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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from 'I' to nonself

by 책이랑 2020. 9. 20.

▶ 붓다 IQ 3,000 
(인식의 내용이 아니라
 인식의 방식과 한계를 꿰뚫어 알아차렸다는 의미??)

 무아 ① 현상계의 바탕(실상계)을 설명하고, 
    연기는 ②인식의 대상인 현상계를 설명

'나'는  사고의 기능에 불과함.
 - 그러나   '나'가 현상이라는 것이 깊게 관념화되어 있다. 
   :종일 반복되는 영화관의 시스템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영화의 스토리와 같다.
-  그 '나'는 음향기나 영사기가 고장나거나 스크린이 찢어지거나 관객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의 파란 바탕이 실상이다.

 사고지능과 생존지능


- 인간은 사고 지능과 생존 지능이라는 두 가지 지능을 모두 갖고 살지만,
사고 지능이 전부라고 착각하며 관념적으로 살게 된다. 
- 생존 지능은 앎의 대상이거나 앎의 기능이 아니고 발휘되는 능력,
 그러나 이를 지능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회에 대한 동조화가 마쳐진 후에 나타나는 사고 지능이 삶을 주도하므로
모든 인간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어 망상과 환상으로 일생을 시달린다.

나(따옴표 없음)를 언어 관념으로 포착하면,
의식화된 '나'가 만들어져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개체로 탄생한다. 
그러나 이 '나'는 언어 현상으로써 실용적인 허구이다. 

 그런 조악한 '나'로 너무나도 명백한 나를 대체하므로
생로병사의 고통을 겪게 되며 생명력을 탕진한다.
 

 아스트랄체, 감청체( 무의식의 영역)에 구비된
무의식 기계들의 사회적 효율성이 너무 낮아
탐진치와 고통의 부작용을 일으키기에 깨달음이 필요함.

 현재의 세계관이 바뀌었다고 해서 과거에 무의식의 구성에 재료가 된 경험과 
관념들이 자동으로 바뀌지 않으므로 
아스트랄체는 멘털체가 무슨 발견과 변화를 얻든지 말든지 
이제껏 했던 역할들을 계속하는 것

 아스트랄체의 무의식 기계가
시공간감, 물질감, 주체감을 바탕에 먼저 만든 뒤에야
의식이 등장하기 때문에 깨어나기가 힘듦

-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파도 없는 바다를 볼 수 없듯이,
현상계(가상현실계)에서 '나'는 무아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존재한다.
'나'의 여백으로 무아가 드러나지만 '나'는 이를 직접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
기존의 무의식이 불필요하다는 사실이 뼈가 저릴 정도로 깊게 각인된다면
무의식은 스스로 새로운 일처리 회로를 구축한다. 
무의식이 저항하고 반발하는 상황에서 몸이 무아의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면
허구의 '나'를 지키려는 저항과 반발에 동원되던 에너지들은 새로운 회로를 찾아 흘러간다.

- 돈오를 바탕으로 한 수행은 변형이 아니라 해체와 재구성이므로
한동안은 두 개의 일처리 신경 회로가 병용될 수도 있습니다.
재구성은 초기 구성보다 어려우므로 무의식의 변화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

 수행의 목적은 성인의 달성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꾸준히 변형되는 것
탐진치가 소거된 만큼, 무의식이 변한 만큼 편해진다.
-  각성은 생각(사고 지능)과 생각의 배경(생존 지능)을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생각은 더 이상 주인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 대신 들어선 생존 지능도 주인의 노릇을 하지 않는다.  저절로 생멸하는 사건들과 하나 되어 흐르고, 저절로 그러함에 온전히 함께 한다.  생각의 갈등이 없고, 몸에 대한 불안이 없다.   생각의 어긋남은 번민이 되지 않으며 몸의 질병은 그 나름대로 완벽한 인과를 따른다.  그리하여 미지(未知)가 불안하지 않는다. 

