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돌이킬 수 없다. 릴라는 내게서 완전히 떨어져나간 것이다.불현듯 그 거리감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릴라는 단순히 결혼만 한 것이 아니다. 릴라는 그저 결혼 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매일 남편과 한 침대에 눕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릴라의 어린 시절을 바친 노고의 산물을 두고 마르첼로와 그녀의 남편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릴라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스테파노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인정한것이다.
만약 릴라가 이미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참고 견디어낸 것이라면 스테파노와의 관계가 정말 끈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것이라면 릴라는 연애소설의 소녀들이 남자주인공을 사랑하는것처럼 스테파노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 평생 자신의 능력을 스테파노를 위해 희생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스테파노는 릴라가 자신을 위해서 희생했다는 것을 눈치조차 못 챌 것이다. 릴라 특유의풍부한 감성과 지적 능력, 상상력을 옆에 두고서도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몰라 결국에는 그녀를 망가뜨릴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불안감과 함께 상상이 지나쳤다는 생각이들었다. 이제 그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르멘, 아다. 질리올라처럼 해야 한다고, 릴라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걸맞은 삶을 받아들이고 교만한 마음을 지워내야 한다. 주제넘은생각을 버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이를 더 이상 비참하게 해서는 안된다.
[1] 1일 ~p.15~p.138
(1) “카라치 “ 라는 새로운 이름의 의미
▶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어, 리나, 몇 가지만 확실하게 하면 돼, 당신 이름은 이제 체룰로가 아니야. 카라치 부인이라고. 그러니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해. 물론 익숙하지 않겠지. 그건 나도 이해해“(~p.42) ……
식당에서 나이프를 챙겨오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순간적으로 나이프를 가져왔다고 착각했다가 이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호텔 욕조에 앉아서 신혼집에 있는 욕조와 비교해보았다. 자기 집 욕조가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욕실에 걸려 있는 수건도 나폴리 신혼집에 걸려 있는 수건보다 못했다. 하지만 그 욕조와 수건은 릴라의 것인가 아니면 스테파노의 것인가. 자신의 소유가 될 새로 산 아름다운 물건들이 지금 이 순간 화장실 문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인간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 더 힘들어 졌다. 모든 것이 카라치의 것이었다. 릴라 자신도 카라치 가문의 것이었다. 스테파노가 문을 두드렸다.(~p.49)
(2) 스테파노의 돌변한 태도
▶ 솔라라 집안사람들은 다르지. 그들이라면 돈을 불릴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내 말 똑똑히 들어. 당신이 그치들을 좋아하건 말건 나는 상관없어. 나도 마르첼로라면 끔찍해, 그 자식이 곁눈질로라도 당신을 바라볼 때면, 그 자식이 당신에 대해서 뭐라고 떠벌리고 다녔는지 생각만 해도 그 자식 뱃가죽에 칼을 쑤셔 넣고 싶다고. 하지만 그 자식이 돈만 벌어다준다면 나는 그자식의 가장 친한 친구도 될 수 있어. 왠지 알아? 돈이 없으면 이런 자동차를 살 수 없을 테니까.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옷도 살 수 없게 될 거고 집이며 살림살이도 가질 수 없게 될 테니까. 당신은 마나님노릇을 할 수 없게 될 거고 우리 아이들을 거지처럼 키워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의 그 곱상한 얼굴을 박살내버릴 거야.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도록 말이야. 알아들었어? 대답해봐!"(~p.42)
▶그는 두어 번 같은 말을 점점 소리를 높여가며 반복했다. 아주 먼 옛날, 태어나기 전에 이미 부여받은 임무를 되새기기라도 하듯이.'사내답게 행동해야 해, 스테파노, 지금 굴복시키지 않으면 편생 굴복시키지 못할 거야. 네 아내에게 자신이 계집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라고, 계집이라면 사내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열 받게 하지 마! 열 받게 하지 마! 열 받게 하지 말라고!"
▶ "레누, 결국에는 말이야. 리노 오빠나 미켈레나 별반 차이가 없어.
스테파노와 마르첼로도 마찬가지고."
"무슨 뜻이야?"
"마르첼로와 결혼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뜻이야."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적어도 마르첼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니까.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진심이야?"(p.95)
(3) 성교에 대한 대한 태도
▶ 릴라는 스테파노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발기된 성기 때문에 파자마가 텐트처럼 올라간 꼴로 자신의 가녀린 골반 위에 올라탄 그의 무게를 느꼈다. 떡 벌어진 스테파노의 몸을 보니 먼 옛날 그가 학교 에서 벌어진 경합에서 알폰소에게 창피를 줬다며 자신의 혀를 바늘로 찌르려고 했던 일이 생각났다. 사실 스테파노라는 사람은 한 번 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돈 아킬 레의 장남이었을 뿐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젊은 신랑의 얼굴에 그때까지 핏속에 조심 스럽게 숨기고 있던 돈 아킬레의 흔적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특성이었지만 드러내기에 적당한순간까지 감춰둔 것뿐이었다.
