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과 삶의 복원을 염원한 혁명가
- 인간을 추상화, 사물화, 도구화시키는 현대 문명- 우상화된 모든 이념과 제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비판자
- 구체적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들의 삶을 지금, 이곳에서 온전히 불태우는 삶을 살기를 바랬다.
①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보다 인간을 사랑한다.
②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 기대하는 존재. 인간보다 재물을 사랑하고 제도 과학, 기계, 전자계산기, 컴퓨터에 의존함
( 『학교 없는 사회』 마지막 7장)
◎ 이반 일리치의 일리치의 사상
▶ 청빈과 무권력과 비폭력의 사상으로 인간에게 더욱 큰 활기와 기쁨을 주는 것이 목표
▶ 현대사회에서는 존엄, 독립, 창조, 안전, 정치, 의사 교환 등의 여러 가치가 각각 사회복지, 군대, 노동, 경찰, 정당, 언론기관 등에 의한 서비스로 제도화 됨
▶사상의 변화 1976년, 그의 나이 50세 전후가 전후기 구분의 분수령
눈에 보이는 제도로부터 → 눈에 보이지 않는 ‘희소성’으로 관심이 이동함
① 전기: 제3세계 고유문화의 관점에서 현대문명을 비판,사회사상가
- 경제발전은 수요에 의한 노예화
- 제3세계의 발전전략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8년 학생운동 이후 서구의 소비풍요사회,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으로 생겨난 잘못된 수요로부터 민중의 자율적 능력을 지키고자 했던 흐름
② 후기: 12세기 이전의 중세문화의 관점에서 현대문명을 분석, 역사가
→‘소박한 자율의 삶’을 추구한 점에서 동일함
▶ 현대의 인간의 삶
-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인간은 가장 가난한 삶을, 가장 무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 오로지 상품의 '필요'로 정의되고 화폐 경제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호모 오이코노미쿠스,
- 직장 밖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일도 할 수 없고 임금 노동의 노예가 된 '산업 인간'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
- 모든 것을 학교에서 배워야만 하는 호모 에두칸두스,
- 대지에서 뿌리 박고 정주하며 살던 인간에서 아파트에 '수용되는 인간' 호모 카스트렌시스,
이렇게 인간을 지칭하는 기괴한 이름들은 모두 현대에 출현한 개념들이며 '현대인'의 다른 이름들이다.
● 학교화: ‘산업적으로 제도화된 생활양식’의 하나로서
- 현대인은 스스로 행하는 기쁨을 잃고 노예/마비환자가 되는 것이 권리가 되었슴.
-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 건강의 의료화: 병이 들면 무조건 병원
이동은 교통: 이동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자가용을 이용
교회: 본래의 신앙과는 무관하게 버릇처럼 교회에 출석
교도소화: 사회 적응을 위한 갱생교화와는 무관하게 비인간적인 처벌 기관
제도에 활력을 뺏긴 인간:메트릭스 (1999)
▶ '좋은 삶'이란 풀뿌리 민중이 자신의 이웃과 함께 일하고, 서로 돕고 보살피는 가운데서 생을 즐기는 데 있다. 이반 일리치는 지배하는 자의 입장을 철저히 배격하는 사상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민중의 평화로운 삶',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공유지'의 사적 점유야말로 민중의 평화를 깨는 가장 원천적인 폭력이다. 민중의 자립적, 자치적 삶의 기반을 뿌리로부터 파괴하는 경제발전의 논리를 배격에서 출발해야한다.
▶ ‘소박한 자율의 삶’ 을 지지함 conviviality
- 교육과 문화, 의료와 교통, 자연과 환경, 성과 언어, 학문과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의 개인의 자율을 주장
- 국가, 자본 및 전문가들의 지배에 철저히 반대
통치기구로 인간 위에 군림하는 국가법을 부정하나 자연법을 신봉하는 아나키스트
- 삶은 스스로 행하는 활동이어야 하므로 국가 등의 간섭이나 상품의 소비에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 “Conviviality” aims to be:
– nonviolent, but not tame;
– appealing to the senses, but not inimical to thought;
– power-less, but not without strength;
– regulated, but not bureaucratic;
– modest, but not lacking in aspirations;
– cognizant/in the present, but not trendy;
– self-determined, but not overly self-assured;
– determined by others, but not patronized;
– unpretentious, but not simple;
– in love with success, but not with victory;
– oriented toward complementarity of differences, not toward marginalization of the other.
