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는 전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밀라노나 러시아 연방이면 몰라도 나폴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릴라의 통제할 수 없는 머리가 지어낸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자신에게 순정을 바치고 있는 가여운 엔초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멀리, 영원히 도망가라고. 모든 것을 이룰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고싶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p.22
“Leave, instead. Get away for good, far from the life we’ve lived since birth. Settle in well-organized lands where everything really is possible. I had fled, in fact. Only to discover, in the decades to come, that I had been wrong, that it was a chain with larger and larger links: the neighborhood was connected to the city, the city to Italy, Italy to Europe, Europe to the whole planet. And this is how I see it today: it’s not the neighborhood that’s sick, it’s not Naples, it’s the entire earth, it’s the universe, or universes. And shrewdness means hiding and hiding from oneself the true state of things.”
― Elena Ferrante, Those Who Leave and Those Who Stay
<릴라에 대해 비난하는 니노>
"아들을 낳았어 아니면 딸을 낳았어?"
"아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나는 용감해. 지나칠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도무지 현실과 타협할 줄을 몰라. 그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야. 자기 자신마저도 말이야. 그런 리나를 좋아하는 게 힘들었어."
"무슨 뜻이야?"
리나는 헌신이 뭔지 몰라."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아니야. 리나는 정말 문제가 있어. 생각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심지어는 성관계도 그랬어."
성관계도 그랬다는 니노의 마지막 말에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니노는 릴라와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나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릴라와의 성관계까지도 그 부정적인 감정에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 내게 한 것인가. 나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아델레 부인과 타라타노 교수의 어두운 윤곽을 잠시 바라보았다.
불편한 감정은 불안함으로 변했다.
나는 '성관계도' 라는 니노의 말이 다음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서두이고 니노는 이 부분에 대해서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몇 년 전에 스테파노도 나에게 릴라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스테파노는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 동네 사람 중 그 누구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성관계를 입에 담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파스콸레가 아다와의 성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거나 그보다 심하게 안토니오가 카르멘이나 질리을라에게 나와의 성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들끼리는 추잡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식어버린 여인들에 대해서는 그런 이야기를했다. 그마저도 사내들끼리 하는 대화였다. 이성에게 대놓고 그런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니노는 내게 내 친구와 했던 성관계에 대 해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움츠러들었다. 이 이야기도 릴라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겠 다고 생각했다. ..
<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교수에 대한 니노의 비판>
나는 니노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가끔씩 일부러 살짝 팔을 스쳤다. 천과 천이 스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마음이 설겠다. 니노의 숫자 사랑은 여전했다. 니노는 이탈리아의 전체 대학생수를 언급하며 너무 많다고 했다. 그는 대학건물의 최대 수용인원과종신직 교수들의 실질 근무 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수많은 교수가 연구나 교육에 열중하지 않고 국회에 진출하거나 이 사회에 참석하거나 수익성 좋은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다른 직업을 병행한다고 했다.
<니노와 피에트로의 각기 다른의미>
어린 시절부터 니노를 알아왔지만 내게 그는 꿈같은 존재였다. 그를 내 곁에 영원히 붙잡아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유년 시절에 내가 간절히 원했던 대상이었기에 나에게 그는 구체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그와의 미래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피에트로는 달랐다. 그는 현재의 인물이었다. 새로운 세계의 경계를 나타내는 커다란 바위였다. 그곳은 합리적인 이성의 세계이자 아이로타 집안에서 내려오는 규율의 지배를 받는 영토였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에 의미가 부여되었다. 위대한 이상과 명문가에 대한 중배와 원리원칙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48
< 이슈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
최대한 단기간에 밀라노에서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수지 않고 내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기먹었다. 나는 손이 가는 대로 잡지며 책을 구입했다. 돈도 꽤 많이 썼다.
