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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by 책이랑 2023. 2. 5.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제가 인생을 능숙하게 살아나가는 것처럼 보였을 겁니다. 확실한 상태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3년 동안 여섯 개 나라를 돌면서 치열하게 일했습다.

발휘해서 겨우 버텨낸 거였죠. 저는 여전히 속내를 숨기고 재무관리에 관심이 있는 척했습니다. 열심히 흉내를 내면 생각보다 무척 오래 버틸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자제력만으로 더는 해 

한 사람의 일상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은 우리 존재의 더 깊은 부분에 자양분과 활히 성공에서 얻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바뀌게 한다는 느낌에서 나오지요.

 

문득 그때 읽던 책이 떠올랐습니다. 실은 이미 세 번째 읽고 있던 책이었지요. 상당히 난해한 내용이라 세 번이나 꼼꼼하게 읽었는데도 30에서 40퍼센트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선종 불교를 다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터사이클 정비 기술을 담은 것도 아니었어요. 모호하고 어렵기도 했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중에서 제 가 어렴풋이 이해한 내용을 한 구절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 내면의 평화로운 것, 고요하고 차분한 것, 자꾸 떠오르는 갖가 지 생각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중하며,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와 같은 것들에는 보상이 따른다.”

몇 번이고 읽다 보니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해서 무슨 엄청난 각성을 했다거나 특별한 정신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잠시 벗어났지요. 그것만으로 놀라운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생각이 온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더는 그 속에 매몰되진 않게 된 것입니다. 마치 한 발짝 물러나 제 마음을 지켜볼 수 있게 된 것 같았지요. 그러자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지, 내가 곧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생각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무비판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수행하지 않은 정신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요. 우리의 정체성과 생각이 불가분의 관계라고 느끼는 것 말입니다.

태곳적부터 어느 종교에서든 차분히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해왔습니다. 그 중요성은 불교나 명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을 능력이 있습니다. 관심을 어디로 돌릴지 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얼마 동안 관심을 기울일지 선택할 능력도 있지요. 여러분에게도 당연히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연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잠재된 능력을 무시하거나 아예 잃어버린다면, 우리 삶은 여태까지 몸에 깊이 밴 행동과 관점에 좌우됩니다. 모든 결정을 습관적으로 내리게 되지요. 이를테면 과거에 목줄이 묶여 끌려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결국 우리는 같은 트랙을 계속해서 돌고 또 돌게 됩니다. 그런 삶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존엄도 품위도 없습니다.

 

그제야 처음으로 고향 마을의 어두운 측면과 마주했습니다. 외로움과 곤궁. 절망감과 무력감. 그 무게 앞에서 종종 출근이 꺼려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상담을 마치고 나면, 제 가슴을 울리던 상대와 나눈 온기 덕분에 늘 한 뼘은 더 자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처음에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 때문에 울었던 사람들은 이제 고마음으로 말미암아 울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마침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 까닭이지요. 그중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관심을 받아본 것이 수십 년만의 일이라고 하더군요. 이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돕는 일은 그 자체로 저에게 무한한 보상이 된다는것입니다.

 

저를 삼킬 듯 차오르는 어두운 감정을 다스릴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아? 16년 동안 온갖 교육을 받았는데, 삶이 힘들 때 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배운 건 하나도 없다니!'

어렸을 때부터 제 안에선 늘 뭔가 부족하다고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습니
.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실수를 저지르는 등 당황하거나 멍청한 짓을 저지를 때마다 그 목소리는 더 커졌습니다. 반면에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는 잠잠해졌고요. 당시에도 저는 그게 저라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소산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자란 세상에서는 가혹한 내적 비평가의 끊임없는 불평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도치 않게 지극히 사소한 실수를 저지를 때조차 가차 없이 비난을 던지는 목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죠. 이런 환경의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과 언젠가 그 부족함을 남들에게 들킬 것 같해서 고요할 수 있지요. 살아 숨 쉬는 한 우리는 두뇌를 쓰기 마련인데, 본래 어떤 안을 구상하고 그 안을 다른 안과 비교해서 새로운 안을 재구성한 뒤 그것에 또 다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두뇌의 일이니까요.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감은 있었습니다. 더는 제 인생이 통제할 수 없는 내부와 외부 상황에 전적으로 달린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슬픔이나 불안감이나 외로움이 밀려들 때 호흡에 집중하면 좋다는 사실은 체득했습니다. 제 의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아무 의심 없이 믿지는 않게 되었지요.