Commons are either convivial or only a variant of globalized (and institutionalized) sameness.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 - 피터 콘래드 지음, 정준호 옮김/후마니타스 |
▶TV 건강프로그램의 ‘노화의 의료화’ 의미화 방식
KBS <비타민>의 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
-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노화를 의료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노화의 의료화’ 담론은 의료전문가의 통제권을 강조하고 사회문제를 개인화시키는 결과를 확산시키고 있다.
일리치가 보기에,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과도한 노동과 쉼 없는 삶으로 발생하는 문제, 생명체의 신음에 '질병'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다음, 의학이 이런 질병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리치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무리한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인데, 병 주고 약 주기를 남발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적 의학의 "전문적 진료에 관한 공평한 접근"에도 관심이 없으며, 불평등한 의료 접근성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의학이 약속하는 치료는 거짓 또는 '악'이기 때문에, 부자들이 자신의 부로 의사들에게서 악을 사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의학은 "치료적 효과에 중독"되어, 그 결과를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건강 개선은 의료의 결과보다는 백신 접종, 출산 과정에서 감염을 줄이려는 노력, 상수도 정수 등의 결과이지, "의사들의 기여" 때문이 아니다.
그의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의료 전문가가 독점한 의료를 다시 각 개인과 가정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에, 병자를 돌보는 것은 각 가정의 역할이었으며, 개인은 자신의 건강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의료화'는 건강에 관한 모든 결정권을 병원으로 이관한다. 반면, 우리의 삶, 구획 지어 분리할 수 없는 총체적인 이 삶을 오랫동안 주관해온 것은 자연이었다. 또한, 선택권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 의학이 건강에 관한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 "건강은 각 개인이 질환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어진 방법과 책임의 정도에 달려 있으며", 의료는 이를 증가시켜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의료적 개입이 있을 때만" 세계는 더 건강해질 수 있다. "고통과 병, 죽음을 자율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개인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건강해질 것이다.
아픈 몸을 살다 -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봄날의책 |
우리는 '질환'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행자들: 질병의 은유 (4)
| 2017. 09. 19
책속에서
-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 상품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죄악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불가능
- 상품 기하급수적으로 생산되면 사람은 무력해진다.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지을 수도, 노래를 부를 수도, 집을 지을 힘도 없게 되는 무기력이다. 땀을 흘려야 기쁨을 얻는 인간의 조건이 소수 부자만 누리는 사치스러운 특권이 된다.
-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 인간에게 공용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전문적인 서비스가 주입되는 탯줄이 달린 낯선 태반이 들어섰다. 인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집중치료를 받는다. 삶은 마비되었다.
- 현대인은 어디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 있다. 사람은 기업과 전문가가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자기 안에 있던 잠재력이 파괴된다.
- 사람들이 참여하거나, 참여하고 싶어하는 의미 있는 활동을 기업의 상품과 전문가의 서비스가 대체해버린 것
- 인간의 욕구와 소비는 수십 배가 증가했지만, 도구를 다루며 얻는 만족감은 드물다. 인간은 자신이 몸을 갖고 태어난 이유인 삶을 살기를 멈추었다. 그 어느 때보다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둘러싸였지만 기껏해야 간신히 생존했을 뿐이다. 인간의 일생은 남몰래 만족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필요의 사슬로 이어지게 되었다. 수동적 소비자가 된 이 인간은 급기야 삶과 생존을 분간하는 능력조차 잃어버렸다.
- 세계가 개방된 시장의 혜택을 누림으로써 지구의 빈곤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현실은 세계화가 확대, 심화될수록 지구 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여 옴( 대기업의 노동자와 최고 경영자 사이의 소득 격차가 10년 만에 수십 배에서 수백 배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
- 성장에 촛점을 맞추며 더 많은 인간적 손상을 일으키고, 더 강도 높은 환경파괴가 일어남
- 숫자로 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삼고 모든 것을 '국익'으로 환원하는 것이 옳은가?
