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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

by 책이랑 2024. 9. 6.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

1. 머리말

우리 시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고, 과학의 여러 분야에서는 이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까닭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류가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과학분야에서 기존의 기계론적 패러다임이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패러다임과 현대의 위기는 깊은 연관이 있다.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우리가 처한 위기의 원인은 우리의 세계관이라고 진단한다. 우리 모두가 현존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위기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 세계관이야말로 병들어 시들어가고 있으며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원흉이라는 것이다. 현대의 위기의 원인이 세계관에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미래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인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이 주목받는 까닭은 이들 두 사상이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패러다임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은 시간적ㆍ문화적으로 그리고 자료와 방법 등에서 서로 거리가 먼 사상체계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사상이고, 일반시스템이론은 과학에서 비롯된 하나의 학제적 접근방식이다. 이렇게 모든 점에서 외견상 상이한 두 사상이지만, 조애너 메이시(Joanna Macy)는 그의 저서 Mutual Causality in Buddhism and General Systems Theory에서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은 동질의 사상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 동질적인 구조가 바로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의 동질성을 인과율에 대한 관점의 일치에서 찾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일방적ㆍ단일 방향적인 관계로 생각해 왔는데,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에서는 인과관계를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본다는 것이다.

메이시는 인과율을 인간의 삶과 세계관의 토대로 본다.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에 대한 가설은 우리의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으며, 우리들의 세계관에도 내재하고 있고, 우리의 모든 기획에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인과율을 쿤((Thomas S. Khun)이 이야기한 패러다임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현대는 선형인과율에서 상호인과율로의 인과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러한 인과율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핵심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메이시는 인과율에 주목하여 패러다임 전환의 방향을 선형인과율에서 상호인과율로의 전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이 기존의 기계론적 패러다임과 구별되는 공통된 특징들은 인과율을 중심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인과율을 중심으로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의 다양한 특징들을 살펴보고,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이 지향하는 윤리를 전망하고자 한다.

 

2. 일반시스템이론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일반시스템이론은 우리에게 낯선 이론이다. 최근 우리나라에 일반체계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되거나 연구된 적은 없다. 따라서 우선 일반시스템이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7세기 서양 근세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분석적 사고방법을 창안했다. 그 방법은 복잡한 현상을 부분으로 잘게 나누어, 그 부분들의 특성을 통해 전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데카르트의 자연관은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개의 독립적인 영역들 사이의 근본적인 구분을 기초로 삼고 있었다. 데카르트의 입장에서 생물을 포함하는 물질적 우주 전체는 하나의 기계였고, 이론상 그 기계는 가장 작은 부분으로 완전히 분해시킴으로써 이해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계론적 우주관은 그 후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과학과 철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들어 새로 개발된 정확한 현미경과 생화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의 발전은 생물학자들에게 생명의 모든 특성과 기능은 궁극적으로 화학법칙과 물리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19세기 생물학이 이룩한 세포이론, 발생학, 미생물학 등은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기계론적 개념을 확고한 도그마로 정립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그 내부에 반동의 물결을 몰고 올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세포 생물학이 수많은 세포의 하부 단위들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이해에서 큰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 세포들이 전체로 어떤 기능으로 통합되어 들어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생물학에서 기계론에 반대하는 유기체설 생물학이 등장하였다. 유기체설은 생물학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환원하는 데 반대했다. 유기체설 생물학자들은 물리와 화학법칙들이 유기체에 적용 가능하지만, 그런 법칙만으로는 생명이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유기체, 즉 생물의 움직임은 그 부분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올바로 이해될 수 없으며,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유기체설의 초기 주창자 중 한 사람인 로스 해리슨(Ross Harrison)은 조직이라는 개념을 탐구했고, 그 후 이 개념은 생리학의 기능(function)이라는 개념을 대체하게 되었다. 기능에서 조직으로의 전환은 기계론에서 시스템적 사고로의 전환을 나타낸다. 해리슨은 구성(configuration)과 관계(relationsship)를 조직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으로 간주했다. 화학자인 로렌스 헨더슨(Lawrence Henderson)은 생물체계와 사회체계 모두를 나타내는 데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그 후 시스템이라는 말은 그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특성이 발생하는 통합된 전체를 뜻하게 되었으며, 시스템적 사고는 어떤 현상을 보다 큰 전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20세기 전반부에 유기체설 생물학자들에 의해 개진되었던 개념들은 연결성, 연관성, 맥락 등의 측면에서 시스템적 사고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낳았다. 이러한 시스템적 관점에서 볼 때 유기체, 즉 생물시스템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들은 그 부분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전체의 특성들이다. 이 특성들은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연관성에서 발생한다. 이 시스템이 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분리되어 고립된 요소로 나뉘어 질 때 이러한 특성들은 사라진다. 우리는 모든 시스템에서 그 개별부분들을 식별할 수 있지만, 이 부분들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전체의 성질은 항상 구 부분들의 단순함과는 다르다.