그렇다.(~.p.52)
▶ 스테파노는 파자마에서 뭉뚝한 성기를 꺼내 보였다. 릴라에게는 눈앞의 물건이 팔다리가 잘린 채 소리 없이 흐느끼는 인형 같았다.
그 인형은 릴라에게 "이제 한 번 느껴봐, 리나. 정말 멋지지 않아? 이만한 물건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다른 거대한 인형에게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릴라가 반항을 멈추지 않자 스테파노는 세게 뺨을 두 번 때렸다.
"지금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내일이면 네가 먼저 사랑해달라고 애원할걸, 지금보다 더사랑해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할 거야. 나는 내 말을 잘 들어야만널 사랑해주겠다고 할 거야. 그러면 넌 내게 복종해야 하겠지."(~p.54)
▶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니노이지만 나는 안토니오와의 키스, 저수지에서의 포옹과 애무를 생각만 해도 짜릿한 흥분을 느껴 내게사랑이 쾌락의 필수 조건이 아니야. 존경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남자가 사랑과 존경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소유라는 이유만으로쾌락을 위해 멋대로 여자를 굴복시키고 범했다고 해서 꼭 너처럼 짜증을 내고 비참해할 수밖에 없는 거니. 남자와 강제로 잠자리를 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 거니?"(p.69)
(4) 스테파노의 폭력에 대한 가족과 이웃의 반응
▶ 릴라는 자리에 앉지 않고 내내 서 있었다. 앉는 자세가 고통스러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일행 중 그 누구도, 한마디 말도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릴라의 어머니마저도 딸의 오른쪽 눈이 시꺼떻게 명들어 부어 있고 아랫입술이 찢어지고 팔에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p.57)
▶ 여인네들은 자신들을 사랑하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내들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다음에 어떤 식으로 주변에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언젠가 릴라도 뜨거운 맛을 한번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릴라가 얻어맞은 사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스테파노에 대한 호감도와 존경심이 높아졌다. 스테파노야 말로 사내구실할 줄 아는 남자인 것이다.
▶ 그 일이 일어난 후에 나는 릴라의 몸에 마르첼로의 몸이 닿기만 해도 릴라가 그를 죽여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던 릴라가 지금 스테파노에게는 어떤 공격성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아왔다. 낯선 남자는 우리 몸에 손가락 하나델 수 없지만 부모님과 남자친구나 남편은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뺨을 때릴 수 있다고 배우면서 자라왔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제대로 교육시키고 알아들을 때까지 다시 가르치기 위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식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스테파노는 혐오스런 마르첼로가 아니다 라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이자 자신과 결혼해 영원히 함께하기로 한 사람이기 때문에 릴라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려는 것이었다.(p.68)
(5) <작은 아씨들>의 의미
▶ 그 순간 릴리의 시어머니가 꼭대기 층 난간으로 얼굴을 내밀고 릴라를 불렀다. 릴라는 다급히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자기가 스테파노에게 속았다고 했다. 실은 스테파노도 그의 아버지와 똑같은 인간이었다고 했다.
"돈 아킬레가 인형 대신에 돈을 줬던 것을 기억해?"
"그럼."
"그때 우리는 그 돈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어."
"그 돈으로 작은 아씨들을 샀잖아."
"우리가 실수한 거야. 그날 이후 내 행동은 모두 잘못된 거였어"(~p.58)
(6) 릴라와의 일체감과 거리감
▶ 하지만 나는 릴라가 그 지경이 된 것을 보고 목이 메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엉망인 상태를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나를 찾지 않았다고 했을 때 눈물이 흘러내렸다. 릴라는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자신의 신혼여행 이야기를 냉정함이 느껴질 정도로 건조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나는 화가 나고 괴로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미묘한 기쁨을 느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나는 릴라가 도움을 원하고 보호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만 드러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우리 둘 사이의 간격이 예상치 않게 좁혀졌음을 느꼈다.
▶ 하마터면 나도 공부를 그만둘 거라고, 공부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없고, 나에게는 공부를 계속할 만한 눔력이 없다고 고백할 뻔했다.
내 결정이 릴라에게 위안이 될 것 같았다.
