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우연과 필연의 재해석

by 책이랑 2024. 9. 4.


21 
우연과 필연의 재해석

자크 모노Monod는 1970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진화란 필연의 결과가 아니고 우연한 사건들로 야기되는우연의 결과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이 주장을 재고하며 모노의 해석이 지닌 문제점들을 파헤치겠다.
모노는 철학적 개념인 필연과 우연을 엄밀한 철학적 고찰 없이단순히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면서 진화의 과정을 필연에 상반된우연의 결과라고 해석한다. 필자들은 이러한 이분법이 근본적으로 오해로부터 비롯된 잘못된 견해여서 혼동만 야기할 뿐이라는점을 밝히겠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노의 우연과 필연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 불교의 연기의 가르침에 반하게 된다는 점도 보이겠다.

모노의 우연과 필연
모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노가 전제한 생명체의세 가지 본질적 속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 번째 본질적 속성은목적론적 법칙성 (teleonomy)으로, 모든 생명체는 종족의 보존과번식이라는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자연법칙에 의해 이러한 목적성이나 목표지향성은 생명체의 구조와 기능에 발현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본질은 자율적 형태발생으로,
생명체는 생명체 내부의 작용만으로 그들의 구조를 만든다. 생명체의 발생 과정에서 각각의 세포 안에 있는 많은 단백질이 서로서로를 인식하고 스스로 모여 거대한 단백질 구조로 조립되고 결국은 세포의 형태를 완성한다. 생명체는 외부의 어떠한 힘에도영향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발생 과정을 이룬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세 번째 본질적 속성은 번식의 불변성으로, 생명체는 그들이 지닌 고도의 조직화된 정보를 복제하여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다. 모노는 이렇게 고도로 조직화된 불변의 정보는 다름 아니라 유전물질인 DNA라고 말한다.
세 가지 본질적 속성을 전제한 후, 모노는 DNA 정보의 위치가우연히 바뀌거나 일부가 없어지거나 하는 돌연변이 현상을 유전자정보의 오류라고 이해한다. 오류가 일어난 DNA 정보는 DNA의 본질인 복제기능에 따라 나머지 오류 없는 유전자 정보와 함께 복제된다. 그리고 결국은 유전자 정보의 오류를 지닌 새로운 생명체가 생명계에 출현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정보의 오류(돌연변이)가 복제되어, 오류를 지닌 새로운 생명체들이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경우 자연선택된다는 뜻이다. 즉 유전자 정보의 오류를 지닌 생명체들이 자연선택된 이유는 그들이 지닌 본질인 종족보존과 번식이라는 목적을 수행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모노는 이렇게 우연히 일어나는 돌연변이라는 사건이 생명계에서 일어나는 진화 과정의 원동력이라고 제안한다. 진화는 우연한 사건들로 야기되는 우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모노의 문제
(1) 목적론적 법칙
모노가 전제한 생명체의 첫째 본질적 속성인 목적론적 법칙은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식 목적론의 1970년대 판에 불과하다. 필자들은 그동안 실제로 일어나는 생명현상을 예로 들며 아리스토텔레스류의 본질주의와 목적론이 잘못된 주장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보여 왔다.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와 그들이 형성하는 생명계에 불변하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생명계의 모든 생명체는 본질이 결여된 채 공한 상태로만 존재한다. 그런데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생명체가 무슨 본질로서의 목적을실현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명현상을 잘못 이해하게 한다.
예를 들어 올챙이가 개구리로 성장하기 위한 의지를 갖고 있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해 주어진 발생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챙이가 인간의 의지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고대인들이 그들 나름대로 세계를 이해하기위해 투박하게 의인화擬人化한 설명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올챙이에게 투사해서 올챙이가 개구리로 발생하는 과정을 마치 우리 인간 의지의실현 과정처럼 이해하려는 것일 뿐이다. 의인화된 의지를 동반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은 올바른 과학적 설명으로볼 수 없다.