그것이 부처님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관심을 거둬들이고 선택한 곳으로 주의를 쏠리게 하는 것.
진정한 고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것뿐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 준 세 번째 선물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는 삶에서 존엄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유는 또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그 생각은 대부분 의도치 않게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섬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간에 길러진 방식 그동안 경험한 것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고난 것들 우리가 속한 문화와 환경 그리고 인생 여정에서 마주치는 메시지들의 영향을 받아 형성됩니다. 생각 또한 그 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그 생각이 어떤 양상을 취할지도 통제하지 못하지요. 다만 어떤 생각은 더 오래 품으며 고취할 수 있고, 어떤 생각에는 최대한 작은 공간만을 내줄 수도 있습니다. 마음속에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믿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는 승려가 되기로 한 제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야 마침내 제 안에서 '이건 내 삶이 아니야'고 끊임없이 속삭이던 목소리가 잠잠해진 것입니다.

 

서구에서는, 특히 사업 영역에선 지적 능력이 사실상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선 제가 오랫동안 의심해왔던 가설 하나를 설득력 있게 증명해주었습니다. 즉, 인간의 가치와 재주는 높은 지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우리 머릿속에 한계가 없는 지성이 존재하며, 우리는 거기 더 깊이 의지할수록 더욱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 안에 있는 현명한 목소리, 저를 이곳까지 오게 한 목소리는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세상과 제 생각이 일치했습니다.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요. 현재 하는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 진실을 말하기. 서로 돕기. 쉼 없이 떠오르는 생각보다 침묵을 신뢰하기.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 비유는 제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제 정신을 온전하고 바르게 유지하려면, 날카롭고 효과적으로 발휘하려면, 때로 쉬게 놔둬야 한다는 말씀이었지요.

 

현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예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이성적인 마음은 하인이다. 반면에 직관적인 마음은 신성한 선물이다. 우리가 창조한 사회는 하인을 섬기느라 선물을 잊어버렸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정교하게 연마된 '지혜'라는 나침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혜의 소리는 은은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낯선 사람들과 종일 생활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큰 괴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걸핏하면 다른 승려들과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난 수자토만큼 총명하지 않아. 난 니야나라토만큼 너그럽지 않아. 테자파뇨만큼 진득하지도 않고 찬다코만큼 신증하지도 않아.' 비교하면 할수록 괴로웠습니다. 게다가 다들 하나같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때로 사람들은 그토록 신경에 거슬리는 걸까요? 저는 짜증으로 가득 차곤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제가 기대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품었던 모든 반감은 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제 안에서 너그러운 마음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제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주지 스님은 우리에게 다른 이를 대할 때 이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우리는 해변에 쓸려온 자갈과 같다네. 처음엔 거칠고 들쭉날쭉하지. 그런데 삶의 파도가 쉼 없이 밀려온다네. 우리가 그곳에 머물며 다른 자갈들 사이에서 거칠게 밀치고 비비다 보면, 날카로운 모서리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닮게 된다네. 결국 둥글고 매끄러워지지. 그러면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게 될 걸세.

숲속 사원의 전통적인 문화는 합의를 기반으로 합니다. 함께 지내는 승려들은서로 상대에게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적으로 뛰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설사 내가 당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과 함께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걸 함께하겠다는 각오가 서야 사원에서 순조롭게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일하면서 게으름을 몰아내는 수행)은 한 가지 원칙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바로 무엇을 하든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원에서는 어떤 활동이 다른 활동보다 더 유익하거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네 병원의 간호사들에게 설법하는 일이 마당을 쓸거나 설거지하거나 뒷정리하는 일보다 더 낫거나 멋지지 않습니다.

