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역사 전우용 지음/푸른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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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월) 12-79쪽
31일 (화) 80-157쪽
4월 1일(수) 158-225쪽
2일(목) 226-296쪽
3일(금) 297-358쪽
4일(토) 359-427쪽
● 책머리에
- 68혁명 이후 역사학에서는 보통사람의 일상에 관한 역사인 미시사, 일상사, 생활사가 출현.
- 보통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 진화의 산물
- 역사를 보면 지금 내가 가진 욕망, 판단, 실천, 정체성의 기원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게 된다.
[1] 일차 ~72p.
1부 개인- 몸 / 외모 / 한국 남성의 몸/ 기생충 / 이름 / 도장
2부 가족과 의식주- 사랑과 연애 / 현모양처론 /
[1] 개인
[1]- 1_몸에 대한 시선의 역사
▶ 뚱뚱한 몸→ 유선형 몸
→ 미국, 유럽에서 몸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후 뚱뚱한 몸은 죄악시 됨
1915년 매일신보에 실린 화평당약방의 ‘자양환(滋陽丸)’ 광고. “복용하는 데 따라 건강을 증가하고 차차 비만강장케 됨은 이 약이 제일”이라는 문구가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쓰던 시절이라 진보·발전을 나타내는 화살표 방향도 왼쪽을 향했다.
[출처: 중앙일보]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비만, 자랑거리에서 조롱거리로
https://news.joins.com/article/4600928
▶ 다이어트는 1960년대말 출현
▶ 예수는 인류를 위해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고, 석가보니는 생노병사의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6년간 고행, 현대인은 자기 한몸을 위해 다이어트라는 이름의 단식과 고행을 하고 있다.(p.19)
[1]-2_유리거울, 외모 지상주의 시대의 서막을 열다
유리거울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남의 얼굴 보듯 꼼꼼히 뜯어볼 수 있게 됐다.
두창이 소멸하고 성형수술이 발달한 덕에 이제 ‘거울보기 괴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증자(曾子)는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 하여 수시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하루 세 번 이상 거울 앞에서 자기 외모를 살핀다. 이런 생활문화에서 외모지상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p.27)
[1]-3_한국 남성의 새로운 통과의례, 포경수술
▶ 포경수술은 한국에 오게 된 미군의 성병이 퍼지는 것을 예방하고
비뇨기과 의사들에게 경험을 주기 위한 것
▶ 의학적 효용 뿐 아니라, 전쟁후 만들어진 신분관념
정상, 표준이 되고자 하는 강박관념 균질화의 욕구를 반영
[1]-4_기생충 박멸운동의 역사
▶화학비료의 사용, 수도의 보급 등이 기생충 감염율에 영향을 주는 요소
기생충 박멸은 지난 반세기의 한국 역사가 이루어 낸 눈부신 성취중 하나다. 중국산 배추가 다량 수입되고 보니 기생충을 걱정하는 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이제 국내에서 장내 기생충이 다시 확산될 가능성은 아주 작아 보인다. 인간은 수천 년, 혹은 수만 년간 기생충이 든 몸을 당연하게 여기면 살았다. 그러나 기생충이 없는 몸을 지킬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현대인들은, 기생충이 든 몸 전체를 혐오한다.(p.42)
1950년대의 떠돌이 약장수. 50년대까지 주로 ‘만병통치약’이나 ‘정력제’를 판매하던 약장수들도 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구충제’를 집중적으로 팔았다. 이들은 구경 나온 어린이들 중에서 ‘협조자’를 구해 구충제 복용의 즉각적인 효과를 시연(試演)하기도 했다. [사진 : 『서울 20세기-100년의 사진기록』]
재산이 인간의 평가기준으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점점 더 물질화되고 기계화되고 마음을 돌보지 않는 몸 중심이 되고 있다.”
[1]-5_가문에서 개인으로, 이름 석 자에 담긴 역사성과 사회성
▶ 이름은 개인의 독자성을 나태내지 못했슴, 성씨+돌림자 + 나머지 한 자이기에.
