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슈비츠의 한 팻말에 쓰인 조지 산타야나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라ㅅ고 써 있고 더
- 홀로코스트 기념관 초입에는 다음과 같은 프리모 레비의 말이 있다고 한다.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 this is core of what we have to say." (이건 일어났던 일이고,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말해야 할 핵심이다)
“유대인의 참상은 끊임없이 재확인되고 있는데 우리는 기록조차 되지 않은 참상이 무수히 많다. (…) (참상들이) 역사로 남으려면 기록으로 보존되어야 한다.”
“거대한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고통 속에 있는 피해자들의 서사는 알려지지 않으면 계속 반복된”다.
출처: https://booksreview.tistory.com/820 [책이랑]
292 김숨
타인의 고통에 관한 부분.
너무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지인중에 실제 그런 사람이 있기도 하다.
" 인간은 본디 제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만 맴맴 돌기 마련이라, 듣는 이는 아무리 비참한 타인의 고통이라도 자기 체험의 총체에 견주어서만 이해하려 할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에서 연상된 자기 체험을 그에게 투사하며 그를 이해한다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일종의 자기복제나 자의적인 상상에서 그리 멀지 않다. 요컨대 단말마의 고통은 표현되거나 전달될 수 없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마저 그 정체를 모른다. 한 위안부 할머니의 "어떤 말로도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발언이 고통에 관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타인의 고통을 진실로 이해하려면 지구를 들어올리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 무엇보다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간절하게 청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은 모종의 악몽을 공통적으로 꾸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은 믿어주지도 들어주지도 않으며, 심지어 몸을 돌리고 침묵속으로 가버린다. 이 꿈은 극단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간절한 소망과 불가피한 절망을 동시에 암시한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를 진실로 소망하지만, 동시에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절망한다.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기에 이해받기를 쉽사리 낙관할 수 없는 것이다. 평균치 이상의 고통 속에 놓인 사람의 몰이해의 예견 때문에 이중으로 괴롭고, 그들의 예견은 어느 정 사실이기에, 절망은 더욱 참혹하다. 이 절망을 조금이라도 희석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이해와 공감의 여정이 지난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수난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또 기울여야 한다.
김숨 지음/현대문학
출처: https://booksreview.tistory.com/820 [책이랑]
결국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예순두 살에 ‘위안부’로서의 삶을 고백했으나 이후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가족들의 외면이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가 침묵한 탓이었다. 개인의 소중한 삶이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버리도록 방기한 결과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지 않으니 가족마저 외면했던 것이다.
![]() |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돌베개 |
- 이전에 겪어 보지 못해서 가족이나 지인들이 믿어 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 총체적 시각을 상실하여 자신이 당한 일을 사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함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라거(강제수용소)의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이 살아남았다. 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적자適者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우리는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들이 바로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P.97
가라앉은 사람들은 설령 종이와 펜이 있었다.
하더라도 증언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육신의죽음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죽기 수주, 또는 수개월 전에 그들은 이미 관찰하고, 기억하고, 가늠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잃었다. 그들 대신, 대리인으로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P.99
진실이 아닌 위로는 결국 또 하나의 절망을 안겨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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