수행 생활이 스웨덴을 떠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풀리지는 않았더라도행자의 삶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 풀려갔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해변에 머물며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서로 부딪치면서날카로운 모서리를 갈고 닦아 점점 둥글둥글해졌습니다

 

부처님은 매우 현명해서 의식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지요. 각종 의식과 격식에는 본질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어요. 우리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승려는 모든 행동에 그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아야 합니다단순히 계율이어서 했던 절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릎과 머리가 땅에 닿을 때마다 이 세상엔 제 요란한 자아보다 현명한 지혜의 원천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지식은 자신이 아는 것을 자랑한다. 지혜는 자신이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하다. 누구든 공감할 이야기일 겁니다. 자기 생각의 안개에 갇힌 사람들은 현재에 관심을 온전히 쏟지 못하지요. 생각은 이리저리 뻗어나갈지언정 그들의 시야는 극히 좁습니다. 토끼는 머리가 좋고 영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토끼나 곰돌이 푸 중에서 누구로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제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제는 우리 모두 내면의 곰돌이 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푸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각과 마음을 깨우고, 매 순간의 새로움을 알아차리며 세상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을 땐 얼마나 좋은지요. 잠시라도 제 입장에서 생각하고 뒤를 받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와 같은 경청은 그 자체로 치유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지요. '와, 나 좀 봐. 그동안 내가 생각하거나 느끼거나 믿는지도 몰랐던 것들을 말하고 설명하고 공유하고 있잖아!' 아무런 편견이나 판단 없이 귀를 기울이면 다른 사람은 둘째치고라도 먼저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언젠가 필요할 날이 올 테니까요.

 

내려놓기는 어쩌면 제가 배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일 겁니다. 내려놓기의 지혜는 잠으로 심오합니다. 내러놓을 수 있을 때 얻는 것은 끝이 없지요. 우리를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부르는 생각들은 내려놓는 순간 힘을 잃습니다. 설사 그 생각이 ‘옳다' 하더라도요. 물론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생각이 결국엔 우리에게 가장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들여다보길 바랍니다.

 

"갈등의 싹이 트려고 할 때, 누군가와 맞서게 될 때, 이 주문을 마음속으로 세번만 반복하세요. 어떤 언어로든 진심으로 세 번만 되된다면, 여러분의 근심은 여름날 아침 풀밭에 맺힌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스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지요.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다들 숨죽이고 스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요. 스님은 몸을 살짝 내밀더니 극적인 효과를 내려고 한 번 더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습니다.

", 다들 그 주문이 뭔지 궁금하시죠?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직감을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다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이 옳은지 그른지,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믿지요. 우리는 걸핏하면 삶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계획한 방식대로 마땅히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막연한 관념과 의지대로 삶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극히 무지하다는 것을 이해할 때, 지혜가 싹틉니다.

고지대 밀림에서 지내던 어느 날, 우리는 공양을 마친 뒤 불상을 옮기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거대한 청동 불상을 산 정상에 있는 작은 정자까지 날라야 했습니다. 누군가는 권양기가 달린 랜드로버가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불상을 올려놓고 굴릴 통나무가 있었습니다. 미얀마인들이 얼른 돕겠다고 나섰고,태국인들도 소매를 걷어붙였습니다. 그리고 승려도 여러 명 달려들었지요. 하지만 우리 서양인 승려 중 몇 명은 소동을 피해 뒷걸음을 쳤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일을 더 빨리, 더 손쉽게 해치울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아잔 자야사로 주지 스님은 제 어깨에 손을 얹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티코, 이 일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네. 이 일을 끝내고 우리가 어떻게 느끼느냐, 그 점이 중요하다네.” 

저는 여러분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에게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되니까요.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돌아가지 않는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자신을 원래보다 더 작고 초라하게 만들 필요 또한 없지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목을 옥죄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넓은 마음으로 인생을 포용하며 살 것입니까?

 

자,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쳐보길 바랍니다.

 '별일 아니야'라고요.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그 순, 제가 남들이 감탄할 만한 성과를 이루거나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안달하는 삶에서 마침내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초월적 성장은 심리적인 대응 전략을 익힌다고 얻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진정 성장하려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번뇌에서 멀어지고, 설사 번뇌에 빠지더라도 금세 벗어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물론 살아가며 고민과 갈등이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번뇌를 완전히 내려놓는 것은 적절한 목표가 아닙니다.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죽은 사람뿐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무작정 믿지 않아야 합니다.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상황을 온전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우주가 다음과 같은 원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근본적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진실이 뭐냐고요?"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살아가는 내내 크고 무겁고 중요한 짐 두 개를 이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에는 과거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미래에 관한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둘 다 멋지고 소중한 것들이 가득 든 짐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잠시 그 짐을 내려놓는다면 어떨까요? 인생에서 좀 더 가까이 당면한 순간,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을 반갑게 맞아보는 겁니다. 짐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언제든 원할 때 다시 집어 들면 됩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따금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는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편히 쉬세요. 푹 쉬고 나면 짐을 더 쉽게 들 수 있어요.