▶ 1909년 민적법으로 절대다수의 한국인이 세글자 이름을 갖게 됨
▶ 창씨개명시대와 박정희 정권의 '관제 민족주의' , 민중민족주의 시대, 부모성 같이 쓰기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은, 이름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책임 의식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 세대 사이에 이름에서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우고 개성만 남기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이름의 무게는 오히려 가벼워졌다.(p.49)
[1]-6_태초에 도장이 있었다
▶ 도장은 권위를 표상 - 단군신화의 천부인, 진시황이 만든 전국새 등
▶ '계약'에 필요하게 됨. - 1876년 조일 수호조규체결, 1882년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
▶인신: 도장에 익숙한 일본인과 중국인이 신용을 표시하는 도장을 요구함
▶도장과 인격체 사이의 1:1 대응 관계 형성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 <토지가옥전당집행규칙> 제정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어 마음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칼을 대서 얼굴을 바꾼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자기 몸을 괴롭혀가면서 인류를 구원시키기 위해 고행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이어트와 건강을 위해 고행을 한다. 헬스클럽은 고행의 장소다. 내면보다 신체에 집중하고, 인간은 물화된 존재가 되고 있다. 또 사람을 규정하는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다. 예전엔 이름 석 자가 사람을 규정하는 정체성이었다. 거기서도 성은 조상으로 물려받고, 중간은 돌림자, 자기 것은 한 글자였다. 요즘은 성도 부모 성을 같이 쓰는 등 이름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몫이 커졌다. 재산이 인간의 평가기준으로,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인간이 점점 더 물질화되고 기계화되고 마음을 돌보지 않는 몸 중심이 되고 있다.”
2부 가족 /의식주
[2]-1_낯설어라 사랑, 낯뜨거워라 연애
▶ 근대이전의 사랑은 결혼의 전제도 아니었고, 결혼관계 지속의 필수요소도 아니었다.(69)
근래 연애 전 단계를 의미하는 '썸타다' 신조어가 출현한 것도 사랑이라는 감성이 더 정교하게 세분화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p.72)
1962년 세창서관판 『장한몽』의 표지. 『장한몽』은 ‘사랑과 돈, 주인공 사이의 삼각 관계’라는 현대적 연애 콘텐트의 기본을 갖추고 있었기에 여러차례 중간(重刊)됐다. 돈은 근대 연애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마주친 가장 강력한 천적(天敵)이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지금도 수많은 콘텐트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순수한 사랑’들을 파탄시키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연애’의 탄생
[2] 2_현모양처론, 메이지 시대의 이데올로기
▶ 우리나라는 지폐도상으로는 '유교국가' 로 볼수도 ^^;;
: 세종대왕 (1397), 이순신 (1545) (150년의 시간대에 집중됨)
▶ 5만원권인물인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의 이상적인 여성성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사실 이는 맞지 않는 것, 유교적 여성상은 삼종지도(순종, 독립적 사유 배격) 이기 때문
다만 신사임당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윤회봉사(輪廻奉祀),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풍속을 따라 살았슴
메이지 일본의 '양처현모'론 탄생의 맥락
http://has.hallym.ac.kr:8001/Upload/ades_study_data/02%20%EA%B0%9C%EB%85%90%EA%B3%BC%EC%86%8C%ED%86%B522_%ED%8A%B9%EC%A7%91_%EC%9D%B4%EC%83%88%EB%B4%84_DOI_10.pdf
* 한국에서는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모델로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도 현모양처의 용례는 발견되지 않는다. 신사임당이 현모양처로 상징되는 등의 담론
이 형성되는 식민지시기의 과정에 주목한 연구로는 홍양희, 2016, 「‘현모양처’의 상징, 신사임
당:식민지시기 신사임당의 재현과 젠더정치학」, 사학연구 제122호, 155~190쪽 참조.
* 신사임당의 집안도 모계 가족의 재산을 계속 상계하였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부인과 외할머니 최씨부인은 다 외동딸이고 집안 재산도 많아서 결혼 후에
친정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집안은 3 대 째 처가살이를 하였다. 이는
친영례나 장자장속 같은 성리학적 규범과 제도가 자리잡기 이전인 16 세기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사임당의
가족사는 당시로서도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한다.
http://congress.aks.ac.kr/korean/files/2_1357543061.pdf
▶ 현모양처는 - 메이지 유신때 도입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으로서
성인 남성은 가정이탈하여 신민이 되고+ 빈곳은 여성의 헌신이 메꾸는 가치관임
but 두 세계관은 남성의 눈으로 여성을 규정하는 것에서는 일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글항아리
제2부 조선 여성, 그 삶의 현장
7장 여성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나
- 상식과 다른 조선의 혼인과 제사 규칙 | 김미영·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과거 제사상에는 성차별이 없었다.
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80227975&nidx=27976
2018-02-13 주간조선
- 조선 전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윤회봉사(輪廻奉祀), 외손봉사(外孫奉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외손봉사에서는 장녀(長女), 차녀(次女)를 가리지 않고 형편이 되는 사람이 물려받는 방식이었슴.