니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구『성적 취향에 대한 세 가지 수필』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당시 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조차 거의 모르던 상태였다. 그나마 아는 내용도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여기에 성에 관한 얇은 책도 두어 권 추가했다.
나는 예전에 교과 과목을 공부할 때 사용하던 방식을 따를 생각이었다. 시험 공부를 하고 논문 준비를 하고 갈리아니 선생님이 준 신문을 읽고 몇 년 전 프랑코가 내게 준 마르크시즘 관련 서적을 읽었을 때처럼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학습 하고 싶었다. 그 당시 내가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판단을 내리기는 어
<사회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학생운동권자들-
종래에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자들의 먹이가 될 것이기 때문>
.... 다. 파스콸레나 니노와 토론을 하기도 했고 쿠바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도 조금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다. 고향 동네의 치유 불가능한 빈곤을 직접 경험하고 릴라의 쓰라린 패배도 목격했다. 내 동생들은 나처럼 학업에 집착하고 학업을 위해 기꺼이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거부당했다.
나는 프랑코와 사회문제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때때로마리아로사와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대화의 내용은 한줄기 연기처럼 희미해졌지만 그들의 주장은 대략 이러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변화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 제국주의와 스탈린식 관료주의가 평 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주장이나 이탈리아를 위시한 유럽 노동당들의 개혁 정책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종속적인 유보 상태로 머무르게 할 뿐이다. 이러한 유보적 태도는 혁명의 불길에 찬물을 쏟아붓는 격이다. 그러므로 만약 세계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사회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면 결과적으로 수세기 후에는 자본주의가 승리하게 될 것이고 노동계급은 강제적 소비주의의 먹이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종의 자극제 역할을 했고 언제부턴가 나도 영향을 받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감정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 억지로라도 세계정세에 대한 최신 정보를 알아보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뭐든지 잘 해내려는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뭐든지 배우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정치에 대한 열정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는 계산하면서 서점 책장에 꽂힌 내 책을 흘끔 바라보다 황급히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갓 출판된 다른 소설들과 나란히 진열
...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
- 그러나 루디 두치키나 다니엘 콩 방디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폭력에 맞섰다. 하지만 남자들만 나오는 전쟁 영화의 주인공 같은 이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는 힘들>
자기 흥분해서 주제를 바꿨다. 마리아로사는 나를 밀라노에 있는 대학으로 초청하고 싶어 했다. 이른바 '멈출 수 없는 역사의 흐름'에나도 함께 참여하기를 바랐다.
"내일 당장이라도 출발하도록 해."
마리아로사가 재촉했다.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물론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주방에 둔 기름때가 잔뜩 낀 낡은 파란색 작은 라디오를 끼고 살았으니까.
"그럼. 정말 멋진 일이야."
내가 말했다.
"낭트에서 있었던 일도 라틴 구역의 바리케이드도 말이야."
마리아로사는 나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더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아로사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파리에 갈 계획이라면서 자기와 함께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순간 정말로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는 알겠다고,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밀라노에 가서 프랑스로 출발해 학생운동이 한창인 파리로 가는거야. 야만적인 경찰과 맞서 근래 들어 가장 격렬하고 용암처럼 뜨거운 열기 한가운데 내 몸을 던지는 거야. 수년 전 프랑코와 떠났던것처럼 이탈리아를 떠나는 거야.' 1마리아로사와 함께 떠나면 얼마나 멋질까.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여성 중에 유일하게 생각이 열리고 현대적인 여성이었다. 세계현황을 잘 알았으며 남자들 못지않게 정치적인 어휘를 능숙하게 사용했다.