생명과학 현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우리들은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을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어야 했다. 그러나 1958년 생명과학자인 콜린 피튼드리가 처음으로 목적론적 법칙을 제안한 이후, 생명과학계는 생명현상이란 생명체 내에 존재하는 본질적 속성인 '종족보존과 번식'이라는 목적의 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명체는 그 목표를 실현시키려는 의지를 가진 행위자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목적론적법칙은 피튼드리와 그의 동시대 생명과학자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아리스토텔레스식 목적론으로의 회귀였다.
한편 1960년대 중반에 들어와 생명과학자 에른스트 메이어는 목적론적 법칙에 기계론적 색깔을 덧입히며, 생명체에 내재한DNA 정보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은 생명체를 작동시키기 위한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로 수정했다." 모노는 이런 목적론적법칙의 수정안을 받아들이며, 1970년 그의 저서 '우연과 필연」에서 생명체의 목적지향성이 생명체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찰스 다윈 이래로 한동안 학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적 시각이 배척되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와 모노와 몇몇 생명과학자들에 의해 그 내용을 약간 수정한 목적론적시각이 공공연히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수정을 거친 목적론적 법칙은 여전히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본질을 전제하며, 생명체들이나 생명체 내에 있는 단백질이 스스로자율적으로 정보프로그램을 작동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구조를만들고 기능을 발휘한다는 설명과 해석이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적 시각과 설명이 과학적이지 않듯이, 1970년대 판 목적론적 법칙 또한 과학적 시각과 설명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노의 주장의 근간을 이루는 생명체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전제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2) 우연
모노는 우연(chance)과 무작위 (randomness)를 같은 뜻으로 여긴다. 그래서 모노는 어떤 사건이 무작위로 일어난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과 무작위의 의미를 철학적 사고 없이 무비판적으로 통일시하는 것이다. 무작위란 생명체가 번식하는 환경에 영향 받지 않고 일어나는 현상을 뜻하지 그것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다는뜻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다윈이 왜 돌연변이를 변이(variation)라고 서술하며, 변이들을 우연이라고 하지 않고 무작위한(random) 현상이라고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개념적으로, 무작위한 현상은 설명할 수 있지만 우연한 현상은 설명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노는 우연과 무작위를 동일시하며 우연한(무작위한)사건이란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규정짓는다. 모노가 주장한대로 우연한 사건이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라면, 그것은 시간적으로 앞선 그 어떤 조건들도 이 사건을 설명하는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모노가 생각하는 우연은 사건을 유발하는 원인이 없다는 뜻으로, 비결정론적 (indeterministic)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앞선 조건이나 원인에도 영향 받지 않고 불현듯 일어나는 사건이 모노가 생각하는 우연히, 그리고 무작위로일어나는 돌연변이다. 따라서 앞선 조건이나 원인에 제약받지 않는 우연의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언제나 50%가 된다는 우스꽝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그런데 실은, 모노가 생각하듯이 돌연변이가 앞선 조건이나 원인과는 상관없이 비결정론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생명과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예를 들어 보자. 효소를 포함한특정한 단백질 분자가 DNA 다발의 특정한 부위에 다양한 작용을 가하면 돌연변이가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가 돌연변이 과정을미시구조에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면, 돌연변이를 책임지는특정한 효소나 단백질을 생산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특정한 효소나 단백질을 A라고 해 보자. 그러면 선행되어야 하는 생산 과정이란 또 다른 다양한 효소나 단백질(A-1)이 DNA 다발 부위에 작용하여 돌연변이를 책임질 특정한 효소나 단백질(A)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선행되어야 하는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또 그보다 먼저 또 다른 다양한 효소나 단백질(A-2)이 DNA 다발 부위에 작용하는 과정이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이 맞물리고 맞물려우리가 처음 이야기했던 그 돌연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의 연속에서 오류가 일어나리라는 점은 사실 놀라운 일이 전혀 아니다. 오류는 항상 일어날수 있는 일이며, 이렇게 일어나는 오류들은 원인이 있기에 당연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돌연변이의 원인이 되는 조건은 세포안에서만이 아니라 세포 외부에서도 영향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세포가 방사선에 노출되면 세포 내의 DNA 다발이 영향을 받아 돌연변이가 일어난다. 따라서 모노의 주장과는 반대로, 생명체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이상, 돌연변이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자연스런 (돌연변이의 현상은 원인이 있고, 따라서 설명할수 있다. (돌연변이는 신기하게 불현듯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이아니며, 선행되는 원인인 조건들에 의해서 일어나는 사건의 과정(process)이다. 그리고 훗날 생명과학 기술이 더욱 발달해 선행되는 조건들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변이 현상을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진화의 두 번째 단계인 자연선택 과정은 생명체들이 환경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는 물리적 과정이다.