-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는데 이를 바로잡기 위해 조선에서 활용한 것이 성리학적 질서. 국가는 왕에서 양반과 평민으로 이어지는 질서를, 가정은 종갓집에서 가장과 아들로 이어지는 가부장적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안정적으로 통치하려고 했다. 고려 말에 유입된 성리학이 17~18세기에 이르며이론적으로 심화됐다는 것도 성리학적 가부장제가 조선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는 데 한몫을 했다.
- 조선 후기부터 지배계층의 필요에 맞게 조선 후기의 제례,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가부장적 이념 때문에 변형됨.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리 잡음
[2] 3_서자와 양자의 분쟁사
대를 잇기 위한 양자제도가 되레 가족관계를 망치다
▶ 19세기의 제사 장면. 서자는 장남이라도 제주(祭主)가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유산 상속은 제사 상속에 따라붙는 권리였다. 적자(嫡子)가 제사를 통해 가계(家系)를 잇는다는 믿음은 서자를 배제하고 양자를 들이는 풍습을 만들어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양자로 들인 뒤 그자식에게 대를 잇게 하는 백골 양자, 대를 이을 손자를 낳아줄때까지만 양자 구실을 하는 차양자 등 양자의 종류도 많았다. [그림: 기산풍속도(캐나다 왕립온타리오박물관 소장)]
[2] 4_장보기, 남자들의 바깥일에서 여자들의 집안일로
장보기 낙산아래 여인시장
but. 여인시장 - 단종의 비 송씨의 전설 - 자주동천 등
https://pynce43.tistory.com/86
① 내외구별 여성은 볼수 없슴
- 남자들 이 단종의 처 송씨 (동대문, 동망봉. 청룡사) 자지동천 一一 유:관
남대문시장 (1897년 선혜청 창고자리)
② 신분제의 변화, 실업자양산
③ 1920.4 동아부인상회 (종로네거리) 여성전용 , 1925.9 여성전용 철폐
④ 한국전쟁
⑤ 대형할인점 등장
[2] 5_가족을 ‘관객’으로 만든 TV
▶ TV는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향하던 시선을 독점했고 ‘소통의 의제’를 제약 BUT 온 가족을 일정 시간 동안 같은 ‘감성’으로 묶어두는 데는 성공함
- 각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따로 보는 시대에, 가족 공동체의 모습은?
1970년께 한 가정집 안방의 TV 수상기. 가족 구성원 전부에 이웃집 식구까지 TV 앞에 모여 앉아 있지만, 시선은 한 방향이다. TV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지 않고 대화하는 ‘기술’을 익혔고,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켰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출처: 중앙일보]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안방 차지한 TV 수상기, 가족 관계를 바꾸다
[2] 6_‘쌀밥에 고깃국’, 천년의 소원
▶ 기원전 2000년 재배 시작 기원전 1000년 주식이 됨
- 충족되지 않는 주곡
▶ 일본 1차 대전후 쌀값이 폭등하자 산미증식계획을 세워 증산을 추진
이후 수리조합비에 대한 부담으로 소작농이 되는 농민이 많았다.
- 해방후 미국 잉여농산물 도입, 인위적 저곡가 정책, 생산량< 소비량
- 쌀밥에 대한 열망은 1970년대 말에야 수그러 듦
[2] 7_담배 냄새가 ‘향香’이던 시절
담배 ‘향기’의 마지막 쓸모는 냄새 나는 변소와 함께 사라졌다. 한국에서 재래식 변소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 직후에 공중화장실 흡연이 금지 되었다. 이제 담배 냄새는 세상에서 축출해야 할 첫 번째 악취처럼 취급된다. 담배 냄새의 위상이 이토록 급전직하한 것은 현대 한국인이 생활공간에서 '냄새' 일반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하나의 증표다.(P.122)
[2] 8_가짜 양주에서 폭탄주까지
▶ 1956년 국제양조장- 국산위스키 개발 (산토리사 토리스, 도리스, 도라지)
메틸알콜+싸구려 향료로 된 술
한국전쟁 하비 펠프스- 에틸알콜+ 주사용 포도당 +비타민 정제
국산양주가 나오고,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외국산 위스키를 자주 접하게 됨