마리아로시는 내게 감탄의 대상이었다. 그 혼란의 시기에 마리아 로사처럼 눈에 띄는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영웅은 루디 두치키나 다니엘 콩 방디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폭력에 맞섰다. 하지만 남자들만 나오는 전쟁 영화의 주인공 같은 이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는 힘들었다. 이들은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사상을 습득하고 그들의 운명에 가슴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마리아로 사의 동료 중에 니노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아는 사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니노와 함께 모험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함께 위험에 맞설 수 있다면 얼마나좋을까.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이제 부엌은 조용했다. 부모님은 잠들고남동생들은 아직도 길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욕실에서몸을 씻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에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 인간의 경험은 솔직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나는 민망했다. 얼굴이 빨개졌던 것 같기도 하다. 사회학적인 이유를 두서없이 늘어놓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인간의 경험은 어떤 것이라도 솔직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 특히 차마 이야기할 수 없고 우리 자신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일일수록 그렇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이 마지막 대답에 만족해했고 덕분에 나는 다시존경받게 되었다. 나를 초청한 여교수도 내 의견을 칭찬하면서 자기도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보고 내게 편지를 쓰겠다고 했다.
내 이야기에 여교수가 공감을 하자 떠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개념은 내 머릿속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그 후로 나는 마치 노래의후렴구처럼 그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나는 공적인 장소에서 이야기할 때마다 그 개념을 자주 언급했다. 때에 따라서 재미있게, 극적으로, 간결하게 또는 공들여 구상한 화려한 표현으로 구체화시켰다.77
<나는 어떤 면에서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다는 좋은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지금처럼 변하는 것이 나보다는 수월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런 격양된 분위기와 장소에 있는 것도 탈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응당 해야 할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이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꽤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난날에 놓친 것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 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 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두려워졌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내가 쌓 아온 노력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는 사람들로 꽉 찬 강의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85
<학생운동을 하면서 달라진 프랑코>
- 프랑스 학생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 계급투쟁의 성숙도가 충분한가?
프랑코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조금 전에 했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전의 프랑코가 아니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코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가면은 프랑코의 얼굴에 완벽하게 딱 맞았지만 그의 얼굴에서 과거의 넉넉함을 지워버렸다. 지금의 프랑코는 예전보다 위축되고 절제된 느낌이었고,
말을 가렸다. 언뜻 들으면 친밀하게 느껴지는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우리의 과거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왜 내게 편지를 쓰지 않았느냐고 투정을 부리자 프랑코는 내 말을 잘랐다.
"어차피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관계였어."
프랑코가 속삭였다.
대학에 대해서도 말을 흐리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끝내 졸업을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말 해야 할 일은 따로 있거든."
프랑코가 말했다.
"그게 뭔데?"
내 질문에 프랑코는 마리아로사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사적인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자 불편해 하는 눈치였다.
"엘레나가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데?"
마리아로사가 밝게 말했다.
"혁명이지."
그 말에 나는 비꼬듯 말했다. 89
...
마리아 로사 앞에서 새롭게 변한 나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아기가 조용해지고 실비아도 아기와 함께 사라진 다음 그들에게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나는 프랑코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 나는 내 전 남자친구의 의견에 반박할 기회를 찾았다. 나는 불쑥 프랑코의 의견에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뚜렷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 목표는 단지 프랑코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의 의견에 반박했다. 미리 생각해둔 표현을 거짓된자신감으로 포장했다. 나는 되는대로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계급투쟁의 성숙도에 의구심을 표했다. 현재로서는 학생 노동자 연합이 추상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자신 있는 척했지만 실은 두 사내중 한 명이라도 내 말을 끊고 다시 자기들끼리 토론을 시작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모두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아기를 눕혀 놓고까치발로 돌아온 실비아까지도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프랑코도 후앙도 내가 말하는 동안 조급하게 내 말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후앙은 내가 민중이라는 단어를 두세 번 쓸 때마다 동의를 표했다. 프랑코는 이 모습이 거슬렸는지 내게 비꼬는 투로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현 상황이 '객관적으로는 혁명적이지 않다는거야?"
나는 프랑코의 그런 말투를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놀리는 척하면서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내가 한마디를 던지면 프랑코가 즉시 응수했고 프랑코가 한마디던지면 나도 즉각 그의 말을 되받아쳤다.