시스템적 사고의 출현은 서구의 과학적 사고의 역사에서 일대 혁명이었다. 모든 복잡계에서 전체의 움직임이 그 부분들의 특성을 통해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는 믿음이 데카르트적인 패러다임의 핵심이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분석적 사고방식은 근대 과학적 사고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으로 기능해왔다. 20세기 과학의 가장 큰 충격은 시스템이 분석에 의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시스템을 이루는 부분들의 특성은 부분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시스템 접근방식에서 부분들의 특성은 전체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시스템적 사고는 기본적인 구성재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조직원리에 강조점을 둔다. 시스템적 사고는 분석적 사고에 반대된다는 점에서 맥락적(contextual)’이다. 분석이란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잘게 나눈다는 뜻인데, 시스템적 사고는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그 대상을 보다 큰 전체라는 맥락 속으로 통합시킨다.

시스템이 분석에 의해 이해될 수 없으며, 전체 속으로 통합된다는 깨달음은 생물학보다 물리학에 훨씬 큰 충격을 주었다. 뉴턴 이래로 물리학자들은 모든 물리현상이 분명하고 확실한 물질입자들의 특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1920년에 양자론이 수립되자 물리학자들은 고전 물리학의 확실한 물질이 원자 이하의 수준에서는 확률의 패턴으로 해체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이 패턴들은 물질의 확률이 아니라 상호연관성의 확률을 나타낼 뿐이다. 원자 이하 수준의 소립자들은 개별적인 실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으며, 여러 가지 관찰과 측정과정에서의 상호연관성 또는 상호관계로만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소립자들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들 사이의 상호관계이며, 이 상호관계는 다시 다른 물질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관계이고, ...... 이런 식으로 계속되는 것이다. 양자론에서는 어떤 물질도 찾아낼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상호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양자론의 형식론에서 이러한 관계들은 확률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확률은 전체적인 시스템의 동역학에 의해 결정된다. 고전역학에서는 부분의 특성과 움직임이 전체를 결정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전체가 부분의 움직임을 결정한다.

생물학과 물리학뿐만 아니라 심리학을 비롯한 여타의 분야에서도 기계론적 사고에서 시스템적 사고로의 전환이 일어났으며, ‘시스템시스템적 사고라는 말은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를 중요한 과학적 운동으로 수립한 것은 베르탈란피(Ludvig von Bertalanffy)의 열린 시스템과 일반 시스템 이론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베르탈란피는 다른 유기체설 생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생물학적 현상이 기존의 물리과학의 방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필요로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과학을 떠받쳐 왔던 기계론적 토대를 전체론적 시각으로 바꾸어 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에 의하면 일반시스템이론은 전체성wholeness’의 보편과학이다.

일반 시스템 이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애매모호한 準形而上學的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온 전체성wholeness’의 보편과학이다. 그 정교한 형태에서 일반 시스템 이론은 수학분야에 속하며, 그 자체로는 순수하게 형식적이지만 여러 경험과학의 분야들에 적용할 수 있다.

