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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작가님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답은 없고, 아주 많은 질문들을 갖고 서성인다고 말하는 소설가. 겨울의 광주에서 태어났다. 음악시간을 좋아하고, 리코더 불기를 좋아했던 명랑하고, 개구진 어린이였다. 가족이 이사를 많이 해서 초등학교를 다섯 군데나 다녔다. 집에서 유일하게 풍족했던 것은 책이었다. 한강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문예지를 읽었을 정도.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다. 대학 때는 "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인간과 신의 대화여야 한다"라는 유진 오닐의 말을 좋아했는데 지금까지도 언제나 내가 쓰는 글이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https://ch.yes24.com/Article/View/45918 [책읽아웃]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G. 한강 작가)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 (206회) 『작별하지 않는다』
[1]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
한강 소설들의 여성인물과 여성화자들은 오래도록 확고한 진리의 세계(근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으로, 그들의 언어는 늘 진리에서 비껴난 형식으로 발화되고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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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들은 이와 다르다. 그의 소설들에는 질문들은 무성하나 대답은 없다. 쓰고 있는 작가 역시 대답을 모른 채 질문의 형식으로 소설을 끌고 간다. 이것은 탈근대, 혹은 후기 근대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게다가 한강 소설들의 여성인물과 여성화자들은 오래도록 확고한 진리의 세계(근대의 가부장적 남성들의 세계)에서 밀려나 있던 주변인, 소수자, 타자들의 형상으로, 그들의 언어는 늘 진리에서 비껴난 형식으로 발화되고 전달된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은 육식의 세계에서 보장받지 못해 소멸해가는 소수자 여성의 존재성을 스스로 식물이 됨으로써 겨우 지켜낸다. 그리고 이처럼 주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하고 마멸되어가는 여성 등 소수자들의 존재성이 거대한 국가폭력을 만났을 때 어떻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들이 바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나는 그것을 ‘기억과 애도의 정치학’이라고 부른 바 있다. 한강의 소설은 루카치가 말한 근대장편소설의 미달태이고, 기본적으로 루카치가 단편소설을 이야기할 때 겨우 인정해준 ‘서정시’적인 성격을 가진다.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가 하나의 장편 서사라기보다는 몇 개의 작은 서사들의 연쇄로 이어진다는 것,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사실과 몽환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는 것 등인 것이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에 의해서는 보증될 수 없는 ‘미숙한 주체’들의 산문형식이다. 하지만 그 ‘미숙성’에서 새로운 언어가, 형식이, 사상이 탄생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소설은 이런 형식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 대부분이 젊은 여성작가들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이는 오래도록 민족 민중 계급 등으로 표상되어온 한국문학의 고질적 남근주의, 가부장주의에 대한 집단적 반란이라 할 수 있으며, 나는 이것이 어느덧 21세기 한국소설의 주류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강은 1970년생으로 이러한 당대 주류 한국소설의 리더, 맏언니의 자리에 있다.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우연인지 모르나, 한강의 이러한 문학적 위상을 귀신같이 알아채서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다.”(김명인 문학평론가의 페이스북 게시글)
[2] 인생과 문학에 뿌려진 씨앗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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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평소처럼 부엌에 모여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1982년 어느 날, 그는 몰래 그 책을 펼쳐 들었다. 각종 자상이나 총상으로 숨진 사람들이 참혹한 시신들,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 부상자들을 위해 헌혈을 하려고 병원 앞에서 줄을 끝없이 서 있는 사람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고, 그는 기억했다.
“제가 광주 사진첩을 처음 본 게 12살, 13살 즈음이었는데, 그 사진첩에서 봤던 참혹한 시신들의 사진, 총상자들을 위해서 헌혈을 하려고 병원 앞에서 줄을 끝없이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 이 2개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졌거든요. 인간이란 것이 이토록 참혹하게 폭력적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집에 머물지 않고 나와서 피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게 너무 양립할 수 없는 숙제 같았어요.”(정연욱. 2021.10.31.)
인간과 세상에 대한 비의가 비어져 나온 순간이었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정말 다 죽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사람은 왜 다 죽는 걸까. 어떤 사람들은 또 왜 아플까. 나는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고민은 깊어졌다. 혹시 책 속에 의문과 고민에 대한 대답이 있지 않을까. 고민으로 진지하게 책을 읽었다. 뜻도 모르지만,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럼에도 책에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주는 책은 없구나.