자연선택에서 선택이란 어떤 특정한 변이를 갖는 생명체들이 그들이 서식하는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게 되고 새끼를 많이 낳아종족을 번식시키는 반면, 다른 변이를 갖는 생명체들은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연선택 과정이 비결정론적 (indeterministic)인 우연의 현상이라면 과거에 일어난 자연선택 과정의 결과가 현재 일어날 자연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우연한 현상인 자연선택 과정에서 모든 생명체는 동일한 확률의 생존율과 번식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 자연선택 되거나 되지 않거나. 그러나 생명체들은 자연선택 과정을 거치며 각기 다른 생존율을 가지고 그들의 번식 가능성에도 차이를 보인다. 환경에 보
다 적합하게 적응된 생명체들이 그렇지 못한 생명체들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자손을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자연선택은 우연히 일어나는 비결정론적인 자연현상이 아니다.
우연과 필연을 넘어 연기로지금까지 필자들은 자연현상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비결정론적인 사건은 없다고 주장했다. 미시세계에서의 (돌연변이 현상이나 거시세계의 자연선택이나 모두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필자들이 말하는 변이 현상이나 자연선택이 모두 필연적 현상이라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우리가 문제 상황을 좀 더 근본적인 불교적 시각에서바라보기만 하면 모두 무의미한 물음임이 드러난다.
생물학적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돌연변이는실은 여러 조건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현상일뿐, 이것은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그냥 여여하게 연기하는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어떤 특정한 예상에 어긋났다고 해서 우연이라고 보기도 할 뿐이다. 이런 예상은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고, 불교에서는 그렇게 특정 방향으로만과정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본질주의적 고정관념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한편 모노는 자연선택 과정에서 어떤 필연성을 논하고 있는데,
자연선택의 필연성이란 우리에게 아무런 새로운 정보 내용도 전해 주지 못하는 하나마나한 옳은 소리 (tautology)에 불과하다. 무작위로 변이하는 생명체들 가운데 자연환경에 잘 맞는 방식으로변이한 생명체들이 종족을 보존하고 번식에 성공하는 것이 필연척이라는 말은 노란 장미가 노랗다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말이나마찬가지다. 당연히 필연적으로 옳다. 그리고 이렇게 너무나도당연하기 때문에 '필연'이라는 근사한 말을 붙여 보았자 우리에게 새로 해 주는 말이 하나도 없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우연'이나 '필연' 모두 하나마나한 부질없는 소리들이고, 생명현상은 그저 조건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연기에 의해 진행되는 여여한 과정일 뿐이다.
또한 필자들은 연기의 가르침을 잘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행해져 온 미시세계에서의 (돌연변이 현상과 거시세계에서의 자연선택 현상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한다. 자연현상을 두 개의 다른 차원으로 나누게 된 것은 변이를 일으키는 생명물질이있고 이에 대한 외부의 환경이 있다는 이분법적 시각을 전제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필자들이 생명현상의 예를 들며설명하고 주장한 것은 생명현상은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생명체들은 본질이 없이 공하고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연기한다. 그러므로 생명체의 안과 밖의 본질적인 구분이 가능하고, 따라서 생명체와 그에 상응하는 환경과의 경계도 없어진다.
생명체와 생명체의 밖인 환경과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면, 이 구분에 근거하여 자연현상을 나누는 것 또한 무의미해진다. 생명체의 안과 밖이 둘이 아니며, 생명체나 그것을 둘러싼 외부 환경도둘이 아니다. 나아가 자연(환경)에 선택되는 생명물질이나 생명체와 자연(환경)과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생명현상이 연기한다는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상, 미시세계에서의 변이 현상과 거시세계의 자연선택 현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변이현상이나 자연선택이라는 용어 또한 연기하는 자연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은 그저 여여하게, 그러그러하게 연기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