베르탈란피의 전체성의 보편과학에 대한 관점은 시스템이라는 개념과 원리를 다른 연구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그의 관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다른 분야들 속에서 일반개념들, 심지어는 특수한 법칙들까지도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시스템과 연관되어 있고, 그 특정한 일반원리들을 그 성질과는 무관하게 시스템에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결과이다.” 살아있는 시스템이 생물개체에서 그 부분, 사회적 시스템,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은 현상들의 범위에 걸쳐있기 때문에, 베르탈란피는 일반시스템이론이 지금까지 고립되고 단편화되어왔던 여러 과학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이상적인 개념적 틀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베르탈란피는 자신의 예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72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후에 지금까지 생명, 정신, 그리고 의식에 대한 시스템적 개념들이 등장하여 분야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형식적으로 분리되어왔던 여러 연구 분야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베르탈란피가 일반 시스템 이론을 연구하는 동안, 자동조절 기계를 개발하기 위한 시도는 전혀 다른 연구 분야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분야는 이후 생명에 대한 시스템적 관점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여러 분야에서 이끌어 낸 이 새로운 과학은 의사소통과 제어라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합적인 접근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위너(Norbert Wiener)에 의해 촉발되어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이버네틱스는 등장하자마자 강력한 지적 운동이 되었다. 그것은 독자적으로 유기체설 생물학과 일반 시스템 이론을 수립했다. 인공두뇌학자들은 생물학자도 생태학자도 아닌 수학자, 신경과학자, 공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수준의 기술에 관여하면서 의사소통의 패턴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유기체 생물학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던 조직에 대한 주의의 집중은 사이버네틱스에서도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특히 위너는 생명을 과학적으로 기술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조직의 패턴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메시지’, ‘제어’ ‘피드백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동물과 기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의사소통과 제어의 패턴에서 생명의 핵심적인 특성인 일반적인 패턴의 개념으로 패턴이라는 개념을 확장시켰다. 그는 생명을 사물이 아니라 패턴으로 인식했다. 그는 1950년에 우리는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 속의 소용돌이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속되는 물질이 아니라 스스로 영속하는 패턴이다.”라고 말했다.

최초의 사이버네티스트들은 정신현상의 배후에 깔려있는 신경 메커니즘을 발견하고 그것을 명확한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기체 생물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이분법에서 물질적 측면을 다루면서 기계론에 반기를 들고 생물학적 형태를 탐구해 나간 반면, 사이버네티스트들은 정신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엄밀한 마음의 과학(science of mind)을 창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동물과 기계에 공통된 패턴들에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측면에서 매우 기계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밝혀진 정신현상의 시스템 개념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수많은 새로운 관점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로 뇌와 마음에 대한 통일된 과학적 개념을 제공하는 오늘날의 인지과학의 뿌리는 사이버네틱스의 초기까지 곧장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이버네틱스와 일반시스템이론은 사고의 틀이 근본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에 오늘날 일반시스템이론이라는 개념은 환원불가능한 통일체, 즉 모든 시스템에 적용되는 정합적인 윈리들의 집합의 의미로 사용되며,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개념과 상호 대체 가능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일반시스템이론이라는 개념 속에 사이버네틱스를 포함시켜 구분하지 않고 사용할 것이다.

 

3. 상호인과율(mutual causality)과 연기설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인과율에 대한 관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원인이 결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일방적ㆍ단일 방향적인 관계로 생각해 왔다. 메이시는 이러한 인과관계를 선형인과율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인과적 효과의 방향은 창조자에서 피조물로, 행위자의 행위(작용)에서 피행위자에게 나타난 결과로 향해 있다. 이 인과 모델이 의미하는 것은 결과 B에는 그것의 원인 A로 역추적할 수 없는 새로운 작용은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A 속에는 다름 아닌 바로 B 속에 있는 만큼의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탐구에 작용하고 있는 이 가정의 귀결은 결과 B 속에 있는 차별적 특징들은 반드시 원인 A 속에 있는 유사한 특징들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사한 원인들은 유사한 결과들을 산출하고, 서로 다른 결과들은 서로 다른 원인들로부터 나온다고 가정된다.

동일한 논리에 의해서 BC에 작용하고, 다시 CD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계속되는 인과의 고리들이 나타난다.