- 서구 근대적 문명, 물질적 풍요라는 가치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 소농에 토대를 둔 농업중심 사회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수많은 고용 인구를 안정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겠는지
- 밑바닥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돈 없이도 생존을 누리고, 인간답게 위엄있게 살 수 있는 사회
-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은 거의 소진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현금이 없어도 이웃끼리의 상호부조적 관계에 의지해서 생존, 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가족도, 이웃끼리의 도움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돈 없으면 죽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과연 우리 사회가 경제성장을 통해서 부유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진정한 의미에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인간적으로 빈곤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건 장구한 인류사에서 '찰나'에 불과하다. 인간은 본래 오랜 세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 안에서 살아 왔다. 그것이 인간으로서는 훨씬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를 끝없이 갈라놓고 상호대립, 경쟁을 강요하고 있는 이 경제 시스템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다운 내면적 리듬이 적응하기 어려운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체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당장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탈출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 우리가 지향해야 할 네트워크는 어떤 것일까? 옛날에는 혈연, 지연, 혹은 학연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가 주류였다.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여 세계화 경제의 시스템 바깥에서 위엄있게 살아갈 수 있는 네트워크를 끊임없이 모색해야. 앞으로 이런 네트워크가 실업자,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될 날이 올 것
-
그림자 경제 요약
[1] 사회를 결정하는 세가지 차원
① x 축: (특권축) 사회적 계층구조, 정치적 권한, 생산수단의 소유, 자원의 배분(좌우진영들의 가치)
② y축: (기술의 강도) 굳은 기술과 무른 기술
③ z축:(인간의 만족) 상단: 소유에서 만족을 찾은 사회구조, 하단: 행위에서 만족을 얻는 사회구조 p.24
출처:Vernacular Values by Ivan Illich
[Note: These essays from CoEvolution Quarterly were the basis of most of Illich's book Shadow Work (Marion Boyars, 1981).]
http://www.davidtinapple.com/illich/1980_vernacular_values.html#1
▶ 역생산성undesired externalities- 가격 바깥에 존재하는 비용
* 학교교육- 신분하락 자격증 (P.21)
* 의료- 감당가능하고 유효적절한 한도넘는 의료수요 발생
→ 유기적 대처능력- 건강을 떨어뜨림
* 대중교통수단- 상호접근성, 선택폭을 제한
inevitable byproducts
▶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 이상의 발전을 바라지도,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도 말아야 한다.
▶호모 에코노미쿠스 vs. 호모 아르티펙스 수브시스텐스(homo artifex, subsistens) 자급자족적 기술을 갖춘 인간
발전이라는 통념을 버려야 함
자급자족 중심의 생활양식 선택 공동체의 노동관
획일화 되고 관리되는 노동 vs. 공생공락의 도구
▶ 자연과 사회의 한계 안에서만 (임금) 노동
▶ '발전'의 개념
* 자급자족 활동→ 상품 사용과 소비로 대체
* 임금 노동이 다른 모든 형태의 노동에 대해 독점을 행사
* 필요를 재정의:전문가의 설계에 따라 시간, 공간, 물질 설계를 생산-소비에 적합하도록 바꿈
(사용가치 중심의 활동을 저하시키고 마비시켜서 필요를 직접 충족할 수 없게 됨)
이 모든 변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좋은 것'이라는 가치를 부여받는다. -31p
▶ 타인에 대한 개념 변화 역사적 변화
1. 야만인 barbarian
2. 이교도 pagan
3. 불신자 infidel
4. 미개인- 필요를 지니지 않은 존재 wild man
5. 원주민 - 필요를 심어줘야 함 native
6. 저개발 국민 underdeveloped people
호모 인두스트리알리스 homoindustrials 라는 서구적 자아상을 받아들인 결과
▶ 호모 에코노미쿠스= 호모 라라란스+페미나 도메스티카
일하는 남자와 집안일 하는 여자
고용노동+그림자 노동은 언제나 짝이었다. p.45
▶ 자급자족을 회복하는 길
venacular - 빼어난 미적 감각, 기쁨에 대한 각별한 체험, 고유한 인생관
여성의 일은 산업적 농노
그림자 경제의 출현에서 내가 주시하는 점은, 임금으로 보상받지도 못하고 시장으로부터 가계의 독립성을 지키는 데 기여하지도 않는 노역 형태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비자급자족적 가내 공간에서 주부가 행하는 그림자 노동이 좋은 예다. 이 새로운 종류의 활동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임금 취득자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필요조건이다. 따라서 그림자 노동은 근대의 임금 노동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이지만, 노동집약적 상품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조건으로 보자면 그림자 노동이 임금 노동보다 훨씬 근본적일 것이다. 그림자 노동을, 자급자족 중심의 민중 문화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토박이 활동과 구분하는 것은 힘들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8~9쪽)
“지금까지의 경제 발전은 사람이 뭔가를 하는 대신 → 뭔가를 살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즉 시장 바깥에 존재하는 사용가치들을 → 시장 상품들로 대체한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경제 발전은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상품을 반드시 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런 상품 없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조건들이 물리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으로부터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물품과 서비스를 구매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제 환경을 이용할 방법이 막막해졌다.”(12쪽)
- 상품이 늘어나고 교환이 빈번해질수록 필요는 더욱 많이 충족(경제 성장)
- 필요는 만들어진 것이며,
- 우리가 겪고 있는 가난과 희소성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화된 가난임.
