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은 세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으로 18세기 영국 중·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적어 내려간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6편의 대표작을 남겼는데 전쟁이나 극적인 사건이 없이도 인간의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가장 탁월한 점이라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200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작품은 드라마와 영화로 계속 만들어지고 있으며, 원조 페미니즘 작품으로서 새롭게 평가 되고 있다. 이번에 그녀가 쓴 마지막 작품인 <설득Persuation>을 읽었다.
설득이라는 제목은 그녀의 사후에 이 작품이 출판되면서 그녀의 유족들이 붙인 것이고, 제인 오스틴이 이 작품에 붙여둔 제목은 "The Elliot"이었다고 한다. 설득이라는 단어는 225번이나 등장을 한다고 하니 제목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The Elliot> 이라는 제목이 파혼하라는 러셀부인의 설득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던 앤의 입장을 더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이 작품의 중심내용이라지만 이 작품에는 연애에 수반되는 감정의 오르내림과 뜨거움보다는 냉정한 관찰과 평가의 말들이 훨씬 더 많다. 달달한 연애담이 아닌 연애와 결혼에 대한 건조한 기획취재 기사나, 실패하지 않기 위한 연애와 결혼과 같은 제목의 가이드북 같기다. 만일 여자와 남자가 공평하게 자원을 배분받고 같은 크기의 권력을 가진 사회였다면 이 작품은 뜨거운 사랑얘기로 쓰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여자의 유일한 진로가 결혼이고, 누구랑 결혼할지 선택하는 일이 앞으로의 지위와 성취의 한계까지 결정하게 된다면 사랑과 결혼은 결국 '전략'이 가까와지게 된다. 상대방의 자산, 사회적 지위, 미래의 변화를 꼼꼼히 따져보고 지금 나와 상대방의 가슴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감정(感情)도 냉정하게 감정(減定) 해 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8년전 앤의 입장에서는 웬트워스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 좋은 남편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해서 돈을 벌었지만 이미 다 써버린 상태였었고 앤에 대한 사랑 역시 피상적인 수준이었다. 자기의 감정에 만 충실할 뿐 한 인간으로서 앤을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다. 남자로 살아왔기에 웬트워스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좋은 아내'를 선택해도 되는 거지만 여자인 앤이 '좋은 남편'을 고른다는 건 훨씬 더 많은 것을 한꺼번에 결정하는 복잡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8년 후 다시 만났을 때까지도, 웬트워스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어서, 거절당해서 느끼는 자기의 아픔만 되새k기거나 그녀의 행동과 말만을 볼 뿐,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앤의 마음을 보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은 주제가 연애와 결혼이고,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는 점 때문에 그녀는 그 당시의 가치를 긍정하고 거기에 머무른 것으로 평가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제인 오스틴은 당시 사회를 편들지 않았다. 그녀는 여성의 삶에 한계를 만드는 사회의 모습보여주면서 거기에 의문을 던진다.
- 여자는 어떤 집안의 딸이거나 누구의 아내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게 정당한 건지?
- 여자가 남편을 선택한다지만 실제로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는지?
- 지금 행해지고 있는 신분제는 합리적인지?
-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하는데 그게 맞는 건지?
- 사람의 외모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데 외모가 그 사람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건지?
- 서로 다른 계급사이에 우정이 존재할 수 있는 건지? 우정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 남편이 죽은 후에 여자가 재산도 찾지 못하고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 정당한 건지
등등.
또한 여자주인공인 앤이 가장 새로운 생각을 가진 가장 통찰력 있는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점, 제인 오스틴 그 자신이 두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생각하다면 당시 사회를 부정하는 쪽에 훨씬 가깝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