"객관적' 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데?"
"행동에 나서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의미야." 95
"필연적이지 않다면 두 손 놓고 있어도 된다는 의미야?"
"아니, 혁명가의 의무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거야."
"프랑스에서 학생들은 불가능한 일을 했어. 교육 시스템은 기능을 상실했고 절대 바로잡을 수 없을 거야."
"하지만 프랑스 학생들은 상황을 바꾸어놓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맞아. 아무도 너나 다른 누구에게 공식적으로 현재 상황이 객관적으로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한 적은 없어. 학생들은 행동에 나섰어. 그게 다라고."
"그렇지 않아."
"아냐. 그래."
우리는 그런 식으로 한참 언쟁을 벌이다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비정상적인 대화였다. 내용 때문이 아니라 열띤 어조와 격의 없는태도 때문이었다.
마리아로사가 재미있다는 듯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나와 프랑코의 대화를 듣고 우리 사이가 평범한 대학 동창 이상이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줘."
마리아로사가 실비아와 후앙을 향해 말했다. 나와 프랑코를 위한 침대 시트를 찾기 위해 사다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둘은 마리아로사를 따라 나갔다. 후앙은 그녀의 귀에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프랑코는 잠시 바닥을 바라보았다. 미소를 참으려는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너는 여전하구나. 프티부르주아 아가씨의 모습 그대로야."
프랑코는 지난날 내가 그의 방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들킬까봐 96
<아무 때에서나 벌어지는 성폭행 시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나는 막 잠자리에 든 참이었는데 그가 내게 입을 맞추고몸을 만졌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의지와는 별개로 나는 물밀 드 이몰려오는 쾌락을 느꼈다. 놀라고 겁에 질린 그 시절의 소녀와 엘리베이터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지금 또 침실을 침범당한 여인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아델레 부인의 친구인 저명한 타라타노 교수와 베네수엘라 출신 화가 후앙은 결국 철도원이자 형편없는 시인이자 변변치 않은 신문기자인 니노의 아버지와 별다를 것 없는 사람들인가. 104
<니노를 꿰뚫어 본 마리아로사>
마리아로사는 학생운동에 니노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며 그런 사람을 잘 돌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잘 성장시키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는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소시민적 민주주의자나 전문 기업인, 맹목적인 현대화 신봉자의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했다. 우리는 함께 보낸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며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나는 호텔에서 가방을 찾아 나폴리로 향했다.
<리노- 경솔하고 깊이간 없는 인간 >
대상으로 자신의 매력을 기계적으로 발산한 것이었다. 그 사실은게 모욕감을 주었다. 릴라가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자리 잡은 것처리그녀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릴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여떤 기분일지 상상하니 씁쓸했다. 마치 내가 직접 니노에게 배신당하것처럼 화가 났다.
니노는 결국 릴라와 나를 모두 배신했다. 둘 다 그에게 굴욕당해고 그를 향한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 니노는 재능은 뛰어났지만 결국은 경솔하고 깊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땀과 체액을 홀리고 다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여성의 뱃속에 잉태되어영양을 섭취하고 형태를 갖춰가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부주의한 쾌)락의 잔여물처럼 남겨두고 다녔다.
나는 몇 년 전 니노가 나를 찾아 동네까지 왔던 때를 생각했다. 우리가 뜰에서 대화를 나눌 때 창문에서 니노를 본 멜리나는 그를 그의 아버지와 혼동했었다. 도나토 사라토레의 옛 정부는 그때까지만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부자간의 유사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멜리나가 옳고 내가 틀렸다.
