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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3)

by 책이랑 2020. 4. 17.

(1)  니노를 기다리며 자기가 동굴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레누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이 동굴 속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바깥에서는 소년소녀들이 대학이라 불리는 미지의 장소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어차피 나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이겠지만, 니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벌써 이스키아에 공부하러 가버린 걸까. 니노가 내게 준 잡지와 그의 기사를 시험 준비라도 하듯이 꼼꼼하게 공부해두었는데, 내게 글에 대해서 물어보러 오기는 할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내가 감정 표현에 너무 소극적이었던 걸까. 내가 자기를 먼저 찾기를 바라기 때문에 일부러 나를 찾아오지 않는 걸까 알폰스를 통해 마리사와 연락해 오빠에 대해서 물어야 하나. 하지만 무슨 핑계로, 니노에개는 이미 여자친구 나디아가 있다. 그런 마당에 그의 누이동생에게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묻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 아리아드네 >


(2) 릴라와 피누차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는 도나토 사라토레와 
그걸 지켜보는 리디아 아주머니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리디아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마음고생을 한 흔적을 보았다. 예전보다 넓적해진 얼굴과 눈빛, 공기가 빠진 듯 줄어든 가슴과 묵직해진 배에서 고통의 흔적이 보였다. 대한를 하는 내내 리디아 아주머니는 호인 행세를 하면서 릴라와 피누차를 상대하고 있는 남편에게서 한시도 불안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도나토 사라토레가 릴라와 피누자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겠다고한 순간부터는 내게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남편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나토 사라토레는 릴라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아이들은 다 내가 가르쳤단다."
그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도 들려왔다.
"그러니 너도 내가 가르쳐줄게."


(3) 니노의 강점=약점=?

▶ 니노는 심각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는 멋진 표준어를 써가며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우리 둘은 그런 식의 표준어사용법에 아주 익숙했다. 니노는 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코르토나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시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일을 자연스럽게 최근 토리노 광장에서 일어난 유혈 시위와 결부시켰다.

니노는 이민과 산업화의 관계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동의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니노도 이를 알아채고 내게 남부 지역 청년들이 일으킨 폭동이 경찰에게 참혹하게 진압당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경찰은 청년들을 나폴리 자식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모로코인들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파시스트, 선봉꾼, 무정부주의 노조원이라고 부르기도 해. 실상은 제도권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인데 말이야. .그들은 절망한 나머지 분노하면 모든 것을 나머지 분노하면 모든 것을 부숴버리는 아이들에 지나지 않아."

 나는 뭔가 니노가 들으면 좋아하니노가 들으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했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시간 내에 해답을 갖지 못하다보면 소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어. 잘못은 반항하는 측에 있는것이 아니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쪽에 있는 거야."

니노는 내게 진정 경탄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 말했다.

"맞아. 내 생각이 바로 그래."

나는 너무 기뻤다. 나는 니노의 칭찬에 고무되어 루소의 책과 갈리아니 선생님이 강요해서 읽은 책 내용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개 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찾는 법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4) 페데리코 샤보의 <'국가'라는 아이디어>

페데리코 샤보의 책을 읽어봤어?"

샤보의 이름을 꺼낸 것은 얼마 전 몇 페이지 정도 읽기 시작한 국가의 개념에 대한 책의 저자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도 그 작가에대해서 특별히 아는 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학교에서 자기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는 척하는 방법을 너무 잘 배워오지 않았던가,

니노는 대화를 나누다가 이때에만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나는 페데리코 샤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짜릿한 만족감. 짧게나마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니노에게 저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려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박식함을 강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니노의 강점이자 약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니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때 자기 힘을 얻었고 할 말이 없을 때 기운을 잃었다. 그때도 니노는 금세 표정이 어투워지더니 내 말을 가로막았다. 대화의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기방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방의 중요성을 인정받는 것이 시급하다면서 지방자치와 지방분권주의, 지역 경제를 배탕으로 한 계획 경제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하나같이 이때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이었다. 그래서 페데리코 샤보 따위는 내버려두고 니노가 대화를 이끌어가도록 했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열정을 보는 것이 좋았다. 흥분을 하면 니노의 눈빛에는 생기가 넘쳤다.