 

A B C D ㆍㆍㆍ

이 고리들은 마치 명령 계통처럼 일련의 결과들 속에서 인과적 추진력이나 효과를 계속해서 전달한다. 이 원인과 결과의 고리들에 의해 설명과 예상이 이루어진다. 설명이란 그 연결 고리를 역추적하여 무엇이 그 모든 것을 출발시켰는지를 발견하도록 계획된다. 예상이란 그 고리를 앞으로 추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가정은 현재에 관한 완전한 지식(비록 가설적이기는 하지만)으로부터 과거와 미래가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일 방향적 인과의 흐름은 선형적’(linear)이라고도 불린다. 물리학과 수학에서 선형적이라는 용어는, 그 공식을 도식화했을 때 직선을 그리는 균일한 진행을 의미한다. 정보 용어로 말하자면 선형적 인과관계에서는 입력이 전달한 정보의 양에 비례해서 입력이 출력을 결정한다. 하나의 예로 자판을 두들기면 글자를 찍어내도록 정해져 있는 타자기와 같은 단순한 기계를 들 수 있다. 타자기는 메모리에 저장된 정보들이 인쇄를 공동으로 결정하는 컴퓨터와는 대조적으로 자판 하나가 글자 하나를 찍도록 결정되어 있다. 통속적인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선형적이라는 용어는 예측 가능한’, 그리고 기계적인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선형인과율에 토대를 둔 서양 근세의 기계론적 고전 과학은 전체는 전체를 이루는 부분에 의해 이해될 수 있으며, 어떤 실체나 유기체의 본성은 그것의 물질적이며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구성요소로 환원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다고 전제했다. 이러한 분석적 방법은 수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루었지만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선형인과율은 결정론과 우연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로 귀결되었다. 선형인과율에 의하면 모든 원인과 잠재력은 초기 상태로 선형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고, 장기간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가정되었다. 그런데 면밀한 관찰의 결과 현상들이 그런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인과율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세계를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하나의 귀결로 나타났다. 우리는 초기상태에 의해 예정된, 진정 새로운 것은 나타날 여지가 없는 시계장치 같은 우주 속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이 우주는 우연한 법칙에 의해서 단지 통계적으로 결정되는 원자들의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활동인 것이다. 이 양자택일이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겪는 정신적 혼란의 한 요인이며, 이 양자택일의 바탕이 되는 선형인과율도 과학적 과제를 설정하고 증명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이 점차로 입증되었다.