한국은 세계 제1의 프리미엄 위스키 소비시장
[2] 9_목숨과 바꾼 온기, 연탄
▶ 땔나무를 때던 한양 도성 -
땔나무 영업을 하던 최순영, 프랑스인 안톤 프레상 , 부래상도 땔나무 도매업을 함
▶해고당한 군인들이 은급금을 모아 땔나무ㅎ뵈사를 만듦
▶ 1920년대 중 석탄이 보급됨,
▶1950년 전쟁때 신탄채벌금지, 연탄 공급(미국의 조언)
임시 수도가 된 부산, 신탄채벌금지, 난방연료가 연탄으로 바뀜
1975년 새마을 보일러
20년 후 경유, LPG, LNG로 바뀜
[2] 10_과거사가 된 ‘셋방살이 설움’
▶ 1905년 러일전쟁 후, 수많은 일본인이 한국으로 들어옴, 주택난 발생
- 1908년 한성부 세입자 보호조치인 <세거규칙> 발표
- 가족 vs. 식구( 거느린 노비는 식구, 남의 집 양자간 친아들은 식구
- 인구가 많던 서울은 셋집은 있었어도 셋방은 없었는데
을사늑약후 "셋방"이 생김
- 행랑살이와 셋방살이는 비슷
- 집없는 설움, 셋방살이 설움은 한국 현대 도시문화를 설명하는 키워드
[2] 11_375칸짜리 ‘장안 제일가’와 옥인동 아방궁
▶고종 생모 민씨의 조카 민영주 375칸 넘는 집- 박영효- 통감부가 김용달에게 매각
▶조동윤-윤치소, 윤보선가
▶백인제 가옥
이완용의 조카인 한상룡- 백두산 흑송등을 이용해 현대적인 저택을 지음
▶청년사업가 최선익이 구입-
주인의 품성이 집의 이미지를 규정(p.154)
▶철종의 친영 영평군 이경응의 집- 종로구 익선동
윤덕영의 집- 향락의 공간이라 아방궁으로 불림
3부 직업과 경제생활
[3] 1_천직? 평생직장? 그 아련한 추억
▶ 중세사회의 천직개념이 산업화 사회에서는 허물어짐
하루벌어 하루 사는 사람 vs. 월급쟁이
▶ 평생직장 개념은 1950년대
▶1997년 외환위기 안정된 직장, 정규직 이 없어짐
평생직장이 없어짐에 따라 자기 정체성이 사라지게 되는 위기가 커짐
2_‘정경유착’과 ‘가족 같은 회사’의 민낯
▶ '회사원' 이라는 단어의 유래
한성순보의 회사설 이라는 논설에서 개념이 소개됨
회사 이전에도 상단이 있다.
▶임란, 호란 후 과잉인구가 상업에 투신하게 됨
정부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인정함
도성밖 교통요지에 근교농어민의 상품을 매집해 파는 객주가 생김
도고상업체제 - 궁방, 군문들은 유력객주에게 독점권을 보장하고 이익을 나누어 갖는 체재를
구축함
객주는 위탁판매업을 하게,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궁방, 군문의 힘을 빌림
독점하는 사상도고, 유문도고들이 생겨남
▶ 통리아문이 일괄적으로 세금을 걷게 되자 상인들이 회사라는 상업결사체를 만들고 장사하는 조직울들에게 '사원'이라는 증명서를 발급함- >중앙조직이 보호하는 상인조직(p. 173)
초창기의 회사원은 출자자나 주주라는 뜻이었슴- 나머지는 고원이나 용원
사원의 이름이 중역이 되자 사무직과 영업직 고용인이 회사원이라는 이름을 차지함
▶1960년대 중반이 후 압축성장과 더불어 인구다수가 회사원이 됨
공동체적 의식이 아닌, 가부장제 윤리 사원은 가부장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복종
▶1977 외환위기와 함께 온 신자유주의 문화 - 회사원간의 공동체 의식 파괴
야만적인 기업문화- 사원은 고용인일 뿐
3_위세의 상징, 가마에서 인력거로
"차라리 금강산 중 노릇을 하지"
▶ 백성들의 의무- 군역과 요역
요역중에 힘든 것이 고역- 노젓기, 봉수군역, 말기르는 일, "금강산 중노릇", 가마꾼
1883년(1869년 일본에서 만들어짐) 인력거 등장
인력거꾼은 구한국 병정들의 인생 막장 직업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해도 되는 일, 하는 게 오히려 편한 일에 굳이 남을 부리면서 위세를 드드러내려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아마 자율주행 자동차가 일반화한다해도, 남의 힘으로 이동하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시대는 그런 문화가 사라져야 열릴 것이다"(p.186)
4_몸 고생에 마음 고생
- 17~18세기 생산기술의 증대로 '노동할 기회를 잃은 사람들'이 유랑민이 되어 도성으로 옴
▶ 급가모립 給價募立- 조선 후기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주고 남에게 자기 역(役)을 대신 시키는 것
- 몇몇역은 조선시대 직종별 조직된 도중에서 도맡아 하게 됨 , ex) 장빙역이→ 장빙업이
- 1950 년대 말까지 한강의 장빙업이 성행함