니노는 자기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니노는원래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니노를 미워할 수 없었다. 찜통 같은 기차에 앉아나는 서점에서 니노와 재회했을 때를 돌이켜 보았다. 또한 니노의모습을 최근 일어난 모든 일과 내가 듣고 말한 문장과 단어에 비춰보았다. 그동안 추잡하지만 매력적인 성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어떤 행동을 하고 대화를 하고 책을 읽을 때도 나는 그 욕망을 떨쳐빌수 없었다. 장벽은 무너지고 관습의 족쇄가 풀리고 있었다.
<니노를 위한 변명>
시대의 분위기 여자들이 성적 해방?
니노는 그런 시대를 마음껏 즐기며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유의 강한 체취를 풍기며 밀라노 대학의 소란스러운 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리아로사가 사는 아파트의 무질서와도 어울렸다. 나는 마리아로사와 니노가 분명 연인 사이였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
니노는 자신의 지성과 욕망과 매력을 이용해 혼란스러운 세상에 서도 언제나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자신 있게 행동했다. 어쩌면 내 노를 그의 아버지와 같은 추잡한 욕망의 화신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 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도나도 사라토레와는 다른 문화권에속할 수도 있다. 실비아와 마리아로사도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그녀들은 여자들이 모두 니노를 원한다고 했다. 그가 여자들을 취 하는 것은 여자들이 원하기 때문이지 그가 강요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니 니노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었다. 욕망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 뿐이었다. 니노가 내게 릴라는 성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말했을 때그는 아마도 가식의 시대는 끝났으며 쾌락에 책임감을 결부시키는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니노의 본성이 자기 아버지와 닮았더라도 여자에 대한 그의 열정은 자기 아버지의 것과는 달랐다.
니노가 얼마나 많은 여자의 사랑을 받고 얼마나 많은 여자를 사랑했는지 생각하다 보니 나폴리에 도착할 무렵에는 놀랍고도 실망스럽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즐기는 게 뭐가 나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든 여자가 니노를 원하고 니노는 니노대로 모든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마당에 어린 시절부터 그를 원했던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더 그를 원하그 111
< 엔초 vs 스테파노>
릴라는 엔초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나는 릴라가 엔초에게 본 것이 그녀가 지난날 스테파노나 니노에게서 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없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엔초를 통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일단 돈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실체 없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었다. 니노의 경우에는 지성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릴라에게 아픔만 남기고 시꺼먼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 엔초만큼은 릴라에게 예기치 못한 아픔을줄 것 같지는 않았다. 139
<리나의 능력을 무한 신뢰하는 엔초>
"자세히 좀 들여다봐."
"독일어잖아, 엔초, 난 독일어는 몰라."
"하지만 너라면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엔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릴라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엔초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목표를 이루어낸 후에도 초등학교 5학년의 학력이 전부인 릴라가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엔초는 릴라에게 어떤 과목이든 빨리 배울수 있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선가접하게 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인류의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먼저 그 언어를 정복하는 새로운 엘리트층이야말로 미래 사회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 엔초는 즉시 릴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를 좀 도와줘."
"난 지금 정말 피곤해."
"리나, 지금 우리의 삶은 형편없어. 변화가 필요해."
"나는 이대로도 괜찮아."
"젠나로가 하루 종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있잖아."
"젠나로는 이제 다 컸어. 온실 안의 화초처럼 키울 수는 없어."
"네 손이 엉망이 된 것 좀 봐."
"내 손이니 내 마음대로 할 테야."
"나는 너와 젠나로를 위해서 돈을 벌고 싶은 거야."
"너는 네 걱정이나 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악취나는 부르조아지로 변한 브르노>
했다.
"이 햄을 좀 봐, 한번 만져보라고."
브루노가 말했다.
"속이 꽉 찬 데다 단단하지. 냄새는 또 어떻고, 남녀가 서로 껴안고 몸을 탐할 때 나는 냄새 같아. 마음에 들어? 내가 소년 시절부터on 많은 여자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알면 놀라서 입이 딱벌어질걸?"
