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극중 김희경의 낭독회 ? ^^ (P.14)
사진은 은희경 작가의 낭독회 사진~
■ 1977 3월 (P.25)
- 화자인 김유경이 읽었을
을유세계문학전집( 1959~1975년 출간됨)
■ 1970년대 숙대 교문
■ 1977년 3월- 유경이는 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된다.
- 숙대 기숙사(p.28)
- 숙관과+명관이 ㄱ자 모양으로 있었다고
- 74년에 숙관 소실되었는데 76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 숙대 기숙사 연혁
■ 1977년 3월
"밤을 잊은 그대에게"
심야 가요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TBC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통틀어 최장수 프로그램이었다. 1964년 5월 8일 라디오 전용으로 개국한 라디오 서울 (RSB)에서 방송을 시작했다가 그 후 동양방송 (TBC)으로 이어졌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으로 TBC를 강탈 KBS에 강제 편입시켰다. 1980년 11월 30일 당시 DJ였던 황인용씨는 TBC 라디오 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고별 방송을 했다.
■ 1977년 3월
- 숙대기숙사로 가는 길은 세가지라고 함 앞 (p.67)
- 학교 후문 길건너인데
- 기숙사를 바라봤을때 오른쪽길은 버스정류장에서 오는 길이고
- 기숙사의 왼쪽은 공원쪽길
■ 1977년 4월- 연극 에쿠우스와 관객모독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14171127 (중앙일보) 2014년
에쿠우스 1975년 극단 실험극장에서 초연
긴급조치 9호 시대 - 막걸리 긴급조치를 아시나요?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9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개헌 논의 금지 및 비상군법회의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1·2호를 시작으로,
74년 4월 민청학련사건을 빌미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75년에는 가속화된 유신철폐운동에 대처하여 고려대 휴교령 및 군대 투입을 내용으로 하는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75년 5월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의 주장이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1979년 10·26사태 이후 12월 해제될 때까지 무려 4년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긴급조치 7호 발표와 함께 휴교령이 내려진 고려대 정문 앞을
군인들이 총들 들고 봉쇄한 모습
긴급조치 1974년~1979년제왕적 유신헌법의 많고 많은 독소 조항 중의 독소조항은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경우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할 수 있다는 유신헌법 제 53조 대통령 긴급조치권이었다. 긴급조치란 대통령이 자기 멋대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그 내용을 마음대로 만들어 선포할 수 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법 아닌 법이었다. 국회도 필요 없었고, 사법부도 필요 없었다.
박정희의 시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었던 위수령이나 계엄령 대신 그런 효과를 상시적으로 부릴 가장 편리한 수단이 바로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는 ‘국가안보나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을 때’ 발동되어야할 긴급조치권을 수시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발동하였다. 긴급조치 없는 대한민국 1970년대란 상상할 수가 없었다.
1975년 5월 13일에 발표된 대통령 긴급조치 9호는 바로 그 완결판이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이 등장하기까지 장장 5년여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모든 싹을 영구히 잘라내기 위한 극단적 조처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유신헌법에 대해 일체의 비방이나 부정, 반대, 왜곡, 개헌청원이나 폐기를 주장하거나 찬동, 선동하는 행위를 할 수 없었고, 이런 내용을 방송, 보도하거나 표현물을 제작, 배포, 판매, 소지하는 일체의 행위 역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었다.