“다들 정말 훌륭하고, 나이 많은 분들이 쓰신 책이지만, 결론은 항상 이들도 나처럼 잘 모르고, 내가 고민하는 것들이 이들에게도 큰 고통이었단 거였어요. 우린 다 비슷하구나. 답은 없네.”(채널예스, 2011.12)
[3] 글쓰기는 질문의 유력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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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꿈꾸는 소설이었다. 결국 내가 꿈꾸는 방식의 소설은 내가 쓸 수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두려운 마음으로, 머뭇거리며 쓰기 시작했다.”(「문학적 자서전-기억의 양지」)
왜 글쓰기, 더구나 소설 쓰기였을까. 글쓰기는 답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지만, 때로는 질문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 질문을 가지고 서성거렸던 그에게 글쓰기는 질문의 유력한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사춘기 이후로 늘 질문이 많았어요. 나는 누구인가부터 왜 태어나서 왜 죽는 걸까, 고통은 왜 있나, 나는 뭐 할 수 있지, 인간이란 건 뭐지. 이런 질문들이 늘 괴로웠고요. 그걸 질문하는 방식이 글을 쓰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게 되었죠.”(신연선·오은, 2021. 9. 23)
[4] 고전적 서사와 진중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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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소설, 특히 장편 소설은 그 시기에 저에게 중요한 질문을 끝까지 완성해 보는 그런 거예요. 질문의 끝에 어떻게든 도달을 하면 그 다음 질문이 생겨나고요. 그러면 다음 소설에`서 그 질문을 이어가고 그래요. 질문을 완성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닌데요. 그 질문에 끝까지 가보는 것, 그 자체가 답인 것 같아요.”(신연선·오은, 2021. 9. 23)#“고전적 서사와 진중한 문장”…동세대 작가와 다른 출발
“한강의 초기작들은, 인물들이 상처를 대면하고 그를 확인하는 순간에 결말을 맺는다. 인물들의 남은 삶은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한강은 이 과정을 소설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외면하려고만 하던 과거의 상처를 직시함으로써 이를 이겨낼 수 있다는 진실을 말하고자 함을 볼 수 있다.”(김선희, 2013.8)
소설집 『여수의 사랑』이나 장편소설 『검은 사슴』을 비롯해 한강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 주류를 이룬다. 상처의 근간에는 부모의 죽음이나 형제자매 죽음이 자리하고, 고아 의식을 지닌 인물도 자주 등장했다. 남성이 많고, 여성 인물들은 흔적만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서사 역시 인물들이 상처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먼저 자신의 상처나 욕망을 대면하는 순간에 집중되는 경향이 많았다.
한강의 이 같은 초기 작품 경향과 스타일은 같은 세대 작가들의 소설 경향과 상당히 달랐다. 즉,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빈곤이 교차한 1990년대 작가들의 작품이 대체로 가볍고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의 서사적 형식이 강한 반면, 한강은 가난하고 “깊은 물속에서 힘겹게 숨을 참는 듯한” 어두운 정서를 바탕으로 고통스러운 현실 인식을 담고 있고, 문장 역시 진중했다. 동시대 신세대 작가들보다는 오히려 고전 세대와 더 가까운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올 정도였다. 김선희(2013.8)의 분석이다.
“한강은 그가 등단한 (19)90년대라는 당시의 문화적 상황과 문단의 흐름과는 다르게 고전적이며 서정적인 소설을 쓰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해체적이거나 영상적이거나 키치 스타일이 범람하는 1990년식 포스트모더니즘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고전적인 스타일은 역설적으로 낯설게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제5화에서 계속)
[5] “여성과 환상성으로 확장”…가면의 인간성 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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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단편 「내 여자의 열매」를 기점으로 여성과 몸으로 주제의식을 확장하는 한편, 강렬한 환상성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와 함께 과거의 상처보다는 현재 서로간의 몰이해와 소통 불능으로 고통을 겪는 인물들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몰이해와 소통 불능이 인물들을 괴롭게 한다. 현재 발 딛고 있는 시점에서 고통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고통은 사랑하는 이와의 소통 불능이다. 그리고 소설이 바로 이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김선희, 2013.8, 24쪽)
[6] 인간성 질문 위한 극단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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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어떻게 보면 삶을 껴안는 것이 어려웠던, 그럼에도 삶을 껴안고자 몸부림치는 여자들, 그래서 인간이 되기를 거부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한강 작가의 설명이다.
“주인공 영혜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식물이 되려고 합니다. 이 극단적인 서사를 통해 저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보려고 했습니다. 어려운 질문이지요. 인간에 대한 질문은 저에게 중요한 것이라서 앞으로도 계속 질문하면서 써 나가고 싶습니다.(폭력성에 대한 저항이 주요 메시지인가요) 인간의 폭력에 대한 고통이 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우리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향하게 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년이 온다’를 쓴 후 더욱 그 고민을 더듬어 가게 됩니다.”(전승훈, 2016.5.18.)