일반시스템이론은 다양한 영역 속에 있는 일정한 것의 관찰을 토대로 하는 일종의 메타 학문으로서 단일방향 인과 개념들이 두 개의 변수를 지닌 문제들에는 타당하지만 다수의 변수를 지닌 복잡한 시스템에는 유익하게 적용된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과 함께 발전했다. 두 개 이상의 전자를 가지고 있는 원자들의 전자 궤도 패턴에서든, 자신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생명체적 유기체의 전기 화학적 패턴에서든, 변수들은 상호간에 조건이 되고 있으며, 또한 선형적 인과의 고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결과 시스템적 견해는 실체가 아니라 과정-그 과정 속에서 원인과 결과는 더 이상 범주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자동 유도 대공 미사일의 창안과 설계는 개념적 도약, 서로 상호작용하는 요소들의 시스템을 구상하는 방식을 제공했다. ‘피드백’(feedback)이라고 불리는-미사일이 스스로의 탄도를 감시하고 수정할 수 있게 해 주는-과정은 자연계에서 스스로를 유지하고 조직하는 생물학적 시스템의 능력과 유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은 분자든 포유동물이든 질서가 있고 의도를 가진 패턴들이 어떻게 부동의 원동자나 목적인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존속하고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네거티브 피드백(negative feedback)은 엔트로피의 힘에 대항해서 항상성(homeostasis)을 가지고 자신을 유지하는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의 작용을 설명할 수 있었으며, 반면에 포지티브 피드백(positive feedback)은 어떻게 시스템이 변화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고, 복합체가 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했다. 양자는 시스템이 어떻게 에너지와 정보의 교환과 처리를 통해서 통합적인 네트워크(networks)로서 작용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시스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로부터 나온 개념들과 데이터의 중요성을 표현하려고 할 때, 순환적 인과관계(cyclical causality), 호혜적 인과관계(reciprocal causality), 상호적 인과관계(mutual causality), 또는 상호결정(interdetermination)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했다.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시스템이론가들에게 이 인과관은 예정된 시계장치 같은 우주로서의 모형이든, 맹목적이고 우발적인 우연의 작용으로서의 모형이든, 자연에 대한 과거의 모형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과학에 종사하는 시스템이론가들에게는 자극-반응이라는 선형적 모형을 가지고 있는 행동주의(behaviorism)의 오류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사회과학자로 하여금, 예를 들면 학교, 직장, 주택, 그리고 건강 사이의 상호인과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분리된 원인들을 가지고 사회 문제를 진단하고 프로그램을 수립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고 설명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이러한 상호적 인과관을 지적 혁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그리고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의 중심으로 보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것을 ! 공생적이고, 협동적(synergistic)이고, 다원주의적이고, 상호주의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시스템 분야의 개척가인 아나톨 라포폴트(Anatol Rapoport)는 고대 세계에는 인과관계에 대한 과정 위주의 개념을 위한 분석적 도구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마고로 마루야마(Magoroh Maruyama)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상호인과율이 많은 비과학적문화들의 세계관이었음을 지적한다. 마루야마는 사실상 그러한 세계관이 여타의 세계에서, 그리고 전 역사를 통해 인간 사고의 대부분을 특징지어 왔으며, 이제는 현대의 서양이 시대에 뒤떨어진 선형적 견해를 폐기하고, 다른 세계를 뒤따라 잡아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불교는 이러한 인식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선형적 견해를 폐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을 때 불교는 시스템적 사고와 일치하면서 인간의 삶, 즉 윤리적인 측면에서 확실하고도 체계적인 내용을 지닌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을 최초로 비교 연구한 메이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시스템적 사고는 선형적 인과의 관점에서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불교사상을 조명할 수 있는 설명과 유비를 제공한다. 시스템이론은 또한 붓다가 가르쳤던 인과의 원리가 현상세계에 두루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폭넓은 자료를 제공한다. 한편 불교는 과정에 대한 시스템철학의 견해가 함축하고 있는 실존적ㆍ종교적ㆍ윤리적 의미를 드러내준다. 불교는 자기조직적 시스템들의 발생과 상호작용 속에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고, 고통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은 우리가 불교를 일반시스템이론과 함께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밝힌 것이다. 첫째, 우리는 시스템 이론을 통해 불교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불교의 진리가 종교적인 도그마가 아니라 현상 세계에 두루 미치는 보편적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고, 둘째, 과학이론인 시스템 이론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윤리적 의미를 불교를 통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시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고, 그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행동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할 때,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불교와 일반시스템이론을 상보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일로 생각된다. 일반시스템이론은 우리에게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불교는 그러한 세계 이해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의 답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시스템이론이 선형인과율로는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불교는 선형인과율로 인간의 행동, 즉 윤리를 설명할 수 없다는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주지하듯이 붓다 당시의 인도 사상계는 브라흐만(Brahman)을 창조신으로 생각한 바라문교[Brahmanism]의 전변설(轉變說)과 사대(四大)와 같은 요소들의 이합집산으로 세계를 설명한 자유사상가[śrāmaṇa; 沙門]들의 적취설(積聚說)이 대립하고 있었다. 붓다는 이들의 사상적 대립에 대하여 시작과 끝에 관한 견해에 의존하는(pubb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 aparanta-sahagatā diṭṭhi-nissayā)’것으로서 모두가 사견(邪見)이며 희론(戱論)이라고 비판한다. 붓다에 의하면 자아와 세계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신은 동일한 것인가 별개의 것인가, 열반을 성취한 여래는 영원히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자아의 본질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자아와 세계는 스스로 생긴 것인가 다른 것이 만든 것인가 등을 거론하는 것은 모두가 시작과 끝에 관계되는 논의로서 사견(! )이다.

시작과 끝은 실체적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과 바다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다. 강의 끝과 바다의 시작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흐르는 물을 바다와 강이라는 개념으로 구분하여 실체시한다. 이때 강의 끝과 바다의 시작이 문제된다. 이와 같이 시작과 끝은 개념으로 사물을 분별할 때 나타난다. 즉 개념을 실체화할 때 시작과 끝이 문제되는 것이다. 붓다가 시작과 끝에 관계되는 논의를 사견이라고 비판한 것은 개념을 실체화 한 실체론을 비판한 것이다.

