려진 동경대학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 역시 <국체(國體)와 유교(儒敎)>라는 저서에서, 종교성의 결여야말로 중국을 설명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취지에서 시라토리는 <논어>는 신의 부재와 아울러 인간관계를 강조한 저작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보기에, 신이 없다는 것은 충성을 바칠 대상이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한 중국 사회는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게 마련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8)인류사에 큰 자취를 남긴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황무지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존재들이 아니다. 사상가를 혜성처럼 나타난 성인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악의 근원처럼 간주하다 보면, 자칫 사상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에 눈감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
그리하여 해외로 유학을 나와 보니, 학자들이 사상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들 상당수는 과거의 사상가들을 경천동지의 혜안을 가진 고독한 천재나 지성으로 사모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열정적으로 전개된 세계 학계의 사상사 연구 흐름은 천재적이고 뛰어난 사상가로 알려져 있던 과거의 사상가들이 황무지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가능하게 한 당대의 지적 담론의 소산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명성을 영속시킨 힘도 단순히 그들의 천재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후 전개된 여러 역사적인 맥락 때문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인류의 정신을 새롭게 열어젖힌 천재로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나 존 로크도 그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11)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⑪ 실증과 재현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하는 게 공자의 목적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명이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공자를 대뇌 망상가라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12)
⑫ 모사와 재현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모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
영정사진이 망자의 검버섯 하나하나를 얼마나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진정으로 탁월한 대의정치는 인기투표에 의존하는 정치와는 구별된다. 뛰어난 대의 정치인은 민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람들이 미처 정의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못한 일까지 탐구하고 정책으로 번역해낸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그저 모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13) 동정과는 다른, ‘복잡한 현실’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 사랑
[한겨레] [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⑬ <논어>와 사랑(仁)
그렇다면 <논어>를 왜 읽는가? 고전을 왜 읽는가?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 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2)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3)누구의 어떤 침묵이란 말인가
로크가 그런 관행에 대해 철저히 “침묵”함을 통해 그 관행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로크의 침묵을 이해하려면, 로크의 해당 저작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당대의 언어적 콘텍스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
그들은 기존의 관행과 권위에 정면으로 대결해봐야 소기의 성과도 거두기 어렵고,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가 크다고 판단한다. 오히려 대체로 관행을 따르면서, 그 안에서 관행을 비틀어야, 자신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권위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민감한 부분에서 침묵하거나, 생략하거나, 관행을 비트는 방식으로 에둘러 자신이 가진 이견을 표출한다.
...
이처럼 관행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신, 관행을 비틀거나 전용하거나 침묵하거나 생략하는 행위에 동반되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해당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일견 단순한 침묵이나 생략으로 보이는 것들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간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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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해석이 옳든, 텍스트의 의미는 그 텍스트의 저자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텍스트가 저자의 입과 손을 떠나 공적인 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의미는 정치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저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침묵이 다른 것에 대한 발화로 해석되기도 하고, 다른 것에 대한 발화가 어떤 것에 대한 침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모순과 함께 걸었다
④ 모순적인 어법
인간의 근본 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내부에 화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열망이 공존할 수도 있다. 영화 <애니홀>에서 주인공 앨비 싱어는 불평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고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장수하려고 든다고. 그런 것은 마치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추가 주문을 하는 일과 같다고. 실로 그렇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인생이 고통의 무한리필이라면, 리필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장수를 원한다. 고해라는 인생의 술잔을 한 잔 더.
<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그러한 모순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는 이상적인 질서가 구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분투했다. <논어> 미자(微子) 편은 말한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공자도) 이미 알고 있다.”(道之不行已知之矣) 이것은 공자를 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비합리적인 행동은,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이는 꿈꾸지 못할 영웅적인 광채를 공자에게 부여한다.
5)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공동체란 일종의 해석공동체다
커뮤니케이션이 거칠어진 나머지
구호와 폭력만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를 수 없으며
곧 정치적 타락의 지표가 된다.
....
