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이드는 자신의 모성을 부정당한 것으로부터 수치와 분노를 느끼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디서, 왜 그 분노와 수치의 감정, 아픔이 몰려오는지, 그리고 무엇이 자신을 고통스런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지를 알 수없다
-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 참여 또는 존재했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 제대로 증언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경험이기 때문
- 반 데어 콜크와 반 데어 하트에 의하면 자신의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었던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 트라우마적 기억을 재기억하는 것은 잠재된 고통의 재생을 초래하므로 그 고통을 감수하려고 하는 동시에 피하려고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역사와 미국 흑인의 역사는 모두 트라우마의 역사이다. 커룻은 역사는 “정확히 발생 시에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는 정도로 지시적(referential)이기 때문”(18)에 트라우마의 역사가 된다고 주장한다.
- 얼마간 다르게 표현하자면, 역사는 발생 시에는 접근이 불가능하고 얼마간의 잠복기를 거쳐야만 파악된다는 것이다. 잠복은 트라우마 본질적인 특성이므로 역사와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 방향은 동일하다. 따라서 잠복된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점과 트라우마적 기억에 대한 역사적 발굴이라는 공통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면 유대인의 역사와 미국 흑인의 역사는 트라우마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노예제도의 역사 하에서 잃어버리거나 고의로 지워진 흑인 내면의 서사를 복원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트라우마는 깨어나기 힘든 악몽처럼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며 망각이라는 쉬운 선택을 강요하지만 모리슨의 『빌러비드』는 등장인물들을 비롯한 독자들에게 트라우마의 역사를 힘들게 기억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트라우마적 과거의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 그녀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흑인들의 파편적인 트라우마들을 자신의 문학작품으로 구성해내는 것은 그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와 애도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함
- 그 가능성은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아닌 채로 남아있지만 그녀는 흑인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다시 기억하는 일에 독자들을 성공적으로 참여시키고 있다.
- 사회적 편견에 의해 폄하된 모든 억압받는 존재들의 내면에는 학습된 무기력과 자기 비하감이 자리 잡는다. 마거릿 가너가 죽여야 했던 것은 자기 아이가 아니라 바로 자신을 친자 살해범으로 만든 노예제
- 과거를 용서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정확한 단죄를 해야만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시에 사태의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망령은 끊임없이 되살아나서 현재를 훼손시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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