붓다는 실체적 개념을 놓고 대립하는 견해들은 결코 윤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영혼과 육신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들 주장의 의미는 한 가지인데 갖가지로 다르게 주장될 뿐이다. 만약 영혼이 곧 육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범행(梵行;윤리적 실천)이 있을 수 없으며,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고 해도 범행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 이변(二邊)을 따르지 말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중도(中道)로 향할지니, ..... 소위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

영혼이 곧 육신이라는 주장은 자유사상가들의 견해이고, 영혼과 육신이 다르다는 주장은 바라문교의 견해이다. 붓다는 이들 견해가 모두 인간의 윤리적 실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중도, 즉 연기설에 의지할 때 우리는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 이들 견해는 윤리적 실천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일까?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떤 사문과 범지는 일체는 모두 숙명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문과 범지는 존우(尊祐)의 조작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어떤 사문과 범지는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비구들이여, 숙작인(宿作因)이나 존우작인(尊祐作因)이나 무인무연(無因無緣)에 의지하면 거기에는 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을 수 없고, 노력도 있을 수 없으며, 이 행위는 해야 하고 이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형인과율에 의해 나타나는 결정론과 우연론의 모순 대립을 본다. 메이시는 이러한 대립적인 비불교적 견해들은 그 견해들을 규정하고 분류하는 도식이 제아무리 다를지라도 선형적(線形的)이다. 베다의 관점에서 변화는 그것을 진실된 것으로 보든 거짓된 것으로 보든, 영원불변하는 실체로부터 비롯되거나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비베다적 논법에 의하면 이러한 인과관계는 철저히 부정되거나 철저한 결정론으로 변형된다. 인과율을 긍정했든 공격했든, 이들은 인과관계를 단일 방향적인 것으로 인식했다.”고 지적한다. 인과관계를 단일 방향적으로 인식하면 결과는 원인에 의해 결정된 것이 된다. 과거에 존재한 원인에 의해 미래의 우리의 삶이 결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인정할 수가 없다. 우연론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삶이 현재의 행위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미래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을 선택할 수가 없을 것이다. 붓다는 이와 같이 자유의지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선형인과율적 사고를 비판했다.

붓다의 연기설은 인과관계를 선형적 일방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관계로 본다. 붓다의 연기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것이 있는 곳에 저것이 있고(imasmiṃ sati idaṃ hoti),

이것이 나타나면 저것이 나타난다(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이것이 없는 곳에 저것이 없고((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imassa nirodhā idaṃ nirujjati).

이것과 저것은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나타난다.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존하면서 나타나 있는 현상일 뿐 이것이라는 존재가 저것이라는 존재의 원인이 아니다. 즉 이것과 저것은 시간적으로 선후관계에 있는 실체로서 선형적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인과관계에 의해 함께 나타난 패턴이다. 따라서 연기설에 의하면 근본 실체나 제일 원인(시작)은 없다. 붓다는 이러한 상호인과 관계에 있는 패턴을 법(; dharma)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법은 문법적으로 명사적이라기보다는 동사적이다. 붓다에 의하면 명사적 의미의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이 개념을 조작하여 실체화한 것이다. 붓다는잡아함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보는 자아()는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자아는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사라지나니 업보(業報)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 즉 작자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행위 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에 있는 현상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과정,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作者]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면 착한 사람[]이다. 이것이 무아설의 근본취지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도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즉 인간의 본질은 업이다.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며, 업의 친척이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행위의 주체를 자아로 보는 생각에서 우리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대립한다. 주체는 객체가 될 수 없고,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는 행위를 통해 객체와 관계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체와 객체는 별개의 사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행위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며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대사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내 몸은 이렇게 외부의 물, 공기, 음식 등이 들어가고 나가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을 차단하면 몸은 존재하지 못하고 사라진다. 정신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며 유지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떤 정신적 작용도 나타날 수 없다. 몸도 마음도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유지된다. 따라서 업보를 자아로 보는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인연이 되어 존재한다. 주체가 없으면 객체가 없고,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다. 이와 같이 무아설에 의하면 주객의 분별, 시작과 끝의 분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이러한 연기설과 무아설이 불교 윤리의 규범적 근거가 된다. 우리의 삶은 업을 통해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 함께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우리는 그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가 항상 문제된다. 내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될 것인가 원수가 될 것인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지난날의 원수를 친구로 만들 수도 있고, 지난날의 친구를 원수로 만들 수도 있다. 자연과 환경을 훼손하고 더럽히면 우리는 훼손되고 오염된 자연과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가꾸면 우리는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 내가 그 사람의 친구가 되느냐 원수가 되느냐,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살 것인가 오염된 환경 속에서 살 것인가는 나의 선택과 행위, 즉 업에 의해 결정된다. 이와 같이 업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과 행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즉 규범성이 주어진다.