-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만으로도 이미 서럽다. 그런데도 이런 일자리들은 거의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800만 시대에, 이들은 수시로 해고당하고 동종의 정규직에게까지 멸시당한다. 이미 서러운 사람들 가슴에 또 대못을 박는 것은, 오래되었지만 속히 청산해야 할 문화다.(p.193)
5_침모, 식모, 파출부, 가사도우미
왼손을 사용하여 돈을집은 양반, 오른쪽 소매에 넣어두어 '소매치기'
▶남자의 일당이 1원일때 침모의 한달 보수는 5원- 옛날의 비婢만도 못함
재봉틀이 보급되면서 1930년대 식모로 바뀜
삼순이-공순이 , 차순이, 식순이
▶ 가사노동의 기계화
근래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뺏앗을 것이라는 공포가 확산하고 있으나, 일부 직종 종사자들은 그런 공포가 현실화 하는 과정을 이미 겪었다. 기계가 할 일을 인간에게 시키면서 인간을기계처럼 대해 온 문화를 바꾸는 것이, 이 공포에 대처하는 옳은 방법일 것이다.(p.207)
6_‘구멍가게’에서 슈퍼마켓으로
▶ 임란후 공물을 미곡과 포로 대납하는 대동법이 시행된 후로 교환을 담당하는 상인인 공인이 생김, 5일장 체제, 보부상 출현, 포구에서 상거래, 객주 출현
- 상업의 발달
▶ 18세기 이후 경화사족+유민+훈련도감 상주인구가 증가
- 전국의 화물+ 근교 농작물
- 신해통공, 정조가 금난전권의 폐지함
▶ 1895년 종로의 가가를 철거하고, 선혜청 창고를 내줌- 남대문시장, 구멍가게
영업자유의 원칙도, 소비자의 권리도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왕조시대에도 가난한 상인의 생계수단을 뺏는 일은 하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의 기본은 '불인지심. 즉 할수 있어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7_외식시대를 개척한 음식, 탕수육과 짜장면
▶ 산둥성의 향토요리 한국화한 짜장면, 나가사키 짬뽕, 영국인 주인의 불만을 누그려 뜨렸던 탕수육
- 한국인들은 일상 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유럽 제국주의에 적응하는 방법을 중국인들로부터 배웠다. 중국인들이 경영한 이발소, 양복점, 양화점 등은 한국인들에게 신문물과 신생활을 판매하는시설이었다. 중국 음식점역시 그런 시설중의 하나였고, 많은 한국인 들이 중국음식점에 출입하면서 현대적 외식문화에 익숙해졌다.(p.225)
8_‘소 보험’에서 ‘암 보험’까지, 시대의 불안감
각 공동체의 이름과 구성방식은 달랐으나 기본 자산은 모두 연대의식과 측은지심, 즉 인정이었다. 중세까지는 인정이 곧보험이었다. 재난을 당하면 낭의 인정에 기대야 했고, 남의 인정을 받으려면 자기도 인정을 베풀어야 했다.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파괴하고 핵심구성요소였던 인정을 부차화했다. 농촌 공동체를 구성한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시에서 자본과 1대1 계약관계를 맺었다. 농촌 마을과 달리 도시 직장은 평생을 담는 공간이 아니었으며 인간관계는 파편화, 분산화했다. 동업자들 사이의 관계는 연대의식보다 경쟁의식이 더 강하게 지배했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경제단위들을 양산했다. 한 기업의 몰락이 특정 산업분야, 나아가 새회전체의 안정까지 흔들 수 있는 상황이 도래했다.
9_망한 나라의 99칸 대가大家, 여관이 되다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51일간 160만 , 전체인구의 15% 상경
99칸짜리 명문대가를 사들였던 사람들이 여관 영업을 신청
4부 공간과 정치
1_서울을 바꾼 ‘황제어극 40년 망육순 칭경 기념예식’
▶ 한달간의 시차를 두고 건립된 독립문 vs. 원구단 장소성을 전복할 의도로 건립됨
독립문:독립국임을 선포 vs. 원구단: 유일한 천하의 중심임을 표상
▶대외적으로는 근대적 문명국가 자격을 알리기 위해 신문물과 제도가 필요함
동시에 황제가 유불도 종교를 아우르는 존재라는 상징을 위해 -이씨왕실의 조상을 신격화, 조상을 불교사찰창건, 도교의 관우 묘 건립
▶ 서구적 기준의 문명에 합당함을 보여줄 국제행사인 칭경예식를 준비했으나 무산됨
-경운궁, 경희궁 정비, 서울 시내 도로 정비사업, 1898 황제 전액출자로 한성전기회사 설립,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뒤 새로 지은 서양식 고층 건물들은, 공교로울 정도로 황제가 집중했던 지역 ('종로')에 집중되어 있슴.