독자들과 가진 낭송회에서도,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저에게는 삶을 껴안는 게 언제나 숙제 같은 일이에요. 『채식주의자』도 삶을 껴안는 걸 어려워하는 자매의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토록 인간인 게 싫고, 그토록 삶을 껴안는 게 힘든 자매의 이야기. 다른 작품들 역시 삶을 껴안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걸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구요. 우리가 정말 살 수 있다면, 살아가야만 한다면 결국은 다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연결되는 거죠.”(임수빈, 2016.6)
[7] 삶과 회복으로…『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노란무늬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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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소설과 함께 살았다. 짧게는 1, 2년, 길게는 4, 5년. 소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늘 소설과 인물을 생각하고, 마음으로라도 소설 이야기와 인물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었다. 소설과, 인물들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가서 쓰려고 했다. 이는 자연히 소설을 삶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소설에 과격하게 기울어져 있지만, 오히려 균형 잡힌 상태라는 듯. 기울어진 중심이 잡혀서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듯. 그는 그렇게 소설을 살아서, 소설을 써나갔다.
“2년여 동안은 이 소설하고 살면 되니까, 그런 상태가 좋아요. 오히려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가는 사이가 힘든 것 같아요. (스스로 의지하기보다,) 제 모든 걸 소설에 기울여, 늘 생각하고 있는 그런 상태가 좋아요. 그게 균형 잡힌 상태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삶에 소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나는 이렇게 기울어져 있는 그런 상태.”(채널예스, 2011.12) 그것은 어쩌면 글쓰기 이외의 모든 일을 무나 무에 비슷하게 돌리는 일이기도 했다.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로, 글쓰기 외에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기억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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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폭력성에도 살아내야 한다”
슬럼프를 가까스로 통과한 뒤, 일 년 반 동안 계간지 『문학과사회』에 소설 중반까지 연재했고, 그 후 다시 일 년 반쯤 고치며 다시 써나갔다. 예정보다 더디게 2010년 2월에야 네 번째 장편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를 발표할 수 있었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채널예스, 2010.6)고, 그는 기억했다.
“두 번째로 주문한 커피가 식지 전에 나는 머그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가슴이 뜨겁게 덥혀갔다. 유리잔에 담긴 찬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물기 묻은 손을 주먹 쥐어보았다. 그러자 싸우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이었다. 나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9쪽)
소설은 화가 인주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후 친구 정희가 인주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조사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결혼한 뒤 뱃속에서 세 아이를 잃었고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기도 했던 정희는, 자신의 친구이자 화가인 인주가 죽자 인주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평론가 석원은 인주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신화화하려고 한다. 친구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정희와, 이를 막으려는 석원. 결국 자신까지 죽음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음모에 맞서 정희는 끝까지 진실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빗발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끈덕지게 와이퍼가 빗물을 닦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차체가 거세게 흔들린다. 나는 숨을 토한다. 쒜엑 쒜엑, 거친 숨이 허파를 찢으며 울린다. 두 눈을 흡뜬다. 고개를 비튼다.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울부짖는 사이렌이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 팔로 물속에서 파란 돌을 건져 올린다. 누군가가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386-387쪽)
소설에는 중요한 현대 과학 이론인 ‘빅뱅 이론’을 비롯해 과학 내용이 자주, 적잖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한강의 설명이다.
“빅뱅 이론을 단순히 소도구로 보지 않았다. 소설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학 얘기들에 매료되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처음과 끝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흥미로웠다. 내가 인간인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 경외감, 전율을 딛고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채널예스, 2010.6)
그는 언제 어떻게 빅뱅 이론을 비롯해 소설에 나오는 여러 과학 이론, 특히 현대 천체물리학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을 쌓았던 것일까. 20대 후반 불교에 빠져 있던 그는 삼십대 후반에 한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읽었다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십대 후반에는 불교에 깊이 빠져 있다가 나왔고, 삼십대 후반에는 한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읽었어요.”(김연수, 2014.9)
그는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소설에서 가장 그리고 싶었던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언니를 잃었던 ‘당신’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왜 자신이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들려준다.