생각과 통제력을 내려놓기, 내면을 돌아보고 경청하기, 현재에 집중하기, 정기적으로 편안하게 쉬기, 신뢰하며 살기.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생각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의 현실에 더 깊이 뿌리내린 소중한 것들을 탐지하는 일이지요. 생각이 거품처럼 이는 곳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우리의 생각은 더 가치를 띠게 되지요. 우리 안의

현명한 직관이 더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과정을 통해서 생각의 질이 개선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염불을 왼 뒤 서둘러 공동묘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잔디밭에 앉아 조용히 공양했지요. 공양을 마친 뒤에도 잠시 그대로 앉아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문득 예전에 태국의 스승님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항상 가질 수는 없지만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항상 가질 수 있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제가 욕구를 채우려는 집착을 버릴 때마다 그 욕구가 더 쉽게 충족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삶이 펼쳐지는 데 잘 대응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미래의 계획과 통제와 조직에 덜 신경 쓰고 현재에 더 충실하면 됩니다. 완전한 몰입에 빠졌을 때의 기분을 아실 겁니다. 기민하게 주의를 집중하게 되지요. 알아차림이라 영적 성장의 결정적인 도약은 불확실성에 직면할 용기를 내는 데서 이뤄집니다. 우리의 무지를 편견으로 가리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앞일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참아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현명해집니다. 삶을 뜻대로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건 끊임없이 흐르는 물살을 맨손으로 붙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끊임없는 변화는 자연의 속성입니다
.

사원 생활은 삶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타고난 의지를 좌절시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만지지도 못했고, 언제 무엇을 먹을지 또 누구와 살고 어느 오두막에서 잘지 선택하지도 못했습니다. 승려가 되면 과거에는 당연한 권리였던 선택들을 모두 내려놓고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러한 수행은 우리에게 놀라운 선물을 안겨줍니다. 삶이 불확실해질 때도 흔들리지 않게 해주고 앞날을 모를 때도 내면의 평화를 지킬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헛된 노력을 덜 기울이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믿음과 미래에 덜 집착하고, 삶이 실제로 벌어지는 유일한 장소인 지금 여기에 더 마음을 여는 과정입니다.

 

실은 누구나 인간의 삶에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을 잘 알 것입니다. 이승에서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삶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점입니다. 나머지는 희망, 두려움, 가정, 소망, 예상, 의도 등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저도 모르게 꾹 쥐었던 주먹이 스르르 풀리고, 펼친 손은 삶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믿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그때보다 더 굳건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온갖 생각이 무서우리만치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간에 제가 배우고 익혔던 모든 것이 가늘디가는 구명줄을 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안팎의 온갖 어둠 속에서도 저는 명상을 통해 쉴곳을, 호흡할 공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내려놓는 연습을 했기에, 저는 가장 낙심한 순간에 그 능력을 소환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자주 제 관심을 끔찍한 생각에서 호흡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참으로 끈질겨서 단 한 번의 호흡 만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끈질기게 노력한 덕분에 얼마 지나자 연속해서 두 번까지 호흡할 만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숨통이 트이자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18개월 만에 드디어 다시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거룩한 마음가짐들, 우리 마음속의 아름다운 안식처들을 어떻게 기르고 넓힐 수 있을까요? 부처님은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게 그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한사 너 자신브터 시작해야 하느니라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맺는 온갖 관계 중에서 단 하나만이 진정으로 평생 이어집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연민과 온정으로 이루어진, 사소한 실수는 용서하고 또 털어버릴 수 있는 관계라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제 단점에 대해 웃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거리낌 없이 보살핀다면 또 어떨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 전체가 반드시 좀 더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의 고귀한 마음가짐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승려로 살며 배웠던 것을 저는 지금 '속세'에서도 거듭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는 모든 것이 임의로 이루어지는 차갑고 적대적인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내보내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지요. 제가 이처럼 믿음을 말하면, 상황을 철저하게 통제하려 드는 사람일수록 마음이 더 불편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믿음이 주는 기쁨과 풍요로움을 놓치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기댈 것이라곤 믿음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수 있지요.

 

저는 삶이 동시에 두 가지 국면으로 흘러간다는 점을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검사 결과는 저를 거칠게 강타했습니다. 절망과 충격에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기는 것 같았지요. 목 놓아 울고 싶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제 안의 다른 부분은 너무나 담담하게 새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열린 눈으로 마주했습니다. 저항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긴 했지만 딱히 낯설진 않았습니다. 제 안에 의지할 무언가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늘 깨어 있으면서 현실에 절대로 맞서지 않는 부분, 바로 알아차림이었습니다.