브루노는 갑자기 릴라의 허리를 잡고 입술로 릴라의 긴 목을 훑었다. 동시에 재빨리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이 백 개는 되는 것 같 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라운 속도로 앞치마를 헤집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을 침범해 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릴라는 햄에서 나는 악취에서부터 브루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스테파노의 폭력을 떠올렸다.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살해당할까봐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일 뿐 격렬한 분노가 릴라를 덮쳤다. 그녀는 브루노의 얼굴을 때리고 다리 사이를 발로 차면서 소리 질렀다.
"쓰레기 같은 자식!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이리 와!
네 물건을 꺼내 보라고, 내가 당장 잡아 뜯어줄 테니 말이야. 이 나쁜자식아!"
브루노는 릴라를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키득거리다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그래도 네가 내게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어."
그러자 릴라가 소리쳤다.
"여기서 잘리지 않으려면 네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야? 그 145
<사회주의 운동당과 이탈리아 공산당과의 갈등>
....
"다른 사람도 아닌 나한테 호들갑을 떤다며 진정하라고 하다니 당을 망가뜨리는 것은 바로 그들이야. 당을 기존 체계의 일부로 전락시킨 것도 그들이고 반파시스트 세력을 민주주의의 파수꾼으로전락시킨 것도 그들이야. 우리 동네 사회주의운동당의 지도자가 누군 줄 알아? 약국집 아들 지노야. 멍청하기 짝이 없는 미켈레 솔라 라의 똘마니 말이야. 파시스트 놈들이 뻔히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활개치고 다니는데 내가 보고만 있어야겠어?"
파스콸레는 사뭇 감정이 복받치는 듯한 어조로 자기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버지는 당을 위해 몸을 바쳤어.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흐지부지된 반파시스트 투쟁을 위해서? 고작 상황을 지금처럼 엿같이 만들려고? 불쌍한 우리 아버지가 죄 없이 감옥에 갔을 때 당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아버지야말로 당의 위대한 동지였는데도 말이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서 나폴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시민들이 앞장섰던 4일간의 투쟁과 사니타 다리 투쟁에도 참여하셨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동네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당원 활동을 하셨는데 말이야." -152
<여자 대학생들이 노동계급 공산주의자 남자들에게 품는 환상>
157모임 장소는 나폴리 트리부날리 가에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그드으 파스콸레의 차를 타고 집회에 갔다. 릴라는 일행과 함께 비록나았지만 장엄함이 느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장소에 비해 참가 인읽은 많지 않았다. 릴라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부와 평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변이 화려한 지도부와는 달리 평당원들은 떠듬떠듬 말을 늘어놓았다.
릴라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릴라에게 위선적으로 들렸다. 그들의 현학적인 표현과 주눅든 태도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당신네 노동자들에게 배우기 위해 모임에 나왔다는 똑같은 말을 노래의 후렴구처럼되풀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본주의, 노동 착취, 사회민주,
주의 배신, 계급투쟁 방식 등에 대한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들의 지식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릴라는 모임에 참석한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이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으면서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상대적으로 더 사교적인파스콸레에게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파스콸레가 공산당원에다 지
<그들의 지식은 추상적이었다. 그들은 현실을 모르는 채 떠들었다.>
릴라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자리를 떠났다. 너무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드러낸 것 같았다. 물론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지식은 추상적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릴라가 한 말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선량한 사람들의 유복한 삶이 어떤 건지 알고 있지만 너는진짜 가난이 어떤 건지 상상조차 못할걸?"
생각만 했을 뿐 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62
<리나가 일하는 환경에서 대해 새삼스레 놀라는 엔초와 파스콸레>
사내들에게는 뭐든 다 숨겨야 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거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여인이 일하는 곳에서는 자기가 일하는 직장사장의 횡포가 기적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무릅쓰고 여인을 지켜야 할 테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배웠으니까."
파스콸레와 엔초의 침묵에 릴라는 폭발했다.
"노동계급이고 뭐고 둘 다 꺼져버려."