그러나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과정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피하며 핵심적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정치공동체란 일종의 해석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성원들을 이어주는 유대가 약하면 약할수록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동원되는 언성은 높아지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폭력과 과장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소통과 해석을 가능케 하는 바탕을 공유하고 유지하는 일이 필요하다. 소통과 해석의 질은 곧 정치의 질이기도 하다. 커뮤니케이션이 거칠어진 나머지, 구호와 폭력만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부를 수 없으며, 곧 정치적 타락의 지표가 된다. 그것은 공자가 개탄했던 당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논어> 속의 공자는 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다.
6)<논어>에는 행정의 필요를 인정하는 발언은 있어도 명시적으로 관료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찾기는 어렵다. <논어> 주석사의 큰 아이러니는, 바로 행동의 침묵을 설파한 <논어>의 구절이 관료제의 적극적인 운용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어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오규 소라이(荻生?徠)는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덕 있는 이들을 등용했기에 수고롭지 않게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秉政而用有德之人, 不勞而治) 그리고 다산 정약용 역시 얼핏 무위처럼 보이는 통치는 그 일을 대신 잘해줄 수 있는 관료를 기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해석했다. “순임금이 22인을 얻어 그들에게 각각 직책을 맡겨 천하가 이로써 잘 다스려졌다. … 그리하여 국가는 인재를 얻지 않을 수 없음을 극진히 말하였다.”(舜得二十二人, 各授以職, 天下以治 … 所以極言人國之不可不得人) 이 아이러니는 공자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와 후대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바람직한 정치공동체의 모습이 달랐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후대 주석가들의 이러한 해석들은 공자가 꿈꾸었던 국가보다는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국가의 모습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7)공맹자도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한 거다. 사람들은 신에게 뭔가 얻기 위해 기도하고 전례를 행하지만, 거기에 응답할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예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고. 예를 통해서 신에게 뭔가 얻어낼 수는 없지만, 예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라고. 이런 취지로 공자의 가르침을 해석한 것은 그 옛날의 묵자나 혹은 묵자가 묘사하고 있는 공맹자뿐이 아니다. 일본 동양학 연구의 산실인 동양문고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식민사학자로 알려진 동경대학 교수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 역시 <국체(國體)와 유교(儒敎)>라는 저서에서, 종교성의 결여야말로 중국을 설명하는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취지에서 시라토리는 <논어>는 신의 부재와 아울러 인간관계를 강조한 저작이라고 해석했다. 그가 보기에, 신이 없다는 것은 충성을 바칠 대상이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한 중국 사회는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게 마련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8)인류사에 큰 자취를 남긴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황무지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존재들이 아니다. 사상가를 혜성처럼 나타난 성인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악의 근원처럼 간주하다 보면, 자칫 사상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에 눈감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
그리하여 해외로 유학을 나와 보니, 학자들이 사상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들 상당수는 과거의 사상가들을 경천동지의 혜안을 가진 고독한 천재나 지성으로 사모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열정적으로 전개된 세계 학계의 사상사 연구 흐름은 천재적이고 뛰어난 사상가로 알려져 있던 과거의 사상가들이 황무지에서 느닷없이 솟아난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가능하게 한 당대의 지적 담론의 소산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명성을 영속시킨 힘도 단순히 그들의 천재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이후 전개된 여러 역사적인 맥락 때문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인류의 정신을 새롭게 열어젖힌 천재로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나 존 로크도 그런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11)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⑪ 실증과 재현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하는 게 공자의 목적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명이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공자를 대뇌 망상가라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12)
⑫ 모사와 재현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모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
영정사진이 망자의 검버섯 하나하나를 얼마나 핍진하게 보여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자에 ‘대하여’ 얼마나 잘 이야기해주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진정으로 탁월한 대의정치는 인기투표에 의존하는 정치와는 구별된다. 뛰어난 대의 정치인은 민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사람들이 미처 정의하지 못하고 구체화되지 못한 일까지 탐구하고 정책으로 번역해낸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그저 모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13) 동정과는 다른, ‘복잡한 현실’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 사랑
[한겨레] [토요판] 김영민의 논어 에세이
⑬ <논어>와 사랑(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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