연기를 깨닫지 못하고 나와 남을 분별하고,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면 나와 남이 대립하고, 인간과 자연이 대립한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문제는 이러한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붓다의 판단이다. 따라서 붓다는 괴로움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 무명을 벗어나야 연기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기의 자각은 우리에게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은 분리될 수 없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의식을 갖게 한다.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신체나 자신의 정신이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로 확장된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 속에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대립하지 않고 합일된다. 남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된다. 모든 것을 내 몸과 평등하게 대하는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현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당위가 된다. 이와 같이 불교의 자비는 타자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상호인과관계로 존재하는 인간의 삶에 본유하는 당위이다.

 

4. 자비의 윤리

인간의 삶은 자기 이해에 토대를 둔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회와 윤리는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와 윤리는 서양 근세의 개인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으며 근세의 개인주의적 인간관은 근세의 자연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근세의 자연관은 기계론적이고 원자론적이다. 모든 운동은 목적을 지향한다는 목적론적 자연관과는 대조적으로 기계론적 자연관에서 운동은 역학적인 자연법칙에 따르는 기계적 운동이다. 그리고 자연세계는 맹목적으로 자연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원자들의 집합체다. 현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인간은 자연세계의 원자와 다를 바 없는 기계적이고 원자적인 존재이다.

사회계약론의 선구자 홉스에 따르면 인간존재 역시 기계적으로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물중의 하나일 뿐이며, 자기 보존의 본능을 가진 이기적 존재다. 인간들은 자연상태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무제한으로 자신의 힘을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경쟁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경쟁관계에서 자신의 힘의 확장을 위해 투쟁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홉스가 생각한 인간의 자연상태이다. 그의 사회계약론은 이러한 인간 이해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자연상태에서의 투쟁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을 터득함으로써 인간들은 상호간에 평화를 지키자고 계약함으로써 하나의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한다. 이로써 계약을 통해 상호간에 승인된 사회로서의 국가가 탄생한다. 홉스적 계약론은 개인들이 어떠한 본질적인 도덕적 권리나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본성상 인간은 모두 그들에게 허용 가능한 어떠한 수단이든지 사용할 권리가 있으므로, 도덕적 제약은 사람들이 힘에 있어서 대체로 동등할 때에만 발생한다. 따라서 홉스적 계약론 안에서는 착취보다 정의를 선호해야 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칸트적 계약론은 계약의 관념을 인위적인 도덕적 지위를 창출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인 도덕적 지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인간이 도덕적 관점에서 상관이 있는 것은 인간이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있거나 혹은 이득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 목적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칸트적 어구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도덕적 평등의 개념이다. 각 개인은 동일하게 중요하며, 동등한 고려를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동등한 고려라는 생각은 사회적 수준에서는 정의의 자연적 의무로 떠오른다. 우리는 정의로운 제도를 증진시켜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의무는 합의나 혹은 상호이익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이 가진 인격 그 자체에 기인한다.