“회복이라는 것에는 결별과 배반이 숨어 있다고 생각해요. 회복되기 전의 고통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이 회복되는 게, 회복되지 않은 채로 죽었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에 대한 결별이자 배반이라고 느껴요. 그런 의미에서, 영원히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마지막 기도는 죽은 언니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신의 과오와 고통과 슬픔에서 영원히 등을 돌리지 않고자 하는 기도이기도 해요. 그런데 그 기도가 역설적으로 회복을 향하는 기도가 돼요. 자신을 허물고 자신 밖으로 간절하게 빠져나가고자 하는 자의 기도라는 점에서요.”(김연수, 2014.9)
인간이 상처를 입거나 이 상처에서 회복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인생에서 신은 없는 것일까. 한강의 이야기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을 믿어본 적이 없어요. 믿고 의지하려고 애써본 적도 있는데, 잘 안되었어요. 이십대 후반에는 불교에 깊이 빠져 있다가 나왔고, 삼십대 후반에는 한동안 천체물리학 책을 읽었어요. 신적인 것, 신성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저의 세계에 우리를 구원해줄 신은 없어요. 인간은 스스로 병들고 스스로 회복하는 존재라고 믿어요.”(김연수, 2014.9)
“자연과학 책을 읽으면서, 오랜 의문이었던 인간의 폭력성과 함께 앞서 말한 신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이 불 속을 기어 나오면서 깨끗한 공기 쪽으로 배를 밀고 가는 장면이 있는데, ‘살아내야 한다’는 대답을 그렇게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김연수, 2014.9)
안데르스 올손 노벨문학상 위원장은 “좀 더 서사에 기반한 책”이라며 “우정과 예술에 관한 크고 복잡한 소설로, 슬픔과 변화에 대한 갈망을 강렬하게 드러낸다”고 평가했다.
[8] 현대사의 고통으로 대선회… 「안티고네」 같은 『소년이 온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241025515136?OutUrl=naver
“결국 저에게는 같이 겪자는 마음만 남았어요. 또 하나, 초를 밝히는 것. 이 소설 전체가 초를 밝히는 일이 됐으면 해서 제1장에서 동호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초를 밝히고, 에필로그에서 ‘나’가 동호랑 소년들을 위해 초를 밝혔어요. 그러니까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 초를 밝히는 것, 그 두 가지만 하자고 생각했어요.”(김연수, 2014.9)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부터 수면의 질이 오랫동안 나빴어요. 악몽을 자주 꾸고 몇 분 간격으로 꿈 때문에 깨고, 거의 못자고, 집 안에 어떤 그림자도 있는 게 싫어서 모든 곳에 불을 켜기도 하고요.”(정용준, 2022.1/2)
박용준의 마지막 일기에서, 그는 문득 동호라는 소년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참혹한 시신들에게 하얀 천을 덮어주는 동호, 그들의 머리맡에 촛불을 밝히는 동호, 도청에 남기로 결심하는 동호, 그리하여 진압 과정에서 죽음을 피하지 못한 동호…. 그 동호가 우리에게 오는 소설이면…. 5년 뒤, 10년 뒤, 20년 뒤, 30년 뒤, 천천히 넋으로라도 동호가 걸어오는 소설이라면….
“그(박용준) 일기를 보고 이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결국은 이 소설에서는 가장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때 떠오른 사람이 동호라는 소년의 이미지였어요. 이 동호가 제1장에서 참혹한 시신들에게 하얀 천을 덮어주고 그 머리맡에 촛불을 밝히잖아요. 그래서 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 촛불을 밝히고 흰 천을 덮어드리고, 그렇게 도청에 남기로 결심해서 죽게 된 동호가 우리에게 오는 소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80년 5월에서 5년 뒤, 10년 뒤, 20년 뒤, 30년 뒤, 천천히 이렇게 넋으로 걸어오는 걸음걸이를 상상했고, 그래서 제목도 『소년이 온다』가 됐어요.”(정연욱, 2021.10.31)
석 달째 희망 없이 증언록과 사진첩, 영상 등 각종 자료에 파묻혀 살던 그때, 그는 한 자료를 만나게 됐다. 1980년 광주의 마지막 날 5월 27일 새벽, 저항의 마지막 보루인 전남도청으로 다시 들어간 야학교사 박용준의 일기였다. 그는 생전 마지막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렇게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행위자로 나선 존엄한 이들이었구나. 아, 그들이 거기에 떠나지 않고 모인 것은 타인의 고통 때문이었구나. 이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9] 『채식주의자』로 부커상… 글로벌 작가로 부상
[10] ‘소설-살기’ 또는 ‘온몸으로 소설론’
https://www.segye.com/newsView/20241115508061?OutUrl=naver
“장면으로 제가 먼저 들어가서 그걸 느끼고, 그걸 문장으로 써요. 소설을 쓸 때, 마지막까지 그걸 더 넣으려고 노력해요. 그 순간의 생생함을 조금이라도 더 넣으려고 탈고할 때는 시도 많이 읽어요. 시들이 그런 일을 하잖아요. 순간의 생생함에 육박하는 일. 시의 상태에 가까워져서 소설 전체를 생생한 감각으로 훑고 지나가고, 쉬었다가 또 지나가고 계속 전류가 통하게 하려고. 그냥 생생하게 쓰려고 노력해요…. 글쓰기로 인해서 고통스러워진다기보다는, 고통으로 인해 그런 글이 나온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아요.”(정용준, 2022.1/2. 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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