▶ 나는 내가 학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니노는 나나 릴라처럼 이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배운 것을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제 헛된 희망은 접어두고 부질없는 노력도 그만두어야 했다. 이미 오래전에 카르멘, 아다. 질리올라가 그랬고 결국에는 릴라도 그런 것처럼 나도 내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p.60)
▶릴라는 여전히 나를 친절하게 맞아주었고 자신의 욕조에서 목욕을하게 하고 자신의 화장품을 쓰게 해주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들려주는 소설 이야기에 거의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고 잡지에서 읽은 영화배우나 가수들에 대한 가십거리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속마음이나 은밀한 계획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릴라의 몸에 든 멍을 핑계로 스테파노가 폭력을 행사한 이유를 물으면서 그가 그런 짓을 한 것은 사실 그가 네 도움을 원하고, 너와 모든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고 싶어서라고 말하면 릴라는 비꼬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릴라가 나와의 관계를 끊을 생각은 없지만 예전처럼 내게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기로 했다는 것을 눈치했다. 릴라는 정말 모든 일을 알아채고 내가 믿을 만한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걸까.(p.121)
(7) 사회적 계급의 차이
▶ 니노의 동생과는 인사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를 떠오르게 하는 모든 것이 나를 괴롭게 했다. 하지만 알폰소의 아리송한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길을 걸으면서 그의 말을 되씹어보았다. 알폰소는 나라는 사람을 알고 함께 대화하고 같은 책상에 앉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자신의 권위를 폭력으로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두서없이 말하기는 했지만 알폰소는 내가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고 내게 그의 행동을 변화하게 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한 것이다. 여자인 내가 사내인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p.62)
(8) 부의 의미
▶ 목욕을 마치자 내 피부는 태어난 이래 가장 매끄러워졌고 머리는자연스럽게 부풀어 오르면서 윤기 흐르는 금발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온 '부'가 이런 것인가보다고 생각했다. '부'라는 것은 금화와 다이아몬드가 가득 찬 금고가 아니라 매일 몸을 담글 수 있는 이욕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빵, 살라미, 프로슈토 햄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널찍한 화장실에 전화가 있고 음식으로 가득 찬 식료품 저장고와 냉장고, 침실과 거실, 양쪽으로 난 발코니와 공부할 수있는 자그마한 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직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아기가 생기면 릴라는 그 방에서 아기를 잠재우리라.(pp.71-72)
(9) 외로운 릴라
▶ 그 무렵 릴라는 그녀가 즐겨 읽던 갖가지 여성 잡지에 나오는 모 델처럼 차려입고 다녔다. 그러나 아내라는 신분 때문에 유리병 안에 가갇혀 살고 있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돛을 넓게펼치고 항해하는 범선 같았다. 어쩌면 그곳은 애당초 바다가 없는곳일지도 모른다. 파스콸레도 엔초도 안토니오도 감히 새로 지은 건물들이 들어선 신시가지의 그늘 한 점 없는 새하얀 건물 사이를 지나 릴라의 아파트까지 가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거나 산책하자고 할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p.75)
(10) ‘니노’
▶ 영상 속의 그 장면은 내 느낌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기록물이었다.
그 장면에서 도나토 사라토레의 아들은 솔라라 집안이 꼭짓점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동네의 가치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따지고 보면 니노도 과거 우리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오래전 초등학교 시절에 펼쳐진 경합에서는 돈 아킬레의 아 들인 알폰소를 이기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니노는 우리 동네의 계급 구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구조를 이해하고, 싶어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니노에게 매료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똑바로 쏘아보지 않고도 무심한 시선만으로 미켈레와 마르첼로를 제압할 수 있는 금욕적인 왕자님같이 느껴졌다. 나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 영상에서라도 일어나기를 잠시나마 바랐다. 니노가 나를 그곳에서 데리고나가는 장면이 나오기를 바랐다. 릴라는 그제야 니노를 알아보고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11) 릴라에 대한 스테파노의 태도
▶ 릴라의 사악한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선한 힘이 나에게 있다고 인정해주니 왠지 으쓱해졌다. 차에서 내려 양장점에 가는 동안에도 스테파노에게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나는 위안을 받았다. 스테파노에게 표준어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허풍도 떨었다.