유교의 성선설과 성악설을 연상케 하는 칸트와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을 개체적인 개인으로 이해하고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에서 윤리적 근거를 찾는다. 일본의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는 서양 근세의 개인주의를 인간존재의 한 계기에 불과한 개인을 가지고 인간 전체를 대신하려 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이 추상성이 일체 오류의 바탕이 된다고 주장한다. 근세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고립적 자아의 입장도 그 한 예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개인주의가 윤리문제를 주관과 자연의 관계로 한정함으로써, 서양 근세철학에는 인식의 문제에 대립하는 의지의 문제로서의 윤리의 영역이 주어졌다. 그 결과 자연에 대한 자기의 독립이라든가 자기의 자신에 대한 지배라든가, 자기의 욕망과 충족 같은 것이 윤리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있는 갈등과 위기는 이러한 개인주의적 인간관과 그에 기초한 윤리학에 기인한다. 카프라(Fritjof Capra)는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뗄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상호의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은 단일한 위기의 여러 다른 측면으로 파악되어야 하며, 단일한 위기란 인식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낡고 고루한 세계관의 여러 개념들에 찬동하고 있으며, 오늘날 전지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세계를 다루는 데 실재에 대한 부적합한 인식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식, 우리의 사고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의 급격한 전환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즉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 문화를 지배해왔고, 그 과정에서 현대 서구사회를 형성했으며, 서양 이외의 다른 사회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 전환해야 할 패러다임은 역학적 체계로서의 우주관, 기계로서의 인체관, 생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장소로서의 사회관, 경제성장과 기술발전으로 무제한의 물질적 진보가 이룩될 것이라는 신념, 등으로 구성된 서양 근세의 세계관이다. 이러한 서양 근세에 형성된 패러다임은 여러 분야에서 치명적인 도전을 받아 수정되고 있으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고 있다.

심층생태학, 시스템이론 등으로 알려진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 세계를 서로 분리된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전체로 보는 전체론적 세계관이다. 과거의 낡은 패러다임이 인간 중심적인 가치들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심층생태학은 생태 중심적인 가치들을 토대로 삼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세계관이다. 모든 생물은 상호의존성이라는 연결망 속에 한데 얽혀있는 생태학적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이다. 이러한 심층생태학적 인식이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이 될 때, 혁명적으로 새로운 윤리가 출현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시대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함께 새로운 윤리를 요청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새로운 변화를 선형인과율에서 상호인과율로의 변화로 파악한 메이시가 지적하듯이 불교의 연기법은 현대의 시스템이론과 상호인과율이라는 패러다임을 공유하고 있다. 인과관계를 선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상호적으로 보는 관점으로의 변화는 세계를 실체로 보는 관점에서 관계로 보는 관점으로의 변화이다.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짧게 요약한 시스템적 사고의 특성들은 모두 상호의존적인 것들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식별해 내는 것은 인간관찰자와 그의 앎(인식)의 과정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은 그에 상응하는 개념과 모형들에 의해 기술된다. 그리고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비해 더 근본적이거나 궁극적이지 않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선형적 일방적 인과론을 탈피하여 인과를 상호의존적으로 본다. 그리고 사물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며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한다. 시스템적 사고에 의하면 사물은 없고 상호관계만 있으며, 이 관계들의 그물망은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개체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무아설(無我說)과 일치하며, 모든 존재를 상호의존관계로 보는 연기설(緣起說)과 상통한다. 시스템 이론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 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불교는 붓다 당시 기존의 사상들이 인간의 바른 삶의 근거가 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나타난 윤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의 패러다임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의 패러다임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과학적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새롭게 요청되는 윤리를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주의에 입각한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구성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의. 정의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재산의 분배와 소유의 원칙에 관한 문제로서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사회를 구성하는 까닭은 자신들이 재산을 공정하게 분배하고 소유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사회계약론에 의하면 정의가 윤리의 핵심으로 작용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개념은 자비(慈悲)’. 불교나 시스템이론의 관점에서 세계는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식별해 내는 것은 인간관찰자와 그의 앎(인식)의 과정에 달려있으며,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비해 더 근본적이거나 궁극적이지 않다. 인간과 자연 자아와 타자의 구별은 인간 인식의 산물일 뿐 본래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아와 타자, 자연과 자아는 하나다. 이러한 인식에서 자아는 개인의 한계를 벗어나 타자와 자연으로 확장된다. 불교의 무아(無我)는 개체적인 자아의 부정이면서 동시에 자아의 무제약적 확장이다. 즉 자아와 타자를 분별하지 않는 것이 무아이다. 불교 윤리의 핵심 개념인 자비는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나와 평등하게 대하는 무아의 윤리적 실천을 의미한다. 기계론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나타난 갈등과 대립을 치유하기 위해 현대사회에서 요청하는 새로운 윤리는 자타를 분별하지 않고, 상호 연관된 공동의 삶을 추구하는 자비를 핵심으로 하는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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