- 생존 지능과 이를 둘러싼 연기의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되면 사고 지능은 유기체의 주인이라는 주재자 의식에서 물러나고, 연기하는 세계를 비추는 하나의 기능으로만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사고 지능의 함정에서 깨어난 의식의 상태를 각성이라고 한다.  각성된 의식은 두 개의 지능이 조화롭게 작동되는 세계를 산다.

- 유아가 무아를 알게 된다는 의미는, 무아가 유아에게 대상화된 지식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마다 '증발하는 유아'가 된다는 것


- 나가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은 '생각'과 언어 현상 이전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완벽하고 분명하여 어떤 누구도 나를 '안'다. 철학자, 성공한 사람, 대통령만 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갓난아기, 정신박약자, 잠자는 사람, 혼수상태의 환자도 나를 '알'고 있으며, 명백한 나를 기반으로 살아간다. 이 나가 바로 무아와의 공명인 것이다. (이 문단에서 앎을 따옴표 처리한 것은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몸에 반복하여 축적하는 자량이 필요
새로운 것을 몸에 익히기 위함이 아니라, 원래 몸에 있던 것이 저절로 드러나도록, 장애가 되던 것을 치우는 것
- 그래서 생각이 단절될 때마다 안도감이 드러나는 경험이 일정 수준 이상 쌓이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깨쳐서 공부를 마치는 것을 이해하거나 안다고 표현하지 않고 체득했다고 하는 것임 

- 몸은 몸의 방법(경험자량)으로 알게 되고, 생각은 생각의 방법(이해자량)으로 알게 되고 그 수준이 균등하게 깊어져야 흔들리거나 착오 없는 명백함이 자리를 잡게 된다. 
몸은 무아를 드러내고 생각은 연기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둘은 별개의 차원이라서, 하나로 합쳐지거나 서로 간섭하여 영향을 교환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두 개의 날개로 날아올라야 하는 것

- 저절로 일어나는 연기의 세계에 온전히 맡기며 살게 되어야 '나'의 역기능은 해소가 된다.
- 무아에 대한 유추는 감(感)으로 하는 것
반복 훈련을 통하여 생생해지면 사고 기능이 활발한 일상의 상태에서도 이것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
숨겨져 있던 많은 것들을 알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체득이 일어나 '나'와 '나'아님으로 동시에 살아가게 되더라도 '나'는 끝까지 당당하게 '나'일 뿐이지 '나'아닌 것이 되는 일은 없다. 

 무아란 생각이 주인 노릇하는 것의 죽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상계(나와 대상 전체)는 기억과 관념으로 구축된 허상의 세계라는 것을 깨닫고
생각의 단절을 통해 몸 전체의 네트워크가 최적으로 구현해야


- 생각이나 감정이, 온갖 감각들이 선명하게 존재하지만, 그 생각과 감정, 감각을 보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체험
머릿속에서 보는 자가 사라지는 것이며, 쉼 없이 주절대는 놈이 증발한다.- 자아 의식의 소멸


- 염세나 허무 그리고 막행막식은 모두 여전히 '생각'일 뿐 그것들 조차도 모두 사라지면 '생각'이 구축한 가상현실을 지탱하던 힘들이 제거된 원래의 여여함과 안도감이 강력하게 드러난다.

생각 너머에 대한 체득이 뒷받침 
나'가 주체라는 망상으로 인한 두려움이나 외로움 따위에 휩싸이지 않습니다


-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겸한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 또 술을 마시게 된다.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거시적인 이해의 힘보다 몸이 즉각적으로 편해지려는 습관의 힘이 훨씬 강력하기 때문 (이런 힘의 크기가 바로 자량)

- 무아와 연기라는 가르침의 효용성은 오직 경험자량에서만 끌어올 수가 있습니다. '나'가 아니라 무아라는 실천적 연습을 반복하여서, 무아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훨씬 편하다는 경험을 축적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진행하다 보면 어느 날 이해자량과는 다른 힘이 생깁니다. 

