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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서술자

by 책이랑 2022. 12. 5.

■ 테트락티스 (pp.216-217)

'나'를 다소 추상적인 구성물로 파악하는 방식은 오랜전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에 대한 고전적인 구분에서 시작해 프로이트의 이론, 즉 서로에 대해 독립적이면서 심지어 적대적인 세 개의 힘 - 자아(ego), 이드(id), 초자아(superego)가 우리의 '나'를 다툼과 언쟁의 장으로 만든다는 개념에 이르기까지실로 다양합니다.

확신컨대 '오컴의 면도날'은 상상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도구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들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필수불가결한 고통일 것입니다. 작가들이란 존재를 걷잡을 수 없이 증폭시키는 사람들이니까요. '전체'를 상호 협력하는(혹은 그렇지 못한) 아주 작은 단위의 구성 요소로 잘게 쪼개려는 모든 종류의 시스템은 내게 늘 짜릿한 희열을 안겨 주었습니다. 프로이트의 삼위일체 개념은 가능한 한 빨리 수정되어야 마땅하며, 테트락티스로, 그러니까 에너지의 사원체로 대체되어야 합니다.즉 자아와 이드, 초자아의 삼위일체에 서술자라는 원소를 추가함으로써, '나'의 경계를 뛰어넘어 세상과 소통시키는 에너지를결합시켜야 합니다.

서술자란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고 사회성을 겸비한 우리 정신의 일부를 말합니다. 이러한 서술자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공동체도 구축할 수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삼위일체란 결국 일종의 동종 교배를 말합니다. 충동, 아니면 금지나 명령에 의해서만 바깥세상과 간신히 관계를 유지하는 일종의 내적 모나드(궁극적 실체)이니까요. 그 대신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생성된 이야기들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 세상을 에워싸며 일종의 네트워크를형성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네트워크가 촘촘해지고 두터워지는것을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발달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거의 또는 전혀 변하지않지만 소통과 전달의 수단인 네트워크는 스스로 변형을 일으키며 고정되지 않은 형태로 시대와 유행에 적응하니까요.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서술자란 우리 안에 있는 파충류의 뇌와 같은 것으로 진화를 통해서도 대체되지 않는 아주 오래된 조직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 덕분에 세상은 이야깃거리로 탈바꿈될 수 있고, 이해 가능하며 변화무쌍한것이 됩니다. 세상의 내러티브적 특성은 그 자체로 이미 반대의조짐을 내포한 다양한 다른 버전의 존재 가능성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입니다. 아마도 서술자는 인간 종의 시작부터 영원히 존재하면서, 삶의 리듬이 박동하고 혼란스러운 엔트로피의 과정들이직선 모양의 플롯으로 배열되는 '내레이터의 왕국(narratorium)'에 속해 있을 것입니다. 그 왕국에서 이야기의 맥박이 생성되고, 환상적 이미지들이 신화나 원형들과 뒤얽히게 됩니다.

서술자는 인간 경험의 다면성과 복잡성을 전달하지 못하는, 우연투성이의 의례적인 구어체 언어에 대해 자신의 깊은 본성에서부터 반대합니다. 서술자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통해 한 사람의 경험을 다른 사람의 경험으로 직접 전달하는 매개체입니다. 서술자는 언어를 단지 도구로만 사용합니다.언어의 도움으로 그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공을 초월한 공동체의 직감적 상상력을 선형적이고, 리드미컬하며 구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으로 구현합니다.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 자연에 뿌리를 두고, 맥락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이해하기 쉬운 새로운 이야기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지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연 '나'라는 소통 불능의 감옥을 과감히 벗어나 보다 광활한 현실의 영역을 드러내며 상호 간의 연결 고리를 보여 주는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널리 통용되는 대중적 의견들'이몰려 있는 중심부, 명백하고 뻔하며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그중심부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주류, 탈중심의 사안들에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나는 문학이 온갖 종류의 기묘함이나 환상, 도발, 그로테스크, 광기를 표현하는 고유의 권한을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수호해 왔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낍니다. 나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멀리까지 그 맥락을 펼칠 폭넓은 전망과 드높은 시야를꿈꿉니다. 가장 모호한 직관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 문화적 이질성을 훌쩍 뛰어넘는 은유, 그래서 방대하고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장르를 꿈꿉니다.

