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공부 가이드_역자 후기

모티머 애들러가 서두에서 일찌감치 경고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제1부와 제2부를 읽는 동안 ‘평생공부 가이드’라는 제목과 사뭇 다른 내용에 적잖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구체적인 공부 지침을 기대한 독자라면 어째서 공부법을 알려주지 않고 과거와 현재의 지식 체계들을 검토하는지 의아해할 공산이 크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저자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68~1771년에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총 세 권으로 처음 출간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아직까지도 백과사전의 대명사로 남아 있다. 17세기 서양에서 알파벳순 백과사전이 처음 등장한 이래 여러 나라에서 여러 언어로 갖가지 백과사전들이 출간되었으나 『브리태니커』에 견줄 만큼 전통과 명성을 쌓아온 백과사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참조되는 백과사전은 『브리태니커』가 아니라 2001년에 서비스를 시작해 280개가 넘는 언어로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일 것이다. 이런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의 영향 때문인지 2012년 3월에 『브리태니커』는 인쇄판 출간을 중단하고 온라인판에 집중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브리태니커』의 마지막 인쇄판은 제15판으로 남게 되었다. 모티머 애들러는 바로 이 제15판을 준비하는 과정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1974년에 편집위원장까지 맡은 인물이다.

제15판을 계획하는 와중에 애들러는 다른 편집위원들과 더불어 백과사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브리태니커』를 포함해 절대다수 백과사전들은 참고 도서로서 기능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항목들을 알파벳순으로 배열하는 방법을 채택해왔다. 그러나 애들러는 이 배열법이야말로 현대의 병폐라고 생각했다. 백과사전이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전 영역을 포괄하려는 시도라면 지식의 부분들을 조직하는 체계적이고 원리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하지만, 알파벳순 배열법은 지식의 부분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거니와 그런 문제 자체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애들러는 알파벳순 배열법을 극복하기 위해 『브리태니커』 제15판 1985년 개정판에서 항목들을 ‘매크로피디아’와 ‘마이크로피디아’로 나누었고, ‘매크로피디아’의 목차 역할을 하는 ‘프로피디아’를 함께 발행함으로써 알파벳순이 아닌 ‘주제별’ 배열법을 도입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체계는 아직까지 『브리태니커』의 체계로 남아 있다.

애들러의 이런 문제의식은 이 책의 제2부에서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지식 체계들을 검토하는 이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평생공부를 목표로 삼을 때 관건이 되는 물음은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와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인데, 애들러가 보기에 현대에는 이 물음에 답을 주는 체계가 없는 반면에 과거에는 당대에 적합한 체계들이 이 물음에 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체계들을 현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애들러는 그 체계들에서 오늘날 평생공부의 길잡이가 되어줄 통찰과 분별을 이끌어내고, 그 체계들을 수정하고 확장해 오늘날에 적합한 체계를 내놓는다.

그 통찰과 분별, 체계를 살펴보기에 앞서 애들러가 말하는 ‘평생공부’의 의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특정 영역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평생토록 공부할 필요가 없으며 오늘날의 대학에서 전문가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전 영역에서 교양을 두루 갖추는 것이 목표라면, 다시 말해 종합적 교양인이 되는 것이 목표라면, 그리고 노년에 이르러 인간 정신의 최고 자산인 ‘지혜’를 조금이나마 성취하려면, 평생공부가 필요하다. 즉 평생공부는 종합적 교양과 지혜를 지향하는 공부다

이제 애들러가 위에서 말한 두 물음에 어떻게 답하는지 보자. 먼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종합적 교양인은 지식의 전 영역에서 학식을 두루 갖추고자 하므로 이 물음은 ‘우리 시대의 지식에는 어떤 영역들이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바꿀 수 있다. 이에 대한 애들러의 답변은 이 책에 부록 1 “프로피디아의 ‘지식의 골자 개요’”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록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지식 영역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기술, 종교, 역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애들러가 이 책이 고유하게 제공한다고 단언하는, 평생공부라는 오랜 여정에 필요한 지도는 다른 물음인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에 달려 있다.