위반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과 10년 이상의 자격정지를 부과할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나 단체의 장에게 해당자의 해임이나 제적을 명령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는 휴업, 휴교, 잡지의 정간, 폐간이나 승인, 등록 취소도 주무장관의 재량 하에 마음대로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시장과 도지사는 필요하면 ‘군대 출동’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다 긴급조치는 긴급조치에 의해서만 해제가 될 수 있었고 이 긴급조치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부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긴급조치 위반에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벌어진 웃지 못 할 일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변호하는 변호사 역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들어가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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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과 이경혜가 연대 운동권 학생들을 만난 곳~
사진은 1976년의 영화중 한 컷이라고함
■ 1977년 4월 - 중문과 친구 이경혜가 좋아하던- 투게더 아이스크림(p.81)
출처: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1410406622651608&mediaCodeNo=257
식품박물관]①'투게더'…가족 둘러앉아 밥숟가락 퍼먹던 아이스크림
1974년 '투게더' 출시 후 한국 고급 아이스크림 시장 선도
초창기 아이스케이크 60개 값, 아빠 월급날 함께 먹던 추억
21세기 저출산 시대 다양한 맛과 형태로 변신 중

... 당시만 해도 ‘아이스케이크(일명 아이스케끼)’라고 해서 설탕물을 얼린 빙과류가 전부였다. 유제품을 얼려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기술은 없었다. ..1973년 들어 한국화약그룹은 대일유업 주식 50%를 인수했다. 지지부진했던 아이스크림 사업도 탄력을 받게 됐다. 공장 건립에 이어 사업 자금까지 확보한 대일유업은 1973년 6월 6일 국내 첫 아이스크림 제품인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을 내놓는다. 오늘날 ‘투게더’의 전신(前身)이다. 한국 아이스크림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전천후 영양식’,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등을 내세운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은 높은 인기를 끌었다.
...대일유업은 제휴사였던 퍼모스트와 별개로 아이스크림 개발에 나섰다. 퍼모스트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1년 만인 1974년 ‘투게더’를 출시했다. 아이스크림을 일일이 손으로 담아야 하는 등 대량 생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생우유로 만든 우리만의 아이스크림이란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
1970~80년대 투게더는 고급 아이스크림으로 통했다. 출시 초창기 가격은 600원으로 아이스케이크(개당 10원) 60개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아버지 월급날처럼 목돈이 들어오는, 특별한 날에만 아이들은 투게더를 먹을 수 있었다.
■ 1977년 4월 - 제1회 서울가요제
■ 1977년 4월 12일 동아일보 1면
신문1면에서 주한 미군 철수와 군축문제가 들먹여지는 사이사이 대간첩본부는 때맞춰 무장공비의 출몰을 발표했다. p. 91
■ 1970년대 이대 앞 양장점에서 맞춘 옷들
322호의 양애란이 PDT(파트너, 드레스, 티켓) 중에서 가장 관심을 쏟은 것은 D, 드레스 였다고 한다.(~p.91)
(이대 앞의 커피, 옷 가게 등은 이후 프렌차이즈로 발전해 나갔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이대앞 양장점
■ 1977-05-08 숙명여대 청파축전 모습
포크댄스
어둠이 내린 뒤 포크댄스 시간이 되었다. 모두 원을 만들때 그녀는 파트너의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그가 두 번이나왼쪽 여자의 손을 고쳐 쥐는 걸 발견했다. 살구색 원피스 위에 베이지색 마이를 멋지게 차려입은 여자였다. 그날 밤 다방에서 양애란은 그 여자의 손이 너무 작아 미끄러지는 바람에 다시 잡아야 했다는 파트너의 변명을 끝내 믿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다면 그날 양애란의 앙탈이 조금 심했다 한들 파트너가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는 말을 입 밖에 내 지는 않았을 것이다.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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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야구 최강팀
https://m.blog.naver.com/favre1017/90117115515
[77년 연세대 투타의 핵 최동원 - 이광은 선수]
연세대의 투수진은 단연 신입생 최동원 선수를 축으로 운용이 되었습니다. 경남고 시절 이미 고교 수준을 뛰어넘는 엄청난 투수로 꼽히던 최동원 선수는 신입생 시절부터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며 단번에 성인야구 무대의 에이스로 군림을 합니다. 최동원 선수의 입학 전까지 에이스겸 중심타자로 홀로 팀을 이끌다시피 했던 이광은 선수는 간간히 투수로 등판하기는 했지만, 타격에 보다 전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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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 운동장
https://namu.wiki/w/%EB%8F%99%EB%8C%80%EB%AC%B8%EC%9A%B4%EB%8F%99%EC%9E%A5서울운동장
서울시 중구 을지로 7가 일대에 위치한 종합 운동장이다. 애칭은 성동원두(城東原頭). 수많은 국내•국제 체육 경기가 벌어졌던, 대한민국 근현대 스포츠의 메카라 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장소이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 끝에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했고, 주경기장의 경우 트랙은 우레탄 포장, 그리고 필드는 천연잔디를 깔았다. 28단의 스탠드는 3만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부속 건물로 동대문야구장, 테니스장, 수영장, 배구장 등이 있었다.