Federico Chabod 사학자

이탈리아 역사가이자 정치가
1901년 2월 23일, 이탈리아 아오스타출생 

1960년 7월 14일, 이탈리아 로마 사망

그는 이탈리아의 역사를 광범위한 유럽의 맥락에서 연결함으로써 전통적 고립에서 확장 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있다.

'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의 낭만주의에서 비롯되었으며, 개인처럼 국가에 어떤 개성~이 있다고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는데, 국가마다 다르다. 같은날씨나 같은 토양을 가진 지역이라는 개념에서 시작되어 점차 정치적인 의미를 띄게 되었다...는 식의 내용인 듯.



(5) 대학생인 니노와의 대화   vs. 그리고 릴라와의 대화의 차이는....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학년 말에 진급 확정 
성적표를 받아든 느낌이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나는 대하는 몇 년 전 릴라와 나누었던 대화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도 느꼈다. 릴라와 대화를 나누면 머리에 불이 환하게 밝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입에서 말을 가로채기라도 하듯 열렬히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면서 온몸에 전류가 이는 것과 같은 흥분을 느끼곤 했다.

니노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와 이야기할 때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무지뿐만 아니라 얼마되지 않는 나는 알지만 그는 모르는 지식도 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 나는 그렇게 했고 그가 자신의 생각을 내게 털어놓자 뿌듯했다.



(6) 니노

▶ 그날은 여기에서 진도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니노는 갑자기 이정도면 됐다고 말하더니 내 손을 덥석 잡고는 유려한 필체로 쓰인 자막을 그대로 읽는 것 같은 말투로 외쳤다.

"이제 평생 잊지 못할 풍경을 보여줄게."

그러더니 나를 소코르소 광장까지 끌고 갔다. 가는 내내 손을 놓지 않고 내 손에 깍지를 끼기까지 했다. 내 손을 잡은 니노의 손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둥근 호를 그리며 펼쳐진 한없이 푸른 바다의 모습은 기억에 없다.


그의 행동은 나의 마음을 흔들어놓고도 남았다. 그는 두어 번 머리를 매만지느라 손을 놓았지만 금세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잠시 니노의 친근한 행동이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았다. 니노에게 이런 행동은 남녀 간 우정의표시일 뿐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메초칸노네에서 내게 했던 입맞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조차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금 유행하는 새로운 관습일 뿐이라고, 요즘 젊은이들의 방식....



(7) 니노  vs. 릴라 = 이론 vs.과 현실?  
 캄파니아 지역을 지배하는 (카모라)에 대한  둘의 대화

 우리는 나폴리와 이스키아 섬을 포함한 캄파니아 지역이 어쩌다가 훌륭한 인물 행세를 하는 최악의 쓰레기들 손에 들어가게 됐는지에 대해서 함께 토론했다.

"그들은 약탈자야."

니노가 말했다.

"파괴자들이고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착취자들이지. 무더기로돈을 벌어들이면서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아, 건설업자들과 그들의변호사와 카모라와 왕정복구를 원하는 파시스트들과 기독교민주당원들은 마치 하늘에서 만들어진 시멘트를 신께서 직집 엄청나게 큰삽으로 언덕과 해안가로 던져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어."

셋이 함께 이런 논의를 했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 주로 말하는 폭은 니노였고 나는 이따금 『남부뉴스』지에서 읽었던 정보를 언급하는 정도였다. 릴라는 딱 한 번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는데 니노가 의당 리스트에 점주들을 끼워 넣었을 때였다.

"점주가 뭐하는 사람들인데?"

니노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놀랍다는 듯이 릴라를 바라보았다.

