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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 (발췌)

by 책이랑 2019. 10. 25.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가?

2003년 10월 12일, 독일출판협회는 제55회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수전 손택에게 퍼화상을 시상했다.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것이 손택에게 평화상을 시상한 이유였다. 독일출판협회가 잘 지적했두이손택은 첫 저서 『해석에 반대한다.(1966)에서부터 최근작 「강조해야 할 것 (2002)에 이르기까지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한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일관되게 추적해 왔다. 그리고 그 작업은 현실 참여로 이어졌다.

손택의 현실 참여는 베트남 전쟁이 힌칭 중이던 196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대의 유명 시사지 『파르티잔 리뷰』에 「지금 미국에서 무슨 일이'벌이지고 있는가?」를 기고,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나"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 같은 숱한 독설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 베드남 전쟁의 허위, 아메리카 드림의 실상을 포로했던 것이다.

 주류 대중매체는 이 일을 계기로 손택의 별명을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에서 '동시대 미 국 문단의 악녀'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으나, 그 뒤로도 손택은 자신의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는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말자" 라고 얘기하며 9·11사건 직후 미국 사회에 불어닥친 반'성적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사이비 전쟁을 위한 사이비 선전 포고를 그만두라고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등, 손택은 결코 논쟁을 피하는 법이 있었다.


『타인의 고통은』 25년 전에 발표된 사진에 관하여 (1977)와 이어지는 저서이다. 전작이 사진 이미지를 분석하면서 사람들이 현대성이라는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이번 저서는 이미지가 사용되는 방식과 그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 등까지 살펴보고 있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은 이라크 전쟁 전후의 현실정세에 대한 '지적' 개입이기도 하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시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호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 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택은 이렇게 주장한다.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다")까지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그러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보고 가지게 된 두려움을 극복해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 한다고.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장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재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은 기나긴 족보를 갖고 있다. 흔히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이해되는 고통이다. 특히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나체가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으로서,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수세기 동안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  숭고하거나 장엄하며, 그도 아니면 비극적인 형태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유혈 낭자한 전투 장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전쟁의 이미지에 늘 따라붙는 주장이다. 현대가 시작될 무렵에는 원래 소름끼치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사람들이 타고났다는 주장이 훨신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잔악함에 대한 사랑은 연민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다.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다시 말해서 식민지의)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여 년 묵은 관행을 그대로이어 받은 것이다. 비록 적이 아닐지라도, 타자는 (백인들처럼) 보는사람이 아니라 보여지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정을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내는 카메라와 인간은 총을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리의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인 것이다.


한국어 서문
한국의 독자들에게(pp.13-14)

▶현대에는
- 잔혹 이미지들은 이제 진부할 정도
-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 - 현실인식의 손상?
- 타인의 고통을 염려한다는 것의 의미?

▶ 이 책은 

- 이미지가 아닌 '전쟁'이 주제
-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에 집중하자는 말, 
-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양심의 명령까지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1] 

3기니 - 10점
버지니아 울프 지음, 오진숙 옮김/솔출판사

<3기니>는 현 사회를 바라보는 버지니아 울프의 날카로운 시선과 분석이 돋보이는 에세이다. 전쟁의 위협이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상황에서 전쟁과 파시즘, 제국주의는 과연 어디에서 유래하며 그것이 여성과 젠더, 가부장제와 어떠한 근본적인 상관관계가 있는지 파헤치는 평화주의자 울프의 페미니스트 반전 논쟁 책자이자 일종의 '시위'다.

소위 의식의 흐름의 대표적 모더니스트 작가로 알려진 울프는 이 작품에서 확실히 이전의 어느 작품들에서보다 더욱더 격앙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지금 이곳의 현실 곧 “사실”을 잊지 않는다. 공손하고도 정중한 태도로 울프는 복잡한 이슈의 논쟁에 수반되는 감정을 조절하며 페미니즘과 평화주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고 있다.