 영성이 진화하였다는 것은 심신의 에너지에 대한 이해와 사용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것
비과학적인 개념의 사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영성을 '감정의 힘' 또는 '심리적인 힘'이라고 대체
- 진리를 핑계로 차별, 차등, 분별을 만들고 지배와 의존을 구조화하는 것은 진리를 사칭하는 것 (진리탐구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 
-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고 기능과 관념의 비중이 커진 이후에는, 사람은 세계에 대하여 사고의 틀과 에너지라는 두 개의 형식으로 인식하고 소통. 동일한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여 힘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는 진화
- 세계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경로인데 사고의 틀은 세계를 입자 또는 물질로 인식하게 하고, 에너지는 세계를 중첩된 에너지장의 파동으로 느끼게 합니다. 사고의 틀이 오감(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과 육근(眼耳鼻舌身意)를 근거로 일어나는데 반하여 에너지는 육감(Six sense)으로 인지, 

 사람의 뇌,  사고의 틀과 에너지로 세계를 인식하는 두 개 시스템
대규모의 종교 집회, 모든 사람의 관심과 감정이 집중된 공연장, 한 곳의 지휘에 강력하게 집중되어 있는 대규모 집회 현장,  자발적으로 열광하는 운동 경기장 등에서 하나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집결되어 증폭된 대중의 에너지는 개인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경험, 전체성으로써의 에너지의 본성의식적으로 보편 평등하게 쓸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영성의 진화

= 수행으로 깨달음을 마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깨달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것, 심리적 구조물의 해체상실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 확철대오(廓徹大悟) 이후에는 정정진(正精進-팔정도)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에 관한 지도책을 만들 필요

일상에서 생각이 불필요하게 앞서는 것을 알아채고 걷어차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으로도 충분. 관점이 해체된다고 해서 스트레스나 위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열 받고 속 쓰릴 때마다 여전히 고통은 일어나며, 사회생활을 지속하려면 특정의 관점을 채택하고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자량의 힘은 고통으로 유발된 과잉된 통증을 제거. 그리고 개발된 이해자량과 경험자량이, 열 받는 일과 속 쓰린 일도 차츰 소거해 나아가는 것



 관계는  감정체가 힘을 발휘하는 영역, 자동으로 작동되는 아주 강력한 무의식적인 심리적 장치로서 조건이 형성되면 의식의 내용과 무관하게 작동되는 자동 기계임. 유아기나 청소년기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저절로 만들어진 심리적 구조물
- 대부분 유치하고 편협하고 소란스럽다.('내면의 아이')

- 팔정도는 감정체의 인과를 밝히는 작업, 팔정도의 正은 무아와 연기라는 빛


正의 빛으로 그 어두운 자동 심리 기계의 내부를 비추라는 것
기억과 사고와 언행과 일상의 집중에서 무아의 빛으로 심리적 구조물의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것.
그 자동 기계들이 얼마나 원시적이고 낡고 조잡하며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명백하게 체득시키는 것

 고오타마가 제자들에게 고행 대신 팔정도를 제시한 이유는 당시의 고행 수행자들이 추구했던 갈고닦음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
- 멘털체의 깨달음이 있다면 그렇게 억압적으로 조작하고 추구할 필요가 없다. 깨달음의 안도감은 심리적 구조물들의 저항과 반발에서 에너지를 내려 놓을 수 있게 한다.
- 심리적 구조물들이 점차로 무아라는 진리의 효용성을 수용, 무아가 제대로 비추어져 각인이 되면 심리적 구조물들이 스스로 전환한다.

 팔정도를 붙들고 살면서 인과에 밝아져 가는 과정
( 철학적인 이해나 심리치료 등의 방법으로 감정체를 치유하고 의식 수준을 높여가는 과정과 다른 점은
안도감 때문에 심리체의 해체가 가능하다는 것)

- 이 자동 심리 기계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여서 해체 소멸되어 사라진다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구조물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전의 낡은 습기가 소거되고 성숙한 새로운 습기가 자리를 잡아 모든 관계에 원만해진 상태가 성불)

- 성불은 깨달음과 달리 끝이 없어 완성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체의 작동은 사회적 관계의 문제이며 사회와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

-' 나'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모든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되어야 완전히 깨어나는 것일까?
무아체험시 분명히 사라졌던 놈이 하는 말에 왜 계속 속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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