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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

by 책이랑 2019. 12. 10.


특권 - 10점
셰이머스 라만 칸 지음, 강예은 옮김/후마니타스


"특권이라뇨? 능력이죠!"는 어딘가 낯이 익다. 위장하는 특권, 숨는 가난 앞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노력으로 얻은 능력은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된다. 이들의 의식 속에서 특권은 뒤로 숨는다. 전면에 나와 있는 것은 능력이다. 가난도 특권도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왜 누구는 이런 학교에 들어오는 게 당연한데, 누구는 죽도록 노력해 성취해야 하는 일이 되는가? 왜 어떤 애들은 학교생활이 너무 편하고 쉬운데, 어떤 애들에겐 악전고투해야 하는 일이 될까? 왜 이런 엘리트 학교의 대다수는 여전히 부잣집 애들인가? 이들은 어떻게 기존의 특권을 그대로 수호하면서도 타고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능력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걸까?”

저자가 발견한 새로운 엘리트들의 모습은 “집안의 재력만 믿고 쉽게 사는 특권 의식에 젖은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위계를 보존하되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특권의 기술, 즉 ‘편안함’을 체화한 모양새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미국 시민과 전혀 다를 것 없어 보인다.

35쪽: “여전히 세인트폴은 이미 엘리트인 이들을 위한 곳

P. 79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베커의 희망적인 비전은 오늘날 점점 더 틀린 것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즉,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으며, 어쩌면 아들은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아버지한테서 받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것을 “계급”의 영향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부모의 출발점이 자녀의 도착점을 말해 주는 훌륭한 지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개방성이 평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엘리트 기관들에서 흑인과 여성은 모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우리는 이것을 ‘평등’의 지표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상위층의 소득 증가를 분석해 보면 오히려 불평등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다. 지난 4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소득은 25퍼센트 증가했지만, 상위 5퍼센트의 가계소득은 68퍼센트 증가했으며, 상위 1퍼센트는 323퍼센트, 최상위 0.1퍼센트는 492퍼센트 증가했다. 게다가 그 어느 때보다 소외계층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는 하버드 대학에서 ‘중간 소득’ 구간에 위치한 학생들은 미국 사회 전체로 놓고 보면 상위 5퍼센트 소득 수준에 해당한다. 이렇게 (인종적·문화적) 개방성은 증가한 듯하지만 실은 계급적으로 더 불평등해진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엘리트 기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소외계층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왜 그 어느 때보다 부와 권력의 세습은 심해진 것처럼 보이는가? 그런데도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이런 세습을 능력주의로 포장하고 있는가?

저자는 바로 그 해답을 이들의 학교생활에서 찾는다.


개인이 사다리에서 자신보다 위/아래 있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위계는 보이지 않게 되고, 그 사다리 위에서 성취하는 것들이 온전한 자기 노력의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P. 189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학생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들”과 나머지 세상 사람들 간의 차별점을 모호하게 하는지를 반복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대부분의 미국 십대들과 다른 점은 분명 무수히 많을 것이다. 사는 집에서부터 겨울 방학 동안 스키 타러 가는 곳, 또 여름방학 때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인턴십 기회들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부유한 삶의 치장들 가운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일은 없었다. 해리슨의 셔츠론은 그를 포함해 다른 그 누구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이는 몇 주가 지나자 신입생들도 한 가지 단순한 진리를 반복해서 배우고 깨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남들과 다른 이유는 셔츠 때문이 아니라는 것 말이다. 

대신에 그들은 문화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며 더없이 자유롭게 소비하는 법을 배운다. 그 모든 것을 흡수하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흡수하기를 원하도록 배우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나와 디엠엑스와 바이올린 기교 모두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부와 특정한 지식을 이용해서 경계를 형성하는 대신, 운동장은 평평하다는 걸 시사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몸에 걸친 셔츠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셔츠 안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P. 315 세인트폴에는 거의 100개에 달하는 공식 조직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비공식 조직이 존재한다. 학생이 고작 500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거의 모든 학생들이 (특히나 졸업반이 되는 해에는) 이런 그룹 중 하나를 운영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폭넓게 개설돼 있는 교과목들도 학생들에게 서로 다른 분과들에서 뛰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거의 무수한 선택지들을 통해 이 학교는 모든 학생이 어느 한 곳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접기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 자신과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마치 그 자체가 그들의 타고난 특성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더구나 외관상 평범함을 체화한 신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부를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들며 비엘리트들에게 “이건 내 능력 때문이지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 아니야. 너희들의 실패는 너희가 이런 사회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라는 서사를 튼튼히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책이 한국 사회 엘리트들의 구조 변동과 한국 엘리트들의 무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영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엘리트에 초점을 맞춘, 불평등에 대한 뛰어난 문화연구다. 이 용감한 책은 분명히 몇몇 사립학교 신탁자들과 관리자들,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심기를 건드릴 것이다. - 마이클 랭건 (『버팔로 뉴스』) 


성적도 평점이 아닌 범주로 매겨지기 때문에 수치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비리그 대학들과의 오랜 연줄. 학교 입시 담당자들은 입학시즌이면 “열심히 전화를 돌리”는데, 위와 같은 평가체계를 통해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만들어 낸 뒤 각 대학의 구미에 맞는 애들을 짝짓기 하는 것이 그들의 비결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학교는 어떤 엘리트들을 어떻게 키워 내고 있을까? 이 책의 해제에서 사회학자 엄기호는 미국 엘리트들의 구조 변동을 다룬 이 책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왜 ‘공정’이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공정’은 구엘리트들의 특권의식을 문제 삼는 신엘리트들의 무기이다.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공정 담론이다. 문제는 ‘공정’이 결과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능력주의와 결합한 한국에서의 공정 담론은 결과의 지나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시험을 통과하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특권이 생산되며 계속해서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상황에서도 이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20세기 불평등에 맞선 투쟁들은 대개 접근 기회를 놓고 벌어진 투쟁들이었다. 여성과 흑인 등이 최고 기관들과 최고 위치에 통합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투쟁들이었던 것. 그리고 이는 대부분 승리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기회뿐만 아니라 더 많은 평등에 대한 약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있어서는 허구로 드러났다. 이제는 이 역설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다음 질문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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