▶일제는 유사 이래 최초의 국제행사로 기획되었던 '황제 망육순 어극 40년 칭경예식'과 이 행사에 대비한 황도 건설사업의 차취를 의도적으로 훼손, 파괴했고, 더불어 이 사업의 성과에 관한 한국인들의 기억도 흐릿해졌다.
2_한양도성, 유물이 된 서울사람의 정체성
▶도시는 통치기능을 담당한 시설이 집중되는 특별한 공간
도- 모든 기능을 다 갖추었다는 뜻
시-교환이 이루어지는 공간
3_일제가 독립문을 보존한 이유
▶ 도시는 권력적인 공간, 권력만이 공간을 조작하고 건물과 건물사이의 위계를 설정 할 수 있다. ex) 성소피아 성당 맞은편 1.5배 크기의 블루모스크
▶독립문은 일제에게는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건축물이 될 수 있기에 철거하지 않음.
▶독립-서대문감옥과의 연상작용
▶ 경복궁 경운궁 vs. 조선청독부, 경성부 청사
원구단, 황궁우만 남긴채 그자리에 철도호텔짓기 / 도성의 정문인 남대문 앞에 경성역 짓기
장충단에 유곽설치 /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 자손이 번창할 길지라 칭해졌던 정도전의 집터를 '사복시'로 바꾼 태종, 일제강점기에 기마경찰대가 됨, 리마빌딩
▶대한제국 역시 영은문을 독립문으로,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남별궁자리에 원구단,
▶공간정치- 건조물이나 시설물 사이의 대비, 용도변경, 개조를 통한 상징성의 전복, 이질적인 건조물 사이의 연상작용 유발
▶관념의 공간- 세상을 인지하는 기본단위인 개념 왜곡
ex) 평화, 인권, 복지, 평등- 종북과 연결시키는 행위 의도를 간파해야
4_무방비 도시, 서울
▶45년 봄에는 일제는 서울에 소이탄이 투하될 때를 대비해 민가를 마구잡이로 철거하고 곳곳에 소개 지대를 만들었다. 그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이 지금 세운상가가 서 있는 종묘 앞에서 남산에 이르는 폭 50m의 소개도로
▶해방이후 판자촌, 사창가, 우범지대가 됨->'나비작전' 철거후 세운상가가 지어짐, 공원용지
▶1950년 7월 미군의 서울폭격- 우물로 식수를 해결함
▶1969년 서울 요새화 계획
▶그러나 지금의 서울은 전쟁시 피할 방공호도, 식수도 해결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임
5_영생불사의 동상으로 거듭난 위인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내내, 정권의 불이에 항거한 시민들은 이 자리를 '점거'하려고 애썼다.(p.330)
▶현재 세종로는 세종대왕과 충무공이 '분할통치'중
▶ 동상을 이용한 '공간정치'와 '국민교육'
6_교통신호기, 인간을 지휘하는 기계의 출현
▶남대문로에 최초로 전기교통신호기가 세워짐- 일본인 수사와 조선인 행인의 몸싸움이나 감정싸움이 없어짐
▶현대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단조롭고 반복적인 기계의 움직임에 동작을 맞춰온 사람들이다.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란, 사람들의 행위와 의식 속에 자리 잡은 기계적 속성이 지금보다 훨씨 커진 시대에 불과할 수도 있다. (p.337)
7_불신받는 국가의 얼굴, 경찰
▶일제강점기 조선경찰의 60%는 일본 본토 경찰시험에 여러 번 떨어진 '자격 미달'인 사람들
무식, 해방후에도 이어짐
▶‘개나리’ 소리 듣던 일제 경찰…본토 시험 떨어진 ‘자격미달
▶다른 나라에 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외교관이나 국가대표 운동선수
자국민에 대해서는 경찰이 대표- 경찰이 폭력적이면 국민이 국가를 원망하고
무식하면 알아서 무식한 기준에 맞추게 됨
좋은 국가란 경찰이 양심을 지치키면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국가
8_참언과 예언에 혹하다
▶ 참언은 본래 어떤 집단의 불안감이나 염원을 현실의 개연성에 맞추고 글자나 숫자에 빗대 그럴싸하게 꾸민 것이니 공교롭게 맞으면 예언이 되고 틀리면 헛소문이 된다.