- 상품의 근본적 독점은 소비로부터의 배제나 강요된 소비로 인한 불만족을 야기
-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도리어 만족은 후퇴하는 역생산성(counterproductivity)은 성장의 필연적인 결과
- 게다가 사용가치를 넉넉하게 제공해주던 환경이 상품 생산 체제의 전유물이 됨으로써 착취가 더욱 가속화됨.
- 4장은 민중이 스스로를 위해 만들고 발전시켜온 민중에 ‘의한’ 과학이 민중을 ‘위한’ 타율의 과학으로 바뀜으로써 어떻게 인간이 무능력하고 의존적인 존재로 바뀌었는지를 암시
- 오늘의 성장주의가 역사적으로는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사회 최상위층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
[2] 장
- 하나의 언어만을 국가의 공식언어로 강제하는 방법은 민중을 일사불란하고 통일적인 국가의 신민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 16세기 초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 치세에 살았던 문법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의 생각을 살펴봄으로써 언어의 정복과 식민화가 콜럼버스에서 시작된 신대륙의 식민화와 똑같은 의도를 가진 것이었고, 동일한 궤를 밟아서 이루어졌음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3] 자급자족을 상대로 한 전쟁
토박이 활동이 보편적 상품으로 대체됨→ '빈곤의 현대화'
( 자신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토박이 활동에서마저 가장 작은 만족밖에 얻을 수 없다. p.128p)
- 위그에게 과학과 기술이란 (에덴의) 행복을 다시 찾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해방의 활동이었다.
- 자연을 관찰함으로써 인간을 자연에 잘 어울리는 존재로 바꾸는 데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누구나 그 활동을 스스로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 이후의 과학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한 도구
결국은 민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을 타율화하고 수동적 존재로 만드는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5]장 그림자 노동, 분리된 노동
[2]5(190~196쪽) 그림자 노동은 어떻게 우리를 이윤의 희생물로 만들었는가?
인클로저는 사실 두 방향으로 일어났다. ①전통적인 자급자족 활동을 임금을 벌기 위한 노동으로 내몰기도 했지만, ②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을 집안에 가두는 의미의 인클로저이기도 했다.
- 자족적 노동을 ① 생산적 노동과 ② 비생산적 노동으로 나누는 데서 시작되었다. 그 다음으로는 생산 노동의 윤리로 ‘근면’과 ‘성실’을 강요하는 동시에, 비생산 노동인 그림자 노동은 노동이 아닌 돌봄과 사랑의 행위인 것처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지면서 가속화되었다.
= 노동가치설 등으로 설명하면 그림자 노동은 배달음식, 가사도우미, 빨래방과 같은 구매 상품으로 외주화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 이런 서비스 경제가 완성되면, 이제는 자조(self-help)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해서 자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오히려 돈을 지불하는 현상
ex) 자기계발 붐, 각종 강습, 숙제감독관 교육을 받는 부모, DIY 제품의 범람에서 이미 그 징후
▶ 주어진 환경을 이용하여 생계를 충족하던 자급자족 활동
→
① 생산을 위주로 한 임노동과
② 소비적 노동인 그림자 노동으로
분열되고 파편화 됨
- 자급자족 활동을 상품 사회에 이바지하는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 처음부터 억압받는 여성과
* 부양 의무를 짊어진 남성이라는 성차별 구조를 만듦으로써 성립할 수 있었슴
② 소비하는 두 가지 노동으로 쪼개놓아야 했다는 것
임금 노동은 자발적으로 지원하거나 발탁됨으로써 행하는 노동
그림자 노동은 나면서부터 결정되고 부여되는 노동
▶상품 생산과 소비를 벗어나서는 살아갈 길이 없어진 인간 현실,
노동이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된 과정,
고용 노동은 가치 있는 노동이고
▶ 비고용의 무급 노동은 착취의 대상이 된 사정
- 물품 생산의 한계에 이른 오늘의 성장 사회는 어떻게 그림자 노동을 이윤의 새로운 사냥터로 삼고 있는지
▶ 무급의 그림자 노동은 봉사(service)와 돌봄(care)을 주된 활동 방식으로 삼는 노동
- 그런데 경제 성장의 요구는 이런 활동들을 ‘서비스 상품’으로 만듦으로써 다시 한 번 이윤의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다.