여성, 비주류의 시선을 통해 체제 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하다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여성의 오랜 경제적 빈곤은 가부장제에 계속 충성하도록 하여 여성에게 가장 적합한 공간은 가정이라는 독단적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심화시켜왔다. 산업혁명 이후 팽창 일로에 접어든 자본주의하에서 더 많은 남성들이 더 많은 자본의 세력을 갖고 더 많은 소유와 지배와 군림을 추구하고 누렸으며, 그 욕망이 탐욕으로 변질되어 가면 갈수록 가정 내에서의 여성과 여성화된 타자들을, 곧 약소민족, 약소국가들을 억압하고 점령해나갔다. 이리하여 사적인 가정과 가족 내에서의 파시즘과 독재주의를 낳은 남성들의 유아기적 고착증과 가부장적 욕망전쟁을 동반하는 더 큰 규모의 독재와 제국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울프는 ‘기니’를 앞세워 이러한 과정을 하나하나 짚어나가며 현재로서는 여성이 전쟁을 막는 독립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우선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직에서 생활비를 버는 일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며 교육을 받고 전문직을 가지면서도 거기에 물들거나 오염되지 말고 “문명화된 인간”으로 남아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여성은 이제 “아웃사이더”로 남기를 의도적으로, 주도적으로 선택해야 하며, 바로 그러한 아웃사이더의 힘이야말로 작금의 사회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할 것이다. 


사진들은

전쟁을 향한 비난을 할 수도 있고
전쟁을 겪지 못한 사람에게 전쟁의 현실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전쟁을 포기해야만 하는 이유가 될수 없다고 응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전쟁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 지 거의20여 년이 지난 뒤에 발표된 『3기니』를 통해서, 울프는 너무나 분명하거나 부적절해서 입에 올린다거나 골똘히 생각해 볼 것조차 없다고 여겨지던 것, 그러니까 전쟁은 남성의 유희이며, 살육 기계도 성별을 갖고 있는 바 그것도 바로 남성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독창성을 보여줬다


( 요약: 울프는 사진을 보고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다거나, 몸서리 치치 않는다거나 이런 참사나 대량학살을 가져온 전쟁을 없애려 애쓰지 않는 것이야 말로 도덕적 괴물의 반응이라고. 그러니  괴물이 되지 말고 상상력, 공감의 실패를 하지 말자고 말함

- 하지만 이 사진들이 전쟁에 대한 거부감만을 자극하지는 않는다.

-국가를 위해서라는 호전성을 부추길 수 도 있고
- 전쟁의 결과보다 
- 혐오 때문에 이런 역사를 지닌 스페인이라는 국가에 개입하기를 꺼릴수도 있다.
-폭력은 폭력의 피해재를 사물로 뒤바꿔버리기 때문에 잘못된 것  
   <일리아드> 또는 무력의 시(1940) - 시몬는 베이유

- 온몸으로 생생히 느낄 수 있는 만큼의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다면 전쟁의 포악함과 광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음

but  에른스트 프리드리히의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 에 담긴 80여장의 사진은 전쟁을 막는데 실패했다.

[2] 

- 이제 현대에서는 전투와 대량학살은 오락거리가 되었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p.45)
- 사진이 가장 자극적임
(정보과잉시대라서 
신속,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 문자세계서 속담,인용문 같은 구실)

- 현대는  버지니아 울프가 『3기니』 를 쓸 때와는 달라져 이제 사람들은
고통과 폐허를 담은 지독히 친숙하고,  지독히 유명한 이미지를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 사진은 몰살장면을 설명해주는  그 어떤 말보다 사진은 신속성과 권위를 얻게 됨
- 현실을 복잡한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어 짐
- 상상력보다 우월한 권위를 가지게 됨(1922년 월터 리프먼)  p.47
- 사진은 객관적+현실

- but 울프는 사진은 "논쟁이 아니면, 눈에 보이는 사실의 조잡한 진술일 뿐" 이라고 하면서 
"눈은 뇌와 뇌는 신경체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 신경체계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느낌을 모두 통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보낸다."고 함|
:①객관적 기록인 동시에 
개인적 고백이 되수 있고 현실의 복사본, 필사본, ⑤⑥현실에 관한 해석으로 취급 받음(p.46)

- 그러나 울프는 사진은 그 누군가의 관점을 재현할 뿐이라는 사실에는 집중하지 못함

- 한편 기록되어 의미가 부여되는 전쟁이 있는 반면 
그릏지 못한 전쟁과 상황이 있다.
- 사진으로 항의 해야 하지만  승리, 패패, 비애감, 영웅주의를 부추길 수 있다.

자신들의 목적에 맞에 변덕에 맞게 부풀려지게 마련이기에 사진작가의 의도만으로는 사진의 의미를 결정되지 않음

[3] 

- 괴롭힘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음증, 감수성이 달라지면 그 고통을 줄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림
- 이런 사진이 만들어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크림반도의 사진은 전투모습이 아니라 황량한 풍경을 찍었고
*리얼리즘에 입각해 견디기 어려운 사실을 보여주여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적으로 연출된 것이 많았다.
동시대인과 작가 자신의 정사성의 거리를 도외시한 채 .