"상인들이지."

 "세금은 공동체의 경제를 계획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야 "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파스콸레 펠루소를 기억해

"아니."

"파스콸레는 벽돌장이야. 이 많은 시멘트가 없으면 그 애는 직장을 잃게 되겠지."

"아, 그래?"

"하지만 파스콸레는 공산당원이기도 해. 그의 아버지도 당원이었어. 법원에서는 파스콸레 아버지가 우리 시아버지를 죽인 거래. 우리 시아버지는 암시장 거래와 고리대금업으로 돈을 벌었어. 파스콸레는 자기 아버지랑 똑같아. 평화로운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그의 공산당 동지들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말이야, 우리 남편의 재산이 시아버지의 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나와 파스콸레는 아주친한 친구야."

"요점이 뭔지 모르겠어."

릴라는 자조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야. 사실 너있기를 바랐어."

찬가지야. 사실 너희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해할 수

그게 다였다. 릴라는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도 이야기할 때만큼은 평소처럼 공격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대한나누면서 실타래처럼 헝클어져 있는 동네의 삶을 이해할 수 있기르진심으로 바랐던 것 같았다.

 릴라는 사투리로만 이야기했다. '속임수 따윈 쓰지 않을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겠어'라고 겸허히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들을 진심을 담아 조합했다. 보통 때처럼억지로 사건들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릴라도 나도 그때까지 문화적·정치적 경멸감이 내포된 '점주'라 는 표현을 듣지 못했다. 둘 다 똑같이 세금 문제에도 무지했다. 우리 들의 부모님도, 친구도, 애인도, 남편도, 친척까지도 모두 세금은 없 는 것처럼 행동했고 학교에서는 정치에 연관된 것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릴라는 그런 말을 꺼내 그전까지만 해도 새롭고 흥미롭던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릴라와 의견을 나눈 다음에 니노는 다시 대화를 이끌어나가려고고 했지만 횡설수설하다 결국 브루노와 함께 지내면서 일어난 우스꽝스러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먹는 것이라고는 달걀 프라이와 햄밖에 없지만 그 대신 포도주를 엄청 마셔댄다고 했다. 그러다 자기 이야기가 민망하게 느껴진 듯했다. 마침 피누차와 브루노가 수영을 끝마치고 젖은 머리로 야자수 열매를 먹으면서 돌아오자 안도하는 눈치였다.



(8) 사뮈엘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에 공감하는 릴라

빌려주었던 사뮈엘 베케트 그러더니 갑자기 릴라는 내가 그녀에게 빌려주었던  사무엘 베키트의 『희곡 전집』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 책은 읽어봤어?"
니노는 책을 집어 들고 찬찬히 살펴보더니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면서 읽은 적이 없다고 인정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읽지 않은 책도 있긴 있구나."
"그래."
"한 번 읽어봐."
 릴라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책을 매우꼼히 읽었음이 느껴졌다. 예전처럼 단어를 적절하게 선택해서 인물과 사물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릴라는 감정을 담아용을 더욱 생생하고 현실감을 느낄 수 있게 묘사했다. 릴라는 의다는 감정을 담아 희곡 내
재을 기다릴 필요 없이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1961년 영어로 발표된...릴라는 위니라는 부인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위니는 극중에서 어느 순간 '행복한 나날들' 이라고 외친다고 했다. 그러면서리라 자신이 그 대사를 읊었는데 격앙된 나머지 목소리가 떨렸다.

'행복한 나날들' 이라니. 말도 안 되는 문장이었다. 왜냐하면 위니의 인생에서 행복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동에서도 생각에서도 행복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 말을 한 그날도 그전에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위니보다도 인상적인 인물은 댄 루니였다. 댄 루니는 장님이지만 괴로워하지 않았다. 시력을 잃은 인생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어야만 삶다운 삶을 살게 되지 않겠느냐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순수하게 살아가게 되지 않겠느냐고 자문하는 인물이었다.