2. 건립
1925년 10월 15일 건립된 이래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最古)의 경기장이자, 국내 스포츠의 메카였다.
이름
경성 운동장(1925~1945)
서울 운동장(1945~1984)
동대문 운동장(1984~2008)
개장 1925년 10월 15일
철거 2007년 12월 18일
해방이 되자 일본이 서울을 칭하던 경성(京城)[7]을 서울로 바꾸어, 서울운동장으로 개명하였다. 해방직후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 공의 장례식이 거행된 장소이기도 하다.
1962년의 보수공사로 육상경기장을 비롯 야구장·수영장·배구장·테니스장 등이 국제규모의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고, 1966년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야구장에 야간 조명시설이 마련되었다. 1968년 보수공사로 메인스타디움인 육상경기장이 오늘날 흔히 기억되는 모습을 갖추었다.
종합경기장으로 개장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각종 체육단체, 각급학교, 언론기관에서 주최한 축구, 야구, 정구, 육상, 종합경기 등 전국규모의 대회와 올림픽 및 월드컵축구대회의 출전을 위한 예선전 등의 각종 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더구나 이곳은 단지 스포츠의 공간이 아니라 때로 정치, 사회, 문화의 현장이기도 했다는 점에서도 틀림없는 '종합'경기장이었다. 8.15 광복 경축행사, 어린이날 행사, 국군의 날 행진시 최종 도착지, 미스코리아 대회장(부속 수영장), 종교 행사 등 다양한 목적의 행사에 활용되었다.
■ 동대문운동장 변천사
http://blog.naver.com/nahasa1/60152799644
■ 제식훈련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맞은편 대열에서 응원을 보내기 보 다는 내 곁으로 와서 서는 것. 하지만 내가 자란 시절은 약점을 개인이 가진 하나의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전국의 고등학생이 학도호국단이라는이름으로 수업 시간에 군사훈련을 받던 시절이었다.최악은 제식훈련이었다. 열병이니 거수경례니 군인 흉내는 무리에 섞여서 대충 따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씩나와 큰 소리로 구령을 붙이는 실기 시험은 달랐다. 운동장에 정렬해 있는 65명의 반 아이들 앞에서 양다리를벌리고 두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입을 크게 벌리는 것부터가얼굴이 달아오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허리를 젖힌 뒤 목젖을 떨며 외치는 "전체 열중쉬어! 차렷! 우향앞으로잇 가!" 등의 구령은 특히 초성 발음과 큰 소리 내기가 어려운 나에게는 고문을 당해 비명을 지르는 경우가 아니고는 나오기 힘든 성량의 소리였다.
■ 숙명여대 학보- 숙명신보
출처 : http://bravo.etoday.co.kr/view/atc_view.php?varAtcId=4910
▲1960년대 기사
■ 김유경의 룸메이트 오현수가 열심히 읽은 레먼북스 시리즈 153
레먼북스 시리즈
■ 양애란이 다니던 그린파아크 수영장과 워커힐 수영장
그린파크호텔 수영장(국가기록원, 1973)
1970년대 중반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쉐라톤 워커힐호텔 수영장 풍경
<사진 출처=국가기록원>
1970년대 워커힐 모습
■뉴욕타임즈가 미국 CIA가 청와대를 도청해 왔다는 것을 보도함
박정희 정부에서도 청와대 도청 소동이 있었다.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지는 ‘1970년 미 정보기관이 전자도청 녹음기 등을 이용하여 청와대에서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한 로비 활동 관련 회의를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국무총리와 외무부 장관은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조속한 공개 해명을 촉구했다. 미국 정부는 정보기관의 활동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논평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며 버티다 결국 두 달 만에 비공식적으로 도청 사실을 부정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듬해 6월 또다시 뉴욕타임스가 청와대 도청이 1970년이 아닌 1975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폭로했다. 정부는 미국 정부가 도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서로 밝힐 것을 요구하는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이번에는 두 달 뒤 터너 CIA국장이 직접 청와대 도청에 관한 보도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공식 해명했다. ....