* 연출되지 않은 사진은 베트남 전쟁때부터(p. 90)
(TV가 전쟁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매체가 되었기 때문)

 [4] 

- 사진 검열 하게 됨
- 보도 제한
- 1991년 걸프전쟁 미국관료들은 테크노 전쟁의 이미지를 그려내려함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
-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음

정부의 통제와 자기 검열 때문에 전쟁 현장에 제한적으로만 접근할 수밖에 없는 텔레비전은 전쟁을 일련의 이미지로 다룬다. 전쟁 자체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진 채,  가령 곧바로 중계되는 정보와 시각화 기술을 기초로 해 본토에서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을 고를 수 있는 폭격 등을 통해서 수행된다. 미국은 플로리다의 탬파에 위치한 중앙본부에서 2001년 말부터 2002년 초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매일 벌어진 폭격 작전을 지휘됐다. 이 작전의 목표는 적군의 공격으로 아군이 사망할 여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될 수 있는 한 충분할 만큼 적군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운송수단 상의 사고나 아군에 대한 오발'로 죽은 미국과 동맹국의 병사들은 (이 완곡어법이 뜻하는 바대로) 사상자 수에 포함되기도 했고, 안 되기도 했다.(pp.104-105) 

- 아시아나, 아프리카등에서 벌어진 전쟁의 사진만이 다루어 질뿐
- 유럽땅에서 벌어진 다양한 살육과 전쟁 사진은 다루지 않음

 [5] 

- 현대의 희망, 윤리적 감수성에 중심이 되는 것은 비록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은 탈선이며, 비록 얻기 어렵긴 하지만 평화는 규범이라는 확신이다.

- 사진을 검열 하게 됨/ 보도 제한
- 1991년 걸프전쟁 미국관료들은 테크노 전쟁의 이미지를 구현하려함

-  살가도의 사진에 찍힌 사람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것은  그사람을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본보기로 환원하는 것

오직 유명인들만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을 그들의 직업, 인종, 곤경을 상징하는 일종의 본보기로 환원하는 셈이되는 것이다. 39개국에서 이주민들의 모습을 찍은 살가도의 사진은 이런 단일한 방향 아래에서, 그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상이한 고난과 그 고난을 불러온 상이한 원인을 한데 뭉그러뜨려 버린다.

어떤 고통을 전 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 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지만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는 구체적인 것이다(확실히, 역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까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101 


- 사진은 대상화 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버린다.그리고 사진은 일종의 연금술로서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준다고 높이 평가받는다.(p.125) k
- 공포스러운 사진을 보면 충격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 사진은 사실을 오도한다
ex) 집단수용소의 본질은 체계적으로 말살한 뒤 곧바로 소각했던 것인데
시체무더기, 피골이 상접한 생존자들은 수용소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다.(p.129)

- 어떤 사진이 자아내는 친숙함은, 현재 그리고 얼마 안 된 과거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을 형성해 놓는다. 사진은[감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일종의 참조점을 규정해 놓으며, 그 판단의 근거를 나타내는 일종의 토템 기능을 한다. 말로 된 표어보다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정서를 훨씬 더 구체화 하는 것이다.- 기억하기
( 그러나 사진을 찍은 사람이 찍은 대상, 방식, 기념관을 만든 사람이 만든 방식에 따라 기억하게 된다.) 
- 시간이 지날 수록 기억한다는 것이 곧= 사진을 떠올린다는 것이 되어 버림
- 그러나 사진이 우리가 기억해야할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p.137)

- 1930년대 린치당한 토머스 쉽과 에이브럼 스미스 - 린치당한 흑인 희생자의 사진
- 이런 사진들이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영속화 하지 않을까(p/141)
- 그러나 (희생당한 흑인 희쟁자를 보러 갔던) 미국인들은 원자탄에 맞은 희생자들이나 베트남 전쟁의 민간인 희생자를 보려고 전시 회에 가지는 않을 것


 [6] 

- 공포스러운 사진은 관음증을 부추김
- 안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력감과 공포의 표현일 수도
- 연민의 감정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가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길 수 있는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동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pp.153-154)


 [7] 

- 대중매체가 주목하는 것을 대중들도 주목한다는 사고방식
- 이미지로 뒤덮인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중요한 무엇인가의 영향력이 점점 떨어져 간다는 사고방식- 무감각해진다는 것
- 자주 보여주는 이미지에 싫증 나게 마련

