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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기회라도 얻으려면 우리는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꿔야 한다.”

by 책이랑 2020. 12. 2.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기회라도 얻으려면 우리는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꿔야 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한겨레>에 보내온 제11회 아시아미래포럼 기조강연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뭄·산불과 같은 기후재난, 우리의 일상을 파괴하는 바이러스, 빈부 격차 등으로 세상이 점점 망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데만 해도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제크는 포럼 첫날인 12월2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뉴노멀’에 대해 기조강연을 한다.
지제크는 코로나 팬데믹을 우리의 경제시스템이 불러온 재난으로 본다. 지난 7월 국내에 번역 출판된 저서 <팬데믹 패닉>에서 “지속될 수 없는 항구적 자기 팽창을 요구하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경제, 성장률과 이윤 가능성에 목매는 경제”가 바이러스 사태를 초래했다고 짚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기조강연에서 “우리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롭고 불길한 자연의 등장을 초래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자연에 우리가 설 자리는 없을 것”이라며 “코로나 팬데믹 또한 ‘새롭고 불길한 자연’의 한 예가 아닐까”라고 되묻는다.

지제크는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전 지구적 재난에 대응하려면 “‘전시 공산주의’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보수세력이 집권중인 국가에서도 시장 법칙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결정이 점점 많이 내려지고 있다. 국가가 산업과 농업에 직접 개입하고, 굶주림 예방 등을 위해 수십억달러를 나눠준다. 감염이 지속적으로 늘면 경제의 부분적인 사회화가 더욱 긴급해질 것이다.”

지제크는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 규제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명백한 코로나19의 심각성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움직임의 밑바탕에는 ‘모르고자 하는 의지’(will not to know) 가 자리잡고 있다. 바이러스에 대해 너무 많이 알면 자유로운 삶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위협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코로나의 위험에 대한 노골적인 부정(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 음모론(완전한 사회 통제를 위한 ‘딥 스테이트’의 계획설)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지제크는 “팬데믹은 우리 몸에 밴 노멀리티(정상 상태)에 대한 감각, 즉 우리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관습들을
약화시켜 우리가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런 실존적 두려움 때문에 팬데믹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장과의 영상 대담에서 ‘모르고자 하는 의지’의 유혹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질문에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신뢰를 받으면서도 강력한 국가 권위를 믿는다”며 “어쩌면 지금 서구는 잘못된 개인주의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팬데믹 패닉 - 코로나19는 세계를 어떻게 뒤흔들었는가

바이러스 감염병은 이렇게 한 순간에 예외적 비상사태를 정상 상태로 바꾸어버렸다. 얼마 동안 지속되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리라는 전망은 시들고 바이러스와 동거하는 새로운 일상, 이른바 ‘뉴노멀’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지젝은 그 뉴노멀을 새로운 공산주의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물론 구닥다리 공산주의나 막연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치 원리다. 개인을 버리고 공동체의 집단성을 내세우는 권위주의의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진행되고 있고 많은 사람이 필수적이라고 느끼는 조치, 더러는 이미 시행되기도 한 조치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서의 공산주의다.

마스크, 진단키트, 산소호흡기 같은 의료장비부터
곡물 생산과 실업 등, 생명과 생존에 관련된 물품의 생산과 공급을 시장 메커니즘에 의탁하지 않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조절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이 책은 코로나19 이후 인류가 맞게 될 상시적 바이러스 사회에서 
국가의 공적 기능을 키우고 우리의 생명과 생존이 함께 추구될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를 그리는 일에 많은 논의가 할애되어 있다. 

지젝은 방역과 경제가 공존하는 이 사회를 거침없이 공산주의라 명명하고, 이를 현재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나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과 확연히 구분한다. 이 새로운 공산주의는 한 국가의 정치 시스템이 아니라 전 지구적 협력으로 탄생할 초국가적 지구정치의 모델이다. 

지젝 말대로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이러한 정치적 혁명의 계기를 마련해줄지, 
아니면 차별과 배제가 교묘하게 강화된 새로운 야만의 시대로 회귀할지는 진정 우리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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