■[어제의 오늘]미 CIA의 청와대 도청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904021750265#csidxead99c8b5674bfd97ec4d405b739efb
한국정부는 주한미군철수, 핵개발, 인권탄압과 같은 이슈에 대해
미국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미 의원들에게 거액의 현금로비를 했다는 기사가 남
(기사의 정보 출처는 청와대의 밀담을 도청한 CIA~~~)
1970년대 후반 한·미 관계는 톡 건드리면 팍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었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의 핵개발,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둘러싸고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엔 보이지 않은 신경전이 치열했다.
거기에 기름을 끼얹은 게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였다.
한국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동선씨를 앞세워 미 의원들에게 거액의 현금 로비를 했다는 76년 10월15일자 워싱턴포스트의 폭로는 워싱턴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한·미관계도 격랑에 휩싸였다. 로비 못지않게 논란이 된 게 정보의 출처였다.
워싱턴포스트 보도 이후 미국 정부가 미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 제출한 관련 문서에는 70년 가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열린 밀담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대미 로비 활동 채널을 박동선씨로 일원화한다’는 극비정보였다. 미 정부의 문서에는 청와대 1차 밀담에서 토의된 로비 계획이 2차 밀담에서 보류된 과정까지 들어 있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904021750265#csidxe5727222c33980f9531bcb2b897fd01

박정권, '청와대 도청설'에 항의는 커녕 '부인해달라' 미국에 ...
또 1976년 11월 1일자 미국무부발 보도요약 자료에도 '전 CIA요원이 전세계 30개 이상의 수도에서 도청을 하고 있지만 청와대를 도청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국은 CIA가 도청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 지역이다'라는 보도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처럼 한국전체를 뒤흔들고 한미관계를 망가뜨릴 정도의 대형사건이 터지자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의 입장조율이 활발해지기 시작합니다
청와대 도청설이 처음 알려진뒤 약 닷새가 지난 76년 11월 2일 스나이더 주한 미국대사는 박동진 외무부장관을 만난뒤 국무부로 비밀전문을 보냅니다
이 전문[서울 8757]에 따르면 박동진 외무부장관은 스나이더대사를 불러 미국정부가 청와대 도청설이 사실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부인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박장관은 이 자리에서 11월 4일 개최 예정인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박동선의 의회로비, 즉 코리아게이트와 청와대 도청설등이 논의될 수 있으며 코리아게이트는 쉽게 처리할 수 있으나 청와대 도청설은 정말 걱정거리라고 말했습니다
.....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 업무공간인 청와대를 미국이 도청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에 이를 강력히 항의하기는 커녕 사실상 미국정부에 매달리며 이를 부인해달라며 '애절하게' 통사정을 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보이저호 p.161
'골든 레코드'에는 사람, 교실, 디엔에이 구조, 수치연산 등 지상의 풍경을 보여주는 115장의 사진영상이 담겼으며 또한 바람, 천둥, 새, 고래, 아기 우는 소리처럼 다양한 지상의 소리도 담겨있습니다. 또 여러 나라의 음악을 선곡해 실었으며 쉰다섯 가지 언어의 인삿말이 담겨있습니다.
■ 케이트 밀릿
밀릿은 이런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고대 신화에서부터 현대의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에 담겨 은밀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남성과 여성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 케이트 밀릿 (1934~)
"性은…사랑이 아닌 정치적 행위다"
시대를 앞서 왔던 페미니즘 여전사
출처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7/06/371121/
2017.06.02
1969년 대학 강사였던 케이트 밀릿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컬럼비아대학에 제출한다. 물론 밀릿 자신은 이 논문이 훗날 페미니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 뒤로 자빠진 건 심사 교수들이었다. 성(Sex)을 정치로 분석했으니 그럴 만했다.