▶ 이성과 과학의 시대라는 현대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참언의 형식을 빈 모함과 저주
▶ 인간 이성의 한계로 인해 유사종교적 태도는 아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5부 가치관과 문화
1_해방 직후 대입시험의 ‘국어 소동’
▶ 경성대학 교수회, 해방 뒤 첫 입시에서 국어를 빼기로
▶ ‘조선어’는 1938년에 선택 과목이 됐고, 43년에는 아예 폐지 되어 국어를 제대로 배운 응시생이 없었던 것도 사실
2_식민지 백성의 덕목, 온순과 착실·박력과 추진력
▶조선 사대부들이 숭상한 가치는 '기개 ' 와 지조
▶‘박력(迫力)’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초반 등장한 신조어(新造語)가 등장하추진력이라는 말도 사람에게 쓰이기 시작했다.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뜻의 두 단어는 명령에 따라 물불 안 가리고 진격해야 하는 보병(步兵)에게나 어울리는 단어, 군사문화가 지속되면서 한국에서는 박력이 남성다움을 대표하는 가치가 됨
▶고등학생들을 숨지게 한 '박력', 지하에서 일하던 노동자를 사망하게 하는 '추진력'
▶우리가 숭상해 온 가치를 바꾸어야 한다.
3_빼앗긴 문화재, 갖다 바친 문화재
▶1920년대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우리의 서화 골동에 관심을 가졌고
1930년대 한국인이 인사동 골동품 상점의 새고객이 됨
▶ 일본 패망후 일본인이 남기고 간 물건들이 시장에 나오고 미국인들이 수집
▶1950년대~1970년
▶1965년 한일협정 체결 후,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문화제급 골동서화를 팔아 넘김
▶1970년 문화재법 개정, 밀수출
4_번역을 포기한 단어, ‘가방’과 ‘구두’
▶ 가방, 구두, president- 통령, 총령, 로맨스-낭만
▶최초의 번역은 혼돈의 세계와 결합하는 일, 자기 문화와 상대 문화 전체를 맞대면 시키는 일
▶한국인은 일본어 번역어를 거저 얻은 탓에, 자기 문화 전체를 성찰하고 구미문화 전반을 주체적으로 관찰할 기회를 잃음
사람은 단어로 세계를 인지하며 의식 속에서 재창조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개념과 물질의 종류는 단어의 수를 넘어서지 못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세계의 크기와 자국어 사전의 두께는 같다. 새 물질이 발견되거나 새 물건이 발명되면, 그에 대응하는 새 단어도 창조되어야 한다. 유럽인들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숱한 문물과 단어들을 창조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단어들에 합당한 이름을 우리 문화 속에서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당연히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요소가 늘어나는 만큼 정신세계가 풍요로워지지는 못했다.(p.379)
5_한국의 역제, 음?양력의 공존 이유
▶별의 움직임에서 신의 속성을 찾은 것은 그리스, 기독교가 같고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명을 지상에 펼치는 자'였다.
책력은 천자가 천명에 따라 인간 세상의 시간을 주재하기 위해 만든 신성한 책
▶1894년 음력 4월 13일 중국에 갔던 동지사의 노고를 치하했으나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기해 조선의 역제를 양력으로 바꾸고 연호를 건양으로 정함
유교지식인과 일반 백성들들은 일본의 역제를 따른다고 생각함
▶ 외국과의 교섭이 필요한 곳에는 양력, 의례와 명절은 음력으로 쓰게 함
▶일제 강점기에도 양력, 음력 모두 사용
- 일본은 음력 13월이 있는 1873년에 녹방지급을 하지 않기 위해 즉흥적으로 역제를 개혁함
- 일본은 음력을 야만의 표상으로 소멸시키려 애썼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저항의 일원으로 음력을 고수함
▶ 1980년대는 정부 스스로 음력설을 공인하였는데
-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국제적 보편이 한국적 특수를 압도하게 되어 지금은 음력이 지배하는 영역히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한국형' '한국적' 수식어도 음력과 비슷한 운명이 될런지도.
6_광고와 기사의 ‘동거’가 끼친 영향
▶ 신문 광고는 처음 개업 안내나 주주 모집 등 ‘사실’을 알리는 데 중점을 두었으나, 곧 신상품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함
▶ ‘사실’이 생명인 기사와 ‘과장’이 속성인 광고는 본래 서로 어울려서는 안 됐지만 부득이 한 지면에 공존
▶광고는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그림과 사진을 집어 넣어 직관에 호소하기도 했고 기사처럼 위장하기도 했다. 광고 기법은 기사 편집 기법보다 더 빨리 발전해서 차츰 기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옛 사람들은 “신문에서 봤다”는 말을 들으면 바로 의심을 거둬들였지만, 요즘 사람들은 기사에도 으레 꾸밈이 있으려니 생각한다. 기사가 광고와 한 지면에서 오래 동거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닮아버렸고, 독자들도 그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한때는 언론의 조유가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을 넓게 열어 줄 것이라고들 기대했다. 그러나 광고주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오늘날의 언론은,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일을 더 일심히 하는 듯하다.