▶ 나는 릴라가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전쟁을 선포하고도 전혀 내색하는 법 없이 한 가지 결정만을 밧줄처권 붙잡고 절망의 미로 속을 거니는 그녀의 능력에 나는 화가 났다. 위험한 무기에 연결된 용수철을 튀어나가지 않게 누르듯이 릴라가 소으로 억누르고 있는 어두운 힘에 대해 스테파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릴라의 배를 바라보면서 매일 밤낮으로 스테파노가 그녀에게 억 지로 심어 넣으려는 생명을 없애기 위해 벌이고 있을 릴라의 전쟁을생각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궁금했지만 직접 릴라에게 물어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런 질문은 기분 나쁘게 생각할 테니까.(~p.122)
(12) 멜리나와 릴라
그래서 모든 사람이 멜리나에게 동정의 표시를 하고, 아다가 어머니를 외치며 달려가고, 스테파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모든 일이 해결되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아다를 뒤따라가는데 릴라만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멀찌감치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릴라는 멜리나의 딱한 모습에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 같았다. 델리나는 지저분한 모습으로 창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에 흠뻑것은 얇디얇은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삐쩍 마른 몸매를 옷 아래로 드러낸 상태로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힘없는 몸짓으로 인사를했다. 릴라는 이 모습에 상처받고 풀이 죽어 있었다. 멜리나의 혼란을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릴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지만 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멜리나를 아다에게 넘겨주고 릴라를 찾았다. 올리비에로 선생님 일과 안토니오가 내게 던진 독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릴라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p.130)
(13) 여성의 변화
▶ ...같은 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같은 반 친구들 같은 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주세피나 아주머니, 눈치아 아주머니나 마리아 아주머니를 제대로 바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오랜 시간을 두고 날이 갈수록 커지는 불안감과 함께 지켜봐온 것은 오직 어머니의 육신밖에 없다. 절뚝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를 옥죄어 왔고 끊임없이 나를 위협해왔다. 내모습에서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날까봐 언제나 두려웠다.
그날은 우리 동네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들은 신경질적이고 남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들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구부정한 자세로 있거나 아니면 성가시기 짝이 없는 자식들에게 끔찍한 욕설을 퍼부었다. 눈과 볼이 움푹들어가고 너무 삐쩍 말랐거나 거대한 엉덩이와 부어오른 발목에 가슴이 축 처져 뚱뚱했다.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었고 안아달라고 보채는 어린아이들을 치마에 달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때 당시 이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나 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 정도 많은 정도였다. 그런데도 여성스러운 매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소녀 시절에 옷이며 화장으로 그토록 뽐내고 싶어 했던 여성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어머니들은 남편과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육신에 잠식되어 날이 갈수록외모까지도 그들을 닮아갔다. 그렇지 않더라도 육체적 노동으로 노쇠하거나 병을 얻어 여성성을 잃어갔다.
그런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가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인가? 아니면 임신을 하면서? 남편에게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릴다도 눈치아 아주머니처럼 흉측해질까? 그 아름다운 얼굴에서 결국 페르난도 아저씨의 모습이 튀어나오게 될까? 그 우아한 걸음걸이가 두 팔을 한껏 벌리고 양반걸음으로 걷는 리노의 걸음걸이처럼 변하게 될까? 그렇다면 내 몸도 망가져서 언젠가는 내게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까지 나타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되면 교에서 배운 것은 모두 사라지고 우리 동네 사람들의 거친 억양과 태도가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유물론 철학자인 아낙시만드로스와 내 아버지, 시인 폴고래와 돈 아킬레, 화학원소가와 저수지, 그리스어 문법의 부정과거법, 헤시오도스와 솔라라 청의 무례하고 저속한 언어가 모두 시꺼먼 진흙탕에 뒤섞이게 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혼란스럽고 천박한 도시에서 으레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문득 나도 모르게 내가 릴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여기에 내 감정을 덧씌우고 있다는 것을 깨날았다. 그래서 릴라가 그다지도 낙담한 표정이었던 걸까? 작별인사라도 하듯이 다리와 엉덩이를 쓰다듬었던 것일까? 델리나나 주세피나 아주머니의 육체에 잠식당한 자신의 육체를 느끼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의 몸을 만졌던 걸까? 육체가 잠식당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고 역겨워하면서 어떻게든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옛 친구들을 찾았던 걸까?
어린 시절 교단에서 넘어진 올리비에로 선생님을 망가진 인형처럼 바라보던 릴라의 눈빛이 떠올랐다. 큰길을 걸어오며 가게에서 산부드러운 비누를 입에 넣던 멜리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릴라의 눈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구리로 된 냄비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는 돈아킬레 살인 현장을 우리들에게 묘사하던 릴리의 모습도 떠올랐다..
릴라는 돈 아킬레의 살인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고 주장했다. 마치 살인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에게 여의 육체가 증오에 불타올라 복수와 정의를 실현하고 싶은 조급함에 조각조각 분해되어 형체를 잃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던 그녀가 생각났다.(~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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