애들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제2부에서 살펴보는 여러 철학자에게서 현대에 적합한 통찰을 이끌어내며, 그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이데이아’, 즉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하는 종합적 학식과 ‘에피스테메’, 즉 특정한 지식 영역의 전문가가 갖추는 전문적 학식을 구별했다. 이 구별을 애들러의 논의에 적용하면, 현대의 병폐는 파이데이아 함양을 이끌어야 할 인문학이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에피스테메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애들러는 에스파냐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을 빌려 이런 현실을 ‘전문화라는 야만’이라 진단하며, 이 야만을 다스릴 치료제이자 우리의 평생공부를 안내할 길잡이로서 인문학을 내세운다.

오늘날 인문학은 흔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분과들을 뺀 나머지, 즉 철학, 역사 연구, 종교 연구, 예술 연구, 문헌학, 외국어 연구 등을 가리키는 총칭으로 오용되고 있지만, 애들러에 따르면 인문학은 일군의 특정한 주제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고대와 중세로부터 전해진 인문학의 본래 의미는 어떤 ‘주제’가 아니라 지식의 모든 부문에 대한 ‘종합적 접근법’이다. 내용이 아닌 방법이 인문학의 요체인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주제라도 전문적 방식으로 탐구할 경우 인문학에 속하지 않으며, 자연과학적 주제라도 종합적 방식으로 탐구할 경우 인문학에 속한다.

‘종합적 접근법’이 인문학만의 자산일까?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통해 지식의 모든 갈래를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애들러에 따르면 그렇다. 애들러는 그 이유를 ‘초월적 형식’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초월적 형식이란 학식의 형식들 가운데 다른 모든 형식뿐 아니라 그 자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형식을 뜻한다. 예를 들어 철학, 역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 같은 학식의 형식들 중에서 다른 형식들을 탐구의 주제로 삼는 동시에 그 자체의 형식을 탐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인문학에 속하는 철학과 역사뿐이다.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을 철학적 ‧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과 철학과 역사학 자체를 철학적 ‧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철학이나 역사학을 물리학적으로 탐구하는 것과 물리학 자체를 물리학적으로 탐구하는 것(달리 말하면, 분과로서의 물리학 자체를 물리학적 탐구의 주제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의 갈래들을 두루 탐구하고자 할 때 ‘종합적 접근법’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인문학뿐이다.

인문학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프로네시스’라고 말한 ‘실천적 지혜’를 주는 것은 철학뿐이다. 인간 앎의 근본적인 두 범주는 이론(기술적 ‧ 설명적 지식)과 실천(규범적 ‧ 의무적 지식)인데, 근대에 발달한 경험적 ‧ 실증적 학문들이 철학의 영역이던 이론을 상당 부분 넘겨받았지만 실천만은 철학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지혜로운 행동을 알려주는 것은 철학에 속하는 도덕철학과 정치철학뿐이다. 다른 학문들은 철학과 더불어 정보와 지식, 이해, 약간의 지혜는 주지만, 가치판단을 회피하는 까닭에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답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애들러의 문제의식과 그가 평생공부를 위한 지도로 내놓은 종합적 접근법으로서의 인문학에 관한 견해를 요약했다. 이제 남은 일은 1986년에 출간된 이 책의 문제의식과 대안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효한지 따져보는 것이겠다. 애들러는 인문학을 전문적 학식으로 간주할 정도로 만연한 전문화를 현대의 병폐라고 진단했다. 지금은 어떤가? 인문학의 입지를 놓고 보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 듯하다. 인문학은 대학에서 고유한 영역을 갈수록 상실하고 있고, 인문학부에 속한 학과들은 점차 축소 ‧ 폐지되거나 타과와 통합되고 있다. 물론 애들러의 말대로 인문학의 요체가 내용이 아닌 방법이라면, 전문적 분과들로 파편화되고 있는 대학에 인문학이 남아 있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인문학이 경험적 ‧ 실증적 지식을 내놓지 못할 뿐 아니라 유용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는 이유로 인문학의 쓸모 자체가 점점 부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나는 이 책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고대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인문학이 오늘날에도 필요한 유산을 축적하고 간직해왔음을 보여주거니와, 그 유산을 바탕으로 종합적 교양을 추구하는 방법까지 제시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서술이 다소 압축적이긴 하지만 꼼꼼히만 읽는다면,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인문학이라는 지도를 바탕으로 종합적 교양인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전통적이면서도 오늘날에도 유효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