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는 아들의 죽음과 관련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애도를 표하기는커녕 떠들썩한 웃음을 퍼뜨렸다.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에선 존 폴스태프 경의 무모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행동을 그렸다.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에선 베아트리체와 베네디크의 희망에 찬 구애 활동을 그렸다.
그러다 1599년 여름의 끝자락, 햄넷이 죽은 지 3년이나 지난 뒤에야 셰익스피어는 희극 집필을 멈추고 슬픔에 젖은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햄릿 Hamlet》이었다.
《햄릿》. 햄넷. 《햄릿》. 햄넷. 연관성이 뻔히 보이면서도 왠지 미스터리하다. 셰익스피어가 아들을 애도하고 싶었다면, 왜 아들의 실제이름을 쓰지 않았을까? 왜 거의 같은 이름을 한 역사적 왕자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그리고 왜 그동안 익살스러운 희극 작품들을 내놨을까? 왜 울며 한탄하는 데 3년씩이나 기다렸을까?
모든 게 미스터리해 보이지만 사실 그 답은 3년의 공백에 있다.
그간의 공백은 <햄릿>이 자식의 죽음이라는 끔찍한 사건에서 분출된 슬픔의 원초적 표현이 아님을 드러낸다. 《햄릿》은 슬픔과 이룬타협의 산물이요, 슬픔을 이겨낸 치유의 산물이었다. 슬픔을 이겨낸치유. 햄넷이 죽은 후 힘겨운 나날 동안 셰익스피어가 애써 얻어낸것이다.
슬픔을 이겨낸 치유. 《햄릿》이 우리를 도와주도록 고안된 것도 바로 이것이다. (pp.219-220)
죄책감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이기에 수백만 년 동안 우리가 가정과 우정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죄의식 체계를 교란시킨다. 이 체계가 사랑하는 사람의 물리적 부재를 감지하고 '얼른 틈을 메워야 해!'라고 겅고하는 순간 교란이 시작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 어떻게 교류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처럼사과를 하거나 선물을 줄 수도 없는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전할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고자 조상들은 사후 선물을 고안하여 고인에게 술을 따르고 분향을 하고, 무엇보다도 성대하게 공개 추모를 거행했다. 공개 추모는 다양한 형식으로 이뤄진다. 추도문, 시, 장례준비, 무덤, 조각상, 고인 명의로 하는 기부 등 끝이 없다. 형식이 뭐든, 고인에게 삶의 한 자리를 제공하여 고인과 연대감을 느끼고 우리의 죄의식을 더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점차 슬픔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선조들은 일찍이 사별에 따른 죄책감을 해소할 과학적 해결책을 발견했다. 하지만 햄릿의 경우처럼, 과학적 해결책이 모든상황에 다 통하지는 않는다. 고인을 향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대부분의 추모가 불충분하다고 느껴진다....(pp..232-233)
출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 제8장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라- 셰익스피어의 《햄릿》 | 발명품: 슬픔 해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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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 ![]() 앵거스 플레처 지음, 박미경 옮김/비잉(Be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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