 

반면 승려 시절에 배운 것들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 법과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 않는 법을 17년 동안이 나 수행했으니까요. 진단을 받은 뒤로는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해진 기술입니다.

그 기술 덕분에 때로 덮쳐오는 절망감을 조금이나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휠체어 신세가 되거나 말도 못 하고 아무것도 삼킬 수 없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지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대신 제 안에서 싹트는 다른 느낌을 감지할 수 있었지요. 그것은 죽는 그날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였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직 삶을 멈출 준비는 되지않았습니다. 

진단 이후의 나날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분노는 거의 없습니다. 제 슬픔은 대부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제가 놓치게 될 일에 느끼는 아쉬움에서 비롯하지요. 아내의 아이들이 손자를 낳아 기르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 말을 꺼내기조차 힘듭니다. 그리고 엘리사베트와 함께 늙어 가길 간절히 간절히 바랐는데 그 소망도 이룰 수 없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당장 인류 전체를 뜯어고치고 전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나서야 할까요? 우리가 모두 그레타 툰베리나 간디가 되어야 할까요? 그야 물론 아닙니다. 그와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로, 커다란 의제에서 동력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훌륭하기 이를 데 없지만 누구나 다 그러지는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당면한 현실에서 행동하기로 선택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일상의 언행을 유념하면서 자잘한 변화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 또한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나에게 가장 편하고 쉬운 행동의 범주에서 벗어나 조금 더 인내하고 용서하고 관대하고 정직하며 도움을 베풀 때, 그 작은 순간들의 선택들이 모여 인생이 되고 세상을 이룹니다.

개개인의 삶에는 저마다 도전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갈림길이 기다립니다. 자기한테 편한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니면 상대에게 그럽고 훌륭하고 포용적이고 배려하는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세상에 편한 길은 없습니다. 반듯하고 평탄해 보이는 길에도 그것만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러나 예상할 수 있는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더 큰 포용력과 상상력을 요구하는 길을 걸을 것인지의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출발점은 같을지 모르지만 두 길의 끝은 대단히 다른 목적지로 이어집니다.

 

내면의 도덕적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잘 아는 사람의 삶은 더 쉽고 더 자유롭습니다. 저는 그 증거를 곧잘 목격합니다. 이 우주는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무심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존재는 공명共鳴합니다. 우주는 우 리가 하는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의도에 반응합니다. 우리가 내보낸 것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세상은 세상 그 자체의 모습으로서 존재하지 않지요. 세상은 우리의 모습으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우리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사랑하는 이들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음을 머리로 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이해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더는 이만하면 됐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모든 사람과 반드시 이별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확실하며 그 외의 나머지는 다 추측이고 가능성입니다. 그 진실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삶 자체에 다가갈 유일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다정하게,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사원까지 찾아왔습니다. 한번은 국왕이 스님에게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루앙 폰 둔 스님도 화난 적이 있습니까?” 불교에서 평정심은 때로 깨달음의 척도처럼 여겨지기에 다소 민감한 질문이었습니다. 감정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큰일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는 이들은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루앙 폰 둔 스님은 ", 디태 마이 아오Mee, dtä mai aow"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나긴 하지, 그 화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합니다라는 뜻이지요이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이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품을 만큼 매우 깊고 넓을 때 삶이 어떤 모습일지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피하 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감정이 곧 우리 자신이라고 믿지 않길 바랍니다

그것이 내면을 전부 차지하고 물들이게 두지 말길 바랍니다. 그런다면 분노나 억울함도, 시기와 미움도 더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곧 후회할 일을 저지르게 하지도 못합니다.

 

승려로 산 지 몇 년 안 됐을 때, 어느 날 오후 저는 밀림의 대나무 오두막 밖에 서 행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아잔 브람Ajahn Brahm 스님의 설법이 들렸습니다. 스님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어느 시점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레드 제플린의 신나는 콘서트가 끝나고 흥에 겨운 채 시원한 밤공기 속으로 나서는 기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스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마지막 순간에 다가가는 지금, 제 기분은 그와 비슷합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일말의 후회나 걱정 없이 제 삶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 경이로움과 고마움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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