쉽게 말해 `사랑`을 `힘`으로 분석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있을 수 없는 도발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을 권력이니 정치니 하는 단어로 분석을 시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논문에서 `성적 억압`의 사례로 든 것들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작가들의 문학작품이었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 DH 로런스, 장 주네 등의 작품 속에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증거를 찾아냈다. 밀릿이 제시한 근거는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헨리 밀러의 `섹서스`를 보자. 소설에서 여주인공 아이다는 관음과 성교의 대상일 뿐 저항을 모르는 존재다. 그저 먹잇감(prey)에 불과하다. 노먼 메일러의 `미국의 꿈`도 마찬가지다. 남자 주인공 로제크는 그저 소유권이나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해 여자친구에게 항문성교를 요구한다. 장 주네의 `도둑일기`도 마찬가지다. `도둑일기`에서는 동성애 관계에서조차 남성역할과 여성역할에 계급 차이를 둔다. 이들 작품 속에서 섹스는 낭만이나 생명의 신비가 아닌 계급을 확인하는 제의에 불과하다.
밀릿은 이런 식으로 당시 서점가에서 우상으로 군림하던 남성작가들의 작품이 얼마나 지배-피지배 프레임에 갇혀 있는지를 찾아냈다. 그의 논리는 하나의 과녁을 향해 있었다. 바로 가부장제다.
"가부장제는 유례없는 지배 이데올로기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체제도 이와 같이 완벽한 지배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밀릿은 이런 가부장 이데올로기가 고대 신화에서부터 현대의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콘텐츠에 담겨 은밀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한다고 해도 남성과 여성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70년대 미국에선 페미니즘 운동이 과격해진 시기였고, 77년에 이대에서 처음 페미니즘 강좌가 개설됐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뭐가 달라졌을까란 생각도 한다. 교육받은 엘리트 여성들이 사회에 적응해버린 것에 대한 반성이 있다”...작가 인터뷰
■ 1978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 1978년 5월29일자 경향신문은 당시 문을 연 지 1년쯤 지난 고속버스터미널(당시 명칭은 강남종합버스터미널) 운영 실태를 다뤘습니다. 기사는 당시 고속버스터미널의 대합실, 식당과 매점, 화장실, 식수대 등을 직접 관찰하고 쓴 르포였는데,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고속터미널 서비스에 ‘0점’을 주고 “글자 그대로 수라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첨단 복합 쇼핑몰로 변한 지금과는 너무나 차이가 나는 모습입니다.
기사를 보면 취재기자가 르포를 한 1978년 5월28일 낮 최고기온은 30도에 육박했는데, 경부선 대합실에 설치된 에어컨 11대 중 작동 중인 것은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호남선 대합실에는 선풍기가 10대에 불과했습니다.
화장실 상태도 나빴습니다. “대합실 밖에 가건물을 지어 설치한 경부선 화장실의 소변기는 호스를 통해 밖에 놓여진 플래스틱통으로 소변을 받아내도록 되어 있어 악취가 풍기는가 하면 파리떼마저 극성을 부리고 있다.”
식수대 9개 중 5개가 고장 중이었고 작동 중인 식수대로 “실날 같은 물줄기”만 나와 유명무실했다고 합니다. 호남선의 경우 7개의 식수대 중 4개가 고장난 채 담배 재떨이나 휴지통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 p.315P
1977년을 보냈던 사람들은 그해를 무엇으로 기억할까.
김승옥이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첫번째 이상문학상을 받았고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 필화 사건에 휘말린 해였다. 의료보험이 시작되었고 제1회 대학가요제가 열렸으며이리역에서 화약을 싣고 가던 열차가 폭발했다. 매스컴은 수출 백억 달러 시대와 함께 1인당 국민총생산이 8백 달러를 넘어섰다고 떠들어댔다.
그해에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이 96.4퍼센트를 기록할 만큼 유례없는 경제 호황이라는 신문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학보에 실린 우리 학교의 취업률은 26퍼센트였다. 기업들이 일을 잘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기업에서 요구하는 타자와 어학 능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는 등 학생들의 실력이 부족했던 것도 낮충은 취업률의 원인이다' 라는 분석이 덧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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