- 처음에는 무보수였던 그림자 노동이 서비스 경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이제는 돈을 주고 서비스를 구입하는 사태가 왔다.
- 이런 부가가치들은 경제 성장의 수치로 계산된다.
-산업사회 에서 그림자 노동은 임금노동의 보완물로서 산업사회 그 이전에 가족의 생계를 유지했던 무급활동과는 다드다.
- 그림자 노동: 특이한 형태의 노동으로 자급활동이 아닌 공식경제에 기여한다.저임금 노동이 아니다.
- 발탁되지 않고 부여된다./ 대가의 지급이 없다. 임금 노동보다 종요성이 더 커진다.
● 그림자 노동의 역사
1) 중세의 임금노동
- 많은 문화권에서 '임금 노동'을 정의하기가 힘들 정도다.
- 서양의 중세에 노동은 비참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으며 공동체의 공적 부조가 필요한 사람
무능력의 징표였다.
- 삶의 토대가 되어줄 가정이 없고, 자급자족 영위 수단을 뺏겼으며, 배고픈 사람을 도와줄 엄두를 내지 못함
2) 임금 노동이 승리를 거두기까지
- 인클로저와 원산업 및 부르주아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면서 구걸이 증가함
빈곤은 능력의 반대에서 부유함에 대한 반대개념이 됨
- 노동의 가치, 긍증,즐거움을 운운하는 자들은 모두 남의 노동에 대한 것일 것
- 고전경제학자-자연+노동->가치생산으로 봄
- 18세기까지 프랑스에서 강제 노동은 범죄에대한 처벌이었슴
- 반면, 이탈리아 신교국가들은 쓸모있는 노동자로 만드는 곳이 구빈원이었슴
-자급자족을 위한 투쟁이 인클로저 운동으로 펼쳐졌으나
노동을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으로 나누고 비생산적 노동에 여성을 할당하여 저항을 해결함
3) 여성에게 부여된 운명
- 가족의 생계에 대한 기여를 무시하고 여성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만듦
- 노동가치설: 남성의 노동은 금을 만드는 촉매, 집안일의 지위를 하락시킴
자급자족 경제를 위해 저항하는 평민군중→ 남성+여성의 노동자 계급으로 바꿈
- 고용주의 이익과 자본의 투자활동에 서로가 기여하도록 하고 있다.
- 그러면서 그림자 노동이 더욱 자본 집약화 되게 만듦
① 그림자 노동(여성이 하는 일)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림
② 마르크스 주의자: 사회적 재생산 이라는 용어로 대치
③ 화폐 시장 바깥 활동을 모두 가격을 매김
④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라는 여성주의자들의 설명
: 자급자족 측면에서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됨
4) 여성 노동을 보는 새로운 눈
- 새로운 그림자 생존방식이 1780년부터 1860년 사이에 각국에 퍼짐
- 여성은 이류 노동자화 됨
- 농촌 가정이 생산물의 생산단위이고 경제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동반자였슴
- 그러나 지위 박탈(disestablishment)이 되면서 - 경제적 평등 상실, 법적권리 상실하고 강제적 소비조직의 일원으라 지겨운 임무만을 부여 받음
- 1980년 부터는 남성과 소년도 강제적 소비방식을 강요받게 됨, 여성은 이미 1850년 부터.
⑤
5)그림자 노동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가
- 호모에코노미쿠스=페미나 도메스티카(집안 여성)+ 비르 라보란스(일하는 남성)
무능력한 상호의존적 예속에 묶이게 됨
- 자기네 서비스의 필요성을 입증시켜, 그림자 노동을 고객에게 부과함
:19 여성이 했던 돌봄관련 직종을 임금 노동을 통해 재생산 함
칼폴라니, 아날학파
- 산업사회에 대한 연구의 토대- 희소성, 욕구, 성, 노동에 대한 은폐된 가정
- 산업사회는 차별의 역사이다.
- 민중분화, 토박이 문화가 패한 이유는 자신들을 서로 다른 영역에 가두고 분리시키는 인클로저를 받아들였기 때문(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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