"그 내용이 왜 마음에 들었는데?"

니노가 물었다.

"마음에 든 건지는 모르겠어."

아무튼 호기심이 생겼잖아."

생각하게 만들었지, 시력도 청각도 잃고 말도 할 수 없는 인생이더 삶답다니 대체 그건 무슨 뜻일까?"

원가 흥미를 끌기 위한 방편으로 쓰인 내용일 수도 있지.

"아냐. 그릴 리가 없어. 많은- 리가 없어. 많은 생각을 ....

...

"네 볼에도 입 맞출 수 있을까?"

"그럼."

입을 맞췄다. 닿을락 릴라가 승낙하자 니노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용한 입맞춤이었다. 쪽 소리 같은 것은 나지 않고.
니노는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목까지 땅에 파묻힌 인물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현재가 인간 내면을 밝히는 불과 같다는 묘사도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했다. 하지만 영감을 주는 매디와 덴 루니의 수많은 대사 가운데 릴라가 말한 부분을 정확하게 집어내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물론 장님에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데다 그 무엇도 맛볼 수 없고 촉감도 느낄 수 없는 상태에서 삶을 더 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 흥미렵다고 했다. 니노는 이 말의 의미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존재를 진정으로 충만히 즐길 수 있게 하는 데 방해가 되는 또든 여과장치를 없애버리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했다.

니노의 말에 릴라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도 생는데 완전히 순수한 상태의 삶은 자신은 두렵게 한다고 했다. 필고 그는 상담히 힘 있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했다.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삶 말하지도 못하고하는 삶, 숨기는 것도 없고 어떠한 틀에 지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지 않는 삶은 무형의 삶이야"

그는 하루하루 매시간을 행복하게 보냈다. 릴라가 내 책을 가지고 간 것도 이제는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다. 토론에 열중할 때 릴라는 점점 더 자주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니노가 릴라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다 뭐라고 대꾸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도산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노가 갑자기 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의견에 대해 확신을 되찾는 데 내가 도움이 되는 것처럼 나하고만 이야기를 했다. 나에겐 그것이 싸릿하게 느껴졌다.


사무엘 베케트 -<오, 행복한 날들>
1961년 영어로 발표하고 1962년 불어로 번역 발표한 작품.


해피 데이스 - 10점
사뮈엘 베케트 지음, 김두리 옮김/문학동네


 Arresting … Fiona Shaw as Winnie in Beckett's Happy Days
at the National Theatre, London, in 2007. Photograph: Neil Libbert

희곡 『해피 데이스』는 총 2막 구성이고, 등장인물은 50대 여자 ‘위니’와 60대 남자 ‘윌리’다. 태양이 작열하는 황폐한 광야의 언덕 꼭대기에 부인 위니가 허리까지 파묻혀 있고, 남편 윌리는 언덕 뒤에서 사지로 기어다닌다. 아무런 설명 없이 내던져진 이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이미지는 “또 천국 같은 날이야”라는 위니의 첫 대사와 함께 시작부터 충격과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해피 데이스』는 베케트의 작품 속에서 남성의 욕망과 공포가 깃든 시선으로 묘사되곤 했던 여성이 처음으로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인간 실존의 처절한 몸부림이라는 베케트의 주제가 치밀하게 설계된 대사·지문·호흡을 통해 빈틈없이 발현됨으로써, 그의 부조리극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압축된 정수를 보여준다.

“거기서 내 말 들려요? 제발 대답해줘요……”

실존과 소통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인간의 악착같은 헐떡임


과연 위니가 처한 현실을 ‘행복한 날’이라 부를 수 있을까. 위니는 기상종이 울리면 눈을 떠야 하고 취침종이 울리면 눈을 감아야 한다. 자기 의지대로 잠을 자거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몸의 절반이 언덕에 처박혀 있고 그 아래서는 개미들이 들끓는다. 허락된 것은 쉴새없이 떠들 수 있는 입, 그녀의 존재를 보여주는 물건들(양산, 안경, 돋보기, 칫솔, 치약, 약병, 권총 등), 그리고 그 물건들을 만질 수 있는 양손이다.

