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흑석동의 이름은 무슨 뜻일까? 검은돌 이라는 뜻일까? 그게 아니라 물이 감아든다는 뜻일까? "흑석동(黑石洞)의 동명은 흑석동제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검은돌(黑石)」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고 되어 있는데 근거는 무엇일까?
Q2: 지금의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의 이름은 역사서에서 언제부터 발견할 수 있을까?
먼저 고전번역원이 운영하는 한국고전종합DB에서 "흑석리"라고 검색을 하면 두가지 결과가 눈에 띈다.
두가지 정도로 요약되는데
①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흑석리 와
② 흑석리계(黑石里契) 이다.
DB에 있는 자료가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실록 등이라 그런지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흑석리에 관한 기사가 제일 많다.
①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흑석리
- 왕조 건국을 기념하고자 세운 전각인 '준원전'(濬源殿)이 있는 곳
세종 25년(1443) 태조 어영(御影.임금의 초상)이 봉안됐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됨
영흥본궁(永興本宮)
조선시대사유적 북한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에 있는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관련 궁궐.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864
두번째 흑석리계(黑石里契) 이다. 함경북도가 아니라 한성부이기 때문에 주의깊게 봤다.
▶ ② 흑석리계(黑石里契)
- 흑석리계는 한성의 서부 서강방 성 밖에 있던 계로서 지금의 마포구 현석동(玄石洞) 지역이다
※ 조선시대 한성의 설치시 한성부는 5부 52방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 서강방은 한성부에 속한 지역은 아니지만 인구가 늘어났을 때에는 도성 바깥 10리 지역인 성저십리 지역에 둔 한성부 산하의 방이다. .
그렇다면 나의 고향 흑석동은? 조선시대에는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였으며 옛지도에서 보면 동작과 노량 사이에 두개의 산줄기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하북면(下北面) 흑석리(黑石里)에 속하던 곳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새로 조정하면서 이곳을 시흥군(始興郡) 북면(北面) 흑석리(黑石里)라 하였다.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할 때 흑석리는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경성부에 편입된 흑석리는 일본식 명칭인 흑석정(黑石町)으로 개칭되어 영등포출장소 관내에 있다가
1943년 경성부가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함으로써 영등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흑석동으로 개칭되어 우리 동명을 되찾았다.
1973년 흑석동은 영등포구로부터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을때 관악구에 이관되었다가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分區)될 때 흑석동은 신설된 동작구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
▶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수원이나 과천 방향으로 왕래하려면 노량진(露梁津)이나 한강도(漢江渡)를 이용하여야 하는데, 통행량이 많고 기찰(譏察)이 심하여 민간인들은 사선(私船)으로 운행되는 이 곳 흑석나루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태조(太祖) 4년(1395)에는 용산에서 충주에 이르는 사이에 7개소의 수참 (水站)을 설치하여 세곡운송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이곳에도 수참 을 설치하여 참선(站船)의 정박소로 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이곳에 참선 15척이 비치되어 있었다.
▶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 수참이 폐지되고 또한 인근에 동작진(銅雀津)이 개설되면서 이곳은 나루터의 기능을 잃어갔다. 광복 이후 한때 이곳은 조정경기훈련장이기도 하였다.
▶ 서달산 꼭대기(흑석1동 山37번지)에는 명수대(明水臺)가 있었다. 명수대는 1920년 일본이 부호 木下榮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이곳이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광복 후 철거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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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석시장 입구에서 중앙대부속여자고등학교로 가는 길 양쪽과 골짜기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곳에는 옛날 본동, 노량진동, 상도동 그리고 흑석동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모두 이곳에 묘를 썼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묘지 사용이 금지되는 한편 서울시가 기존묘도 이장하도록 공고한 후 이 지역은 개인에게 불하되어 지금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의 중앙대학교 부속여자고등학교 윗 지역은 70년대 초 공군장교들을 위한 30여채의 집을 지어 불하하였다고 하여 공군주택이라 불리운다.
......
흑석동의 역사가 나의 생각보다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더 자세히~~~
[1] 1395년 고려말기에 수참이 설치된 지점이다.
고려 말기에 정몽주의 건의로 설치되었던 수참는데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운영되었다. 한양 천도 직후인 1395년(태조 4)에는 수로전운소완호별감(水路轉運所完護別監)이라는 관직을 두고 한양의 용산강(龍山江)에서 충주의 연천(淵遷)까지 7곳을 소속시켰다. 이 7곳은 수참에 해당할 것이나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한강 수계에서 수참이 위치한 고을로 확인되는 곳은 충주와 원주, 천녕, 양근, 광주, 과천, 금천(衿川) 등 6곳이 있었으며, 그 중 좌도(左道)의 수참으로는 과천 흑석참(黑石站)에서 충주 금천참(金遷站)까지 6개의 수참이 있었다. 금천의 수참은 양화도(楊花渡)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 태종 18년 무술(1418) 1월 13일(갑자)
18-01-13[02] 참부의 수를 더 정하다
참부(站夫)를 더 정(定)하였다. 전 광주 교수관(廣州敎授官) 피자휴(皮子休) 등이 진언(陳言)하였다.