『사진에 관하여』에 제시된 견해, 그러니까 상스럽고 소름이 돋을만한 이미지가 무차별로 확산된다면 윤리를 지켜나가며 생생한 감수성으로 각각의 경험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약화될것이라는 견해는, 이런 이미지의 확산을 보수적으로 비판한 견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주장이 보수적일지도 모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이런 이미지가 확산될 경우에 손상된다고 봤던 것은 바로 현실감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리 현실의 위신을 약화시키려 해도 그런 시도에서 벗어나는 현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봤던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주장은 사실상 현실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며, 현실을 훨씬 더 철저히 설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저 그런 흔해빠진 주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손택의 관찰에 따르면, 시방팔방이 폭력이나 잔혹함을 보여주는 이미지들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해 버린다. 타인의 고통이 '하룻밤의 진부한 유흥거리' 가 된다면, 사람들은 타인이 겪었던 것 같은 고통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도 그 참상에 정통해지고, 진지해질 수 있는 가능성마저 비웃게 된다는 것이다.

- 현실적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봄- 모든 사람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 사라예보 주민들은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잔악행위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잔악행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반발함


 [8]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p.167)

타인의 괴로움을 보면 외면해버릴 수 있다.

뒤로 물러선 채 사색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옛 선인들의 말을 빌려보자면, "뭔가 곰곰이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누군가를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경사져 구부러진 길을 따라 사진 속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그들도 군인인 듯한데, 그들의 발 주변에 소련제 칼라시니코브 경기관총이 모여져 있는 걸로 봐서, 진작에 죽은 병사들을 뒤져 무기를 빼온 듯하다. 이 사진 속의죽은 병사들은 놀랄 만큼 살아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들, 자신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 즉 우리에게 말이다. 그렇지만 왜 그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꼭 들려줘야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말해준다 해도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수 없다.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며,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상황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리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전쟁이 벌어지던바로 그때에 포화 속에 갇혔으나 운 좋게도 주변 사람들을 쓰러뜨린 죽음에서 벗어난 모든 군인들, 모든 언론인들, 모든 부역 노동자들, 독자적인 모든 관찰자들이 절절히 공감하는 바가 바로 이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


부록

1. 문학은 자유이다
Peace Prize of the German Book Trade 2003 2
Susan Sontag Acceptance speech

문학의 임무 중 하나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겁니다. 그리고 뭔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조차도 예술은 자연스럽게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문학은 대화이자 응답입니다. 문화가 발달하고 각 문화가 상호 작용함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과 죽어 가는 것을 향해 인간이 보여준 반응의 역사가 곧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One task of literature is to formulate questions and construct counter-statements to the reigning pieties. And even when art is not oppositional, the arts gravitate toward contrariness. Literature is dialogue; responsiveness. Literature might be described as the history of human responsiveness to what is alive and what is moribund as cultures evolve and interact with one another.  

Writers can do something to combat these clichés of our separateness, our difference – for writers are makers, not just transmitters, of myths. Literature offers not only myths but counter-myths, just as life offers counter-experiences – experiences that confound what you thought you thought, or felt, or believed. A writer, I think, is someone who pays attention to the world. That means trying to understand, take in, connect with, what wickedness human beings are capable of; and not being corrupted – made cynical, superficial – by this uderstanding. 


,,,,

문학은 이 세계가 어떠한지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습니다. 

문학은 언어와 서사를 통해서 기준을 제시하고 깊은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뭔가를 배울 능력이 없다면, 용서할 능력이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인간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p.208)

Literature can tell us what the world is like.  

Literature can give standards and pass on deep knowledge, incarnated in language, in narrative.  Literature can train, and exercise, our ability to weep for those who are not us or ours. 

Who would we be if we could not sympathize with those who are not us or ours? Who would we be if we could not forget ourselves, at least some of the time? Who would we be if we could not learn? Forgive? Become something other than we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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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p.114) 


Access to literature, world literature, was escaping the prison of national vanity, of philistinism, of compulsory provincialism, of inane schooling, of imperfect destinies and bad luck. Literature was the passport to enter a larger life; that is, the zone of freedom. Literature was freedom. Especially in a time in which the values of reading and inwardness are so strenuously challenged, literature is freedom.



출처 : https://www.friedenspreis-des-deutschen-buchhandels.de/sixcms/media.php/1290/2003%20Acceptance%20Speech%20Susan%20Sontag.pdf

2. 현실의 전투, 공허한 은유

3.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4.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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