위니는 자신의 물건을 집착적으로 만지고 사용하고 들여다보며 일과를 보내는 와중에, 혼잣말이나 기도를 하고 언덕 뒤의 남편 윌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면서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받으려 한다. 하지만 윌리는 대답이 없다. 신문을 보거나 원하는 때에 잠들 수 있고 기어다닐 수 있는 윌리에게 위니는 애원한다. 대답하기 싫으면 손가락이라도 들어서 보여달라고. 위니가 줄곧 윌리의 존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도 있다고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윌리의 대사가 신문기사나 위니의 말을 그대로 따라할 뿐이라는 점에서, 위니의 대사조차 물건에 쓰인 글자·문학 구절·상투어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결국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위니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그토록 갈구하는 관계와 소통의 허구성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오 알아요 두 사람이 모였을 때?(더듬거리며)?이렇게?(보통 목소리로)?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본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도 그 한 사람을 보는 건 아니죠, 삶이 내게 가르쳐줬어요… 그것도. (38p)

귀먹었어요, 윌리? (사이) 말 못해요? (사이) 오 알아요 당신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죠, 당신을 사모해 위니 내 아내가 되어줘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아무 말 없었죠 레이놀즈 뉴스의 토막 기사 말고는. (84p)

그러나 이 악착같은 몸부림도 결국 육체와 시간의 감옥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낡고 소진해가는 물건들처럼 위니의 육체도 쇠락해가다 제2막에서는 언덕 안으로 목까지 빨려들어가 그 분주하던 손놀림마저 불가능해진다. 위니는 제1막에서 양손을 사용할 수 있을 때 곁에 있는 권총에 입을 맞추기만 하고 스스로를 쏘지 않는다. 제2막에선 결국 양손을 쓸 수 없게 되고, 움직일 수 있는 남편에게 자신을 쏴달라고 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다. 어떤 사건을 예감하며 권총을 주시하는 우리의 시선에 결국 당도하는 건 아무리 최악인 삶이라도 ‘끝나기 전에는 끝낼 수 없다’는 메시지다. 그럼에도 “행복한 날이 될 거예요”라고 거듭 외치는 위니의 모습은, 한정된 공간에 얽매여 막연히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의 무지와 삶의 잔혹성이라는 베케트의 주제를 소름 끼치도록 실감하게 한다.



(9) 히로시마를 넘어서

 릴라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해서 책을 읽은 것을 과시할때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그때 릴라와 나노는 꽤나 열띤 논쟁을받었다. 니노는 전반적으로 미국을 비판하는 쪽이었다. 특히 나폴리에 미군 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매료되었고 더 알고 싶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가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행위는 전쟁범죄라는- 투로 말하자 언짢아했다. 릴라는 더 나아가 사실 이 경우 전쟁 그 자- 물로 중요하지 않다면서, 미국인들의 행위는 전쟁범죄를 넘어선 교만에 의한 범죄행위였다고 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을 기억해봐."

니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진주만 공습이 뭔지 몰랐는데 릴라는 알고 있었다. 릴라는 진주만 공습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해다. 진주만은 사악한 전쟁범죄였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는 것솔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끔찍한 보복 행위로 나치의 대량학사다 저질스러운 행위라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싸잡아서 범죄자 중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죄인처럼 처벌받아야 해.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해서 복종하게 하려고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처럼 말이야."

릴라가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어찌나 격렬하게 말을 쏟아부었는지 니노는 반론에 나서는 대신 침묵을 지키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니노는 릴라는 아예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내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제의 본질은 원자폭탄 투하의 잔혹성이나 그 행위가가지는 보복성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미국이 직면했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인류 역사상 제일 잔인했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었다.