7_명월관 기생과 ‘접대문화’
▶1910년대의 요리집의 복합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명월관은 1903년 9월 문을 연월루. 고종의 칭경예식 때 백성들이 즐길 연회장 용도였을 듯
(아마도 고관들의 '바지사장'인) 안순환이 개업
▶러일 전쟁이후 각종 이권은 부일 모리배인 일진화와 같은 곳에 넘어감, 송병준
고위 관리들이 일본일 장교를 초대하여 베푸는 연회가 자주 열림
1906년 궁중 내관과 나인들이 많이 쫒겨남
▶한 한국사 강사가 기생끼고 낮술 먹으며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고 한만을 아주 틀렸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맞다고 하기는 더욱 어렵다.
룸싸롱의 원조는 1920~1930년대 새로 출현한 빠와 요정이기 때문
▶“민족대표들이 룸살롱에서 기생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서명했다!”
첫째, 1919년 일제강점기 요릿집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모일 수 있던 유일한 장소
(요릿집은 3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던 유일한 민간시설)
둘째, 명월관이 있던 종로구 인사동의 별명은 ‘서울의 중앙’이었슴
개점부터 폐점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명월관이 표상하는 것들은 '신식과 개량' 에서 '조선다움' 으로, 다시 '퇴폐와 향락'으로 이동했다. 조선에 있던 것들을 개량 하여 조선에 일찍이 없던 것들을 만들었음에도 그것은 일본제국의 보편적 유흥문화와 구별되는 '조선다움의정수로 인식되었고, 이 새로운 조선다움'은 일본 제국이 조선을 규정한 시선에 부응하여 이윽고 '퇴폐 향락'과 결합되었다.(p.413)
8_외설의 상징, 복숭아
▶복숭아는 '생명'을 표상함
▶옛사람들이 복숭아를 생명의 상징으로 취급한 것은 복숭아에서 여성의 성기를 연상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성(性)은 신비롭고 신성했다. 성은 자연재해와 질병·전쟁으로 끊임없이 개체수가 줄어드는 인류를 유지시키고 번식시키는 유일한 힘이었다. 우리 옛말로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어르다’라 했는데, 거기에서 이미 어른 사람, 또는 어를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의 ‘어른’이라는 말이 나왔다. 새 생명을 만들 자격이 있는 ‘어른’만 사람으로 취급하는 문화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근래 인터넷을 통한 음란물 확산이 성범죄 증가의 주원인이라고 분석하는 사람이 많고, 정부 기관과 언론도 그런 주장을 수용하여 단속위주의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음란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주장이 사실이라면, 옛날 성범죄자는 대부분 부자들이었을 테고 지금감옥은 성범죄자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성범죄를 넘어성 산업 일반으로 시야를 넓힌다면 음란물의 확산과 성 산업의 변태화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건강한 성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억제되는 반면 '변태적 성에 관한 담론만 넘쳐나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과 창조를 중심으로 성에 관한 담론을 재구성하려는 노력도 필요할 듯하다.
9_‘묵은 빚’-100년 전의 제야 풍경, ‘묵은 빚’은 남기지 않았다 2012.12.28
해의 움직임이 완벽한 규칙성을 보이는 것은 1년 단위다. 우리 선조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해의 ‘수명’이 1년이라고 상정했다. 세상만물은 생로병사의 순환을 거쳐 수명을 다하기 마련이고 결코 지나간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니, 똑같은 순환 과정을 새로 시작하는 것은 ‘새 생명’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p.421)
▶묵은빚을 탕감 받는다는 것은 신용을 잃은 자가 되는 것
자기가 목숨으로 빚을 갚아야만, 자식이 새 빚을 얻어 장사를 할 수 있기 때문
▶대한제국 제정고문으로 파견된 메가타는 1905년 6월 전격적 화폐개혁을 단행함
1905년 제야에 많은 사람들이 채권자 집 앞에서 자살함
오늘날에도 신용불량자는 사회적 생명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이는 자연인에게 한정될 뿐이다. 자연인 이외에 법인이라는 신용의 주체가 생긴 뒤, 법인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신용을 사회적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다. 엄청난 나랏빚을 떼먹은 기업들이 도리어 ‘연말 상여금 잔치’를 벌이는 것이 그 방증이다.(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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