그들은 차에 올랐다. 산 조반니 아 테두초로 돌아가는 내내 셋은 다른 일상적인 대화만 했다. 그러나 파스콸레는 엔초와 릴라를 집앞에 내려주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너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뛰어난 사람이야."163
“You really work in those conditions?”
She, irritated by the contact, pulled her arm away, protesting: “And how do you work, the two of you, how do you work?”
They didn’t answer. They worked hard, that was obvious. And at least Enzo in front of him, in the factory, women worn out by the work, by humiliations, by domestic obligations no less than Lila was. Yet now they were both angry because of the conditions _she_ worked in; they couldn’t tolerate it.
You had to hide everything from men. They preferred not to know, they preferred to pretend that what happened at the hands of the boss miraculously didn’t happen to the women important to them and that—this was the idea they had grown up with—they had to protect her even at the risk of being killed. In the face of that silence Lila got even angrier. "Fuck off," she said, "you and the working class.”
<늑대도 망가져 버린 브루노>
브루노가 취직을 시켜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 후로 릴라는 그를 거 .
의 보지 못했다. 몇 번인가 마주쳤을 때에도 릴라는 그에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급히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그제야 비 .
로소 브루노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릴라가 들어오자책상 뒤에서 일어섰다. 여성을 맞이하는 신사다운 태도였다. 하지만릴라는 브루노의 외모에 놀랐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부유한 생활때문인지 눈빛은 흐릿했다. 가슴이 답답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마그마같이 시뻘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가뜩이나 까만 머리와 늑대처럼 길고 뾰족하고 하얀 이빨 때문에 빨갛게 상기된 안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릴라는 생각했다.
"여기 이 사람이 과거 니노의 친구였던 법대생과 같은 사람인가?
릴라는 이스키아 섬에서 보낸 시간과 현재의 햄 공장 사이에 연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빈 공간밖에 없었다. 릴라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뛰어 넘어오는 과정에서 브루노가 망가져버렸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의 아버지가병들어 회사에 대한 부담이 그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겼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공장에 빚이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릴라가 브루노에게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자 브루노는 코웃음을 쳤다.
"이봐, 리나."
브루노가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난 네 부탁을 들어준 거야. 은혜를 말썽으로 갚으면 안 되지, 여기서는 모두 힘겹게 일하고 있어. 그렇게 잔뜩 곤두서 있지 좀 마. 가끔은 직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
"긴장을 풀려면 너희들끼리나 풀어."
브루노는 재미있다는 듯 릴라를 바라보았다.
"너도 장난을 즐기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거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을 때지."143
....
했다.
"이 햄을 좀 봐. 한번 만져보라고."
브루노가 말했다.
"속이 꽉 찬 데다 단단하지. 냄새는 또 어떻고, 남녀가 서로 껴안고 몸을 탐할 때 나는 냄새 같아. 마음에 들어? 내가 소년 시절부터얼마나 많은 여자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알면 놀라서 입이 딱벌어질걸?"
브루노는 갑자기 릴라의 허리를 잡고 입술로 릴라의 긴 목을 훑었다. 동시에 재빨리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이 백 개는 되는 것 같 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라운 속도로 앞치마를 헤집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을 침범해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릴라는 햄에서 나는 악취에서부터 브루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스테파노의 폭력을 떠올렸다.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살해당할까봐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일 뿐 격렬한 분노가 릴라를 덮쳤다. 그녀는 브루노의 얼굴을 때리고 다리 사이를 발로 차면서 소리 질렀다.
"쓰레기 같은 자식!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이리 와!
네 물건을 꺼내 보라고, 내가 당장 잡아 뜯어줄 테니 말이야. 이 나쁜자식아!"
브루노는 릴라를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키득거리다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그래도 네가 내게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어."
그러자 릴라가 소리쳤다.
"여기서 잘리지 않으려면 네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야? 그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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