“수참(水站)의 민호(民戶)를 더 정하여 선군(船軍)의 예에 의하여 좌령(左領)ㆍ우령(右領)으로 나누소서.”
병조에서 교지(敎旨)를 받고 의정부(議政府)ㆍ제조(諸曹)와 의논하여 아뢰었다.
“수참(水站)이 있는 곳인 각 고을의 군적(軍籍)을 상고하니, 충청도 충주(忠州)가 27명이요, 강원도 원주(原州)가 57명이요, 경기 천녕(川寧)이 80명, 양근(陽根)이 72명, 광주(廣州)가 75명, 과천(果川)이 46명, 금천(衿川)이 52명이어서, 도합 4백9명입니다. 우도(右道)의( 당시 경기도에서 한강 북쪽) 수참(水站)은 조수(潮水)로 배가 가므로 역역(力役)이 가볍고 편하나, 좌도(左道) ( 당시 경기도에서 한강 남쪽) 가운데 과천(果川) 흑석참(黑石站)에서 충주(忠州) 금천참(金遷站)에 이르기까지의 6참(六站)은 조전(漕轉)이 자못 많고, 또 왜객인(倭客人)이 왕래하여 사무가 많고 무거우니, 위의 각참(各站) 수부(水夫)는 전의 수가 각각 20명이니, 이제 매 참(站)에다 정군(正軍) 10명을 더 정하고 각각 봉족(奉足) 2명을 주어서, 1령(領)마다 15명으로 좌령(左領)ㆍ우령(右領)을 나누어 입번(立番)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199 면
【분류】 교통-수운(水運) / 군사-부방(赴防)
흑석진은 노량도로 바뀌었다.
1771년4월12일,은신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놀란 영조는 즉시 가시울타리를 철거하게 하고 시신을 운구하도록 한다. 그리고 즉시 은언군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고 은언군이 살 두어 칸의 집을 지급하고 생모 임씨와 노복의 왕래를 허락했다. 이때 마련해준 집이 당시 과천 흑석리에 있은 듯하다.
정조는 이복 동생 은언군을 서용하여 수릉관으로 삼았으며 관직을 회복 시켜 주었다. 은전군에게도 직첩을 주고 서용했다. 숙빈 임씨는 정조 즉위년에 복작되었고 고종 때 가서 숙빈으로 추봉되었다. 숙빈 임씨는 1771년7월12일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은신군의 흑석리 집은 당시에 과천현 흑석리였던 것이다.
[5] 광복 이후 조정경기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1958년에 만들어진 영화 ‘모정’속에 나오는 흑석동 장면
[6] 흑석동 시장은 원래 길가에 있다가 도로가 생기면서 안쪽으로 밀려났다.
[7] 흑석동의 행정구역 변화
조선시대 -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1895년 - 인천부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1896년 -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1914년 -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
1936년 - 경성부 영등포출장소 흑석정
1946년 - 서울 영등포구 흑석동
1973년 - 서울 관악구 흑석동
1980년 - 서울 동작구 흑석동
[8] 동작구와 흑석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는 두 권의 책
![]() | 지명이 품은 한국사 여섯 번째 이야기 : 지명유래 서울.호남편 - ![]() 이은식 지음/타오름 |
유래 동작구와 한강 | 한강의 문화 그 꽃도 아름답구나 | 동작의 탄생과 그 이야기 | 한강은 정자를 낳고 정자는 한강을 알렸다 | 효사정의 풍광 | 노한은 어떤 사람이었나 | 정조의 효심과 그 정자 | 월파정 | 동작구에 모셔진 충신들의 혼령 | 노강서원의 슬픈 역사 충신 박태보의 그림자 | 가칠목 충신 박태보의 혼령이 머무는 곳 | 박태보설화 | 나루터 | 겸재 정선 선생의 안목
![]() | 경성의 주택지 - ![]() 이경아 지음/집(도서출판) |
우리나라의 대표 한옥단지, 가회동과 건축왕 정세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촌의 서양식 주택
서울의 중심, 인사동 일대의 변화와 박길룡의 조선 주택개량운동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삼청동 주택지와 김종량의 하이브리드 실험주택
이상적 건강주택지, 후암동
한양도성의 훼철과 고급 교외 주택지 개발, 장충동
그들의 전원주택지, 신당동
경성의 학교촌과 조선인의 문화촌, 동숭동과 혜화동
조선인들의 문화촌 형성과 실험적인 주택
한양도성 밖 첫 한옥 신도시, 돈암지구
한강 너머의 이상향, 흑석동 그리고 토지 투기의 확산
노량진과 동작진의 사이, 흑석리 |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 한강신사의 건립 | 장수촌이자 별장 주택지를 지향한 명수대 주택지 | 계획의 변경, 학원도시의 조성 | 병참기지정책에 따라 서쪽으로 번지는 토지 투기 열풍
최신 주거문화의 전시장, 충정로
철근콘크리트를 사용한 고급 주택, 죽첨장 또는 경교장
관에서 개발한 주택지, 관사단지와 영단주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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