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에 있을 모든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해서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신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진순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동의를 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게는 멋진 순간이었다. 그 순간 니노의 모습도 멋졌다. 나는 너무나 감동해서 고물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어느새 다시 금요일이 되었다. 그날은 너무 더워서 온종일 '더워서 온종일 물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새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1945 히로시마 - 10점
존 허시 지음, 김영희 옮김/책과함께

다큐멘터리 기사 한 편이 원자폭탄을 증언하는 인류의 기록이 되다
존 허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소설가이자 종군기자로서, 미군의 시칠리아 섬 상륙작전과 러시아 전선, 미얀마 정글의 전투 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1946년에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가 ‘원폭 1년 후’ 특집 기사를 기획했을 때, 전설적인 편집장 윌리엄 숀은 상하이에서 중국 내전을 취재하고 있던 그에게 전문을 보냈다. 대부분의 기사가 원자탄 자체에 대해서 쓰였을 뿐 히로시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루지 않고 있기에, 히로시마의 8월 6일을 다뤄준다면 훌륭한 기획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뒤 허시는 1946년 3월부터 3개월 동안 히로시마에 머물며 사사키 양을 비롯해 목사, 독일인 신부, 의사 2명, 재봉사의 미망인 등 원폭 생존자 여섯 명의 삶을 추적했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6일에서 9일까지 그들이 겪은 충격적인 체험을 3만 1천 자로 담아내었고, ≪뉴요커≫는 1946년 8월 31일자 전 지면에 광고, 기고, 논설, 기사, 그림 없이 허시의 기사만을 실었다. 잡지 역사상 가장 긴 기사였으며, 당일 30만 부 판매라는 기록도 세웠다. ≪뉴욕타임스≫는 1면 톱으로 ≪뉴요커≫의 파격적인 기사 게재 방식에 대해 썼고, ABC방송은 허시의 기사를 4개월간 방송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히로시마>라는 제목의 이 글을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저널리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 글이 두 달 만에 책으로 출간되자 손바닥만 한 크기의 90쪽짜리 책은 300만 부가 팔려 나갔다. 허시는 기사에서나 책에서 폭탄의 투하 이유, 제조 과정 그리고 이것이 냉전과 미.소의 대결에 준 영향 등은 다루지 않았다. 이 책이 출간되고 40여 년이 지나 존 허시는 이 책의 주인공들을 찾아 다시 히로시마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들에 관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을 ≪히로시마≫의 마지막 장에 60쪽에 걸쳐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기록했다. 이때에도 그는 6인의 삶 그 자체만을 다뤘다. 종전을 코앞에 둔 상황임에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나 계속되는 공습으로 지쳐가던 사람들의 심리 또한 그대로 담겨 있다. 펄 S. 벅은 이 책을 “양심에 비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한다”라고 했으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위대한 저널리즘 작품”으로 꼽았다. 또한 하워드 진은 “이 책을 필두로 원폭 피해자의 증언록들을 읽고 나서 철저한 평화반전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949년에 원작의 6인 중 한 명인 다니모토 기요시의 번역으로 출간되었으며, 2003년에 이시카와 긴이치(石川欣一) 마이니치신문사 문화부장과 아케타가와 도루(明田川融) 법정대학 강사의 5장 추가 번역으로 소개되었다. ≪1945 히로시마≫는 한국에서 세 번째로 출간되는 것이다. 1986년에 분도출판사에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의 번역으로, 2004년에 증보판이 또 한 번 소개되었다. 이 책은 인류의 양심을 뒤흔드는 전쟁에 관한 위대한 고전이 되었다.
존 허시는 “저널리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목격하게 하지만, 픽션은 독자로 하여금 역사를 살게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논픽션 장르에 소설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접목시킨 새로운 형태의 저널리즘을 선보인 그가 히로시마 생존자 6인의 증언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6인의 생존자를 비롯해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역사의 목격자에 그치지 않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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