나는 또한 새로운 유형의 서술 방식, 그러니까 '사인칭 시점서술'을 꿈꿉니다. 여기서 '사인칭'이란 단순히 문법적인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등장인물의 다양한 시각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개별적인 시각의 지평을 넘어설 수 있는 시점을 말합니다. 더 많이, 더 넓게 조망하고, 시간을 과감히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서술방식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이러한 서술자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

7.나는 픽션을 쓰지만 그것은 절대 새빨간 조작은 아닙니다. 글을 쓸 때 나는 내 안에서 모든 것을 생생히 느껴야 합니다. 책에등장하는 모든 생명체와 사물, 인간의 영역에 속한 것과 인간이아닌 존재에 관한 것, 살아 있는 것과 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 모든 것이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 합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가까이에서 하나하나 주의깊게 살펴보고, 내 안에서 그것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해야 합니다.


이럴 때 내게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다정함'입니다.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끊임없이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입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것은 대상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고, 인간의 경험들, 그들이 겪었던 상황들과 기억들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모든 작은 조각과 파편들에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정함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을 인격화하여 그것에 목소리를 투여하고, 존재하고 표현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선사합니다. 바
로 이 다정함이 찻주전자에게 말을 하게끔 만듭니다.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입니다. 성서나 복음서에도 언급되지 않고, 이것을 걸고 맹세하는 사람도 없으며, 인용하는 사람도 딱히 없는 그런 종류의 사랑입니다. 특별한 로고나상징물도 없고, 범죄나 질투를 유발하지도 않습니다. 다정함은 우리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면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때 구현됩니다.

다정함은 자발적이면서 사심이 없습니다. 인민에 기반한 동질감을 초월하는 감정으로서 다소 멜랑콜리한 듯하지만 의식적으로 운명을 공유합니다.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한 특성, 그리고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본질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다정함은 우리를 서로 연결해 주는 유대의 끈을 인식하고 상대와의 유사성 및 동질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 세상이 살아움직이고 있고,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더불어 협력하고 상호 의존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합니다.

문학이란 우리와 다른 모든 개별적 존재에 대한 다정함에 근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본적인 심리학적 메커니즘입니다. 다정함이라는 이 놀라운 도구, 인간의 가장 정교한 소통 방식덕분에 우리의 다양한 체험들이 시간을 여행하여 아직 태어나지않은 누군가에게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언젠가 그들은 우리가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세상에 대해서 기록하고 이야기한 것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먼 훗날 그들의 삶이 어떠할지, 그들이 누구일지 나는 전혀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종종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해결책을 찾으려 발버둥 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기후 비상사태나 정치적 위기는 난데없이 발생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결과가 단지정해진 숙명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뒤틀려 버린 게 아니라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세계관에 따른 매우 구체적인 행동과 결단이 빚어낸 산물임을 종종 잊곤 합니다. 탐욕, 자연을 존중할 줄모르는 오만, 이기주의, 상상력 결핍,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될 수 있는 상태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믿습니다.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나는 이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단일체이며, 동시에 우리 인간은 그 세상의 작지만 강력한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할수밖에 없다는 것을.

-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기조 강연


 

[...]  세속제와 제일의제, 즉 이법(二法)의 가역적 의존관계를 동시에 깨닫지 못하면 이들 중 한 세계에 집착하여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우리가 ‘같은가’ ‘다른가’에만 유일한 관심을 보여 온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헤겔까지 계속된 동일성의 논리도 버려야 하지만 탈현대주의자들의 반논리로 극화된 차이 또한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굳이 용수의 이제설, 중도관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서양철학의 두 흐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동일성과 차이(타자성)는 현실세계에 기초해서 볼 때 적대적인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지적인 구성물이자 관점의 차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60 

 

탈현대철학의 동일성과 차이의 늪에서 벗어나기 / 박치완 - 불교평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주장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고 하기도 하고, ‘나는 적절하지만 남들은 적절하지 않다’고도 하면서 드디어 황하(黃河)와 한수(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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