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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

내게 무해한 사람

by 책이랑 2019. 9. 17.
내게 무해한 사람 - 10점
최은영 지음/문학동네

...꼭 계속되어야만 좋은 건 아니잖아.
...넌 네 삶을 살 거야 - K


고모의 말을 들으면서, 엄마와 함께 거실 한구석에서 접은 다리를끌어안고 혜인은 누워 있었다. 어른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고 말하면서도 같이 증오할 사람 하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p222손길 


˝남의 집 일에 나서는 거 아니야.˝
˝엄마.˝
˝네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져?˝
˝그래도 엄마....˝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넌 여자애야.˝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달린 로프 같아서, 단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안도감을 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모래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에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나를 세상과 연결시켜준다는, 나를 세상에 매달려 있게 해준다는 안심을 준 사람이. 그러나 모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모래로 지은 집」中  

신의 현존에는 분명 그가 말한 위안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 <고백>  p.209 

언니, 어두운 쪽에서는 밝은 쪽이 잘 보이잖아. 그런데 왜 밝은 쪽에서는 어두운 쪽이 잘 보이지 않을까. 차라리 모두 어둡다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서로를 볼 수 있을 텐데. -235쪽 <손길>중에서 

한심하게 사는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심하게라도 살기까지 얼마나 힘을 내야 했는지, 마침내 배가 고프고 몸을 움직일 수 있고 밖으로 나갈 힘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 letitgo

p. 97 -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가방을 든다. 구원이니 벌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물며 사랑이니 하는 이야기는 더는 입에 올리지 않은 채로. 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각자의 우산을 쓰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뒤돌아 걸어간다. 그렇게 걸어간다. 

그때의 나는 내가 졸업 이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무리한 대출을 받아가며 대학원에 입학하게 될 것도, 그곳에서 처음으로 연애를 하고, 졸업과 취직을 하고, 오래 연애한 남자와 파혼하고, 한동안은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리라는 것도 몰랐다. 아무렇지 않게 서른 살의 허들을 넘고 원래 그 나이로 찾아온 사람처럼 능청을 떨게 될 것도, 최승자의 시집을 읽으며 간신히 버티던 스물셋의 가을 같은 건 어린 날의 유약한 감상이었다고 과거의 나를 평하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접기 - 레인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 수우

나는 이제 서른다섯이고 그때의 일을 자주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해본 적도 없다. 누구나 살면서 몇 개의 다리를 건너듯이, 그때의 나도 공무와 모래와 함께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들과 함께..
당시는 몰랐지만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공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커졌던 것 같다.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모래와 공무에 지이야기를 모래와 공무에게 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이야깃거리로 삼고 싶지 않아서였다. 선배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드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이기적인 이유에서든 선배의 죽음을 이야기로 삼는 순간 그의 고통은 그저 마음을 자극하는 동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동정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 선배의 삶이 그저가여움으로, 억울함으로 결론지어지고 그의 이름이 그저 학대받은 피해자로 대체될 수는 없었다.  접기 - 쉐기쉐기몽쉐기

˝자기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나이에 벌써 돈 보고 여기 왔으면서. 나는 적어도 안 그랬어. 머리에피도 안 마른, 새파란 나이부터 이런 데 기웃거리진 않았어, 적어도 나는.˝
˝그래요, 선생님, 전 돈이 좋아요. 돈이 좋아서 여기 왔어요.˝
˝내 방에서 나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왔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으리라고결심했으면서도 결국 기대하게 된 나를 탓했다.
입소할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어느덧 한겨울이 되어 돌아가는 길이온통 얼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내가 떠났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기숙 학원이 더 가깝게 느껴졌고 내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은 가장 맑으면서도 미숙한 시기인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인물들을 스쳐가는 우정과 사랑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들의 감정이 어떤 조건도 걸지 않는 순연한 것인 만큼, 그것이 어긋날 때 이들은 더 깊이 서로를 베며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그리고 이들은 그 기억과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마음 깊숙이 그 시절을 품은 채 살아간다.- 305쪽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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