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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홍창성 불교문화

by 책이랑 2020. 6. 18.

1.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I. 불교의 현대적 이해란 무엇인가   
II. 비교(comparison)와 융합(fusion)   
III. 공부하는 방법   
IV. 공부와 논의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붓다의 가르침 1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__홍창성 - KBPF

불교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 그 방법론에 대한 논의 홍창성│미네소타주립대학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I. 불교의 현대적 이해란 무엇인가1) 불교는 약 25세기 전 붓다가 설파한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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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기緣起 1,2,3,4(인과),5(관계)

2. 연기(緣起)란 무엇인가 (1)

I. 연기에 대한 현대적 이해
II. 일상에서 경험하는 인과(因果)와 연기(緣起)
III. 연기

①원인과  조건 두 개념으로 연기를 설명할 수 있는데 나는
연기를 ②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2]  
https://www.kbpf.org/143301/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2-연기란-무엇인/


'

관계'에는 대칭적 의존관계 뿐 아니라 비대칭적 의존관계가 있다(

현대 분석철학)

[3]
https://www.kbpf.org/143468/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3|연기란-무엇/

'이성', '사실'이라는 말을 들어 필연성을 말하지만 필연' 이라는 것은 없다. 이성을 발휘할때도 일정한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전제는 사실 변하는 것이며, 사실이라고 하는 것도 일정한 믿음에 바탐을 두고 도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③ 란 필연적이지 않은 의존 관계 를 의미한다.[4] '
https://www.kbpf.org/144718/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4|연기란-무엇/


인과관계란 어떤 자성과 자성을 가진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렇게 그러 그러하게(여여如如하게) 연결되어 있는 x와 y같이 자성의 존재를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들 사이의 고리들에 불과할 뿐이다
. 말하자면 여여하게 연결되는 자성 없는 것들 사이의 자성 없는 어떤 관계가 인과관계이다.

https://www.kbpf.org/144880/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5|인과因果__홍/

 

‘화랑배구단’이라는 팀이 있다고 가정할 때  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여섯 명의 배구 선수일 뿐, 어떤 불가사의한 기체 같은 것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선수들과 그들의 플레이일 뿐, 그 밖에 ‘팀’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현대 물리학에서는 입자의 모든 속성이 다른 속성과의 수학적 관계에 의해서만 이해될 뿐 어떤 존재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https://www.kbpf.org/145005//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6|관계關係__홍/

 

(2)연기와 空 1,2,3

https://www.kbpf.org/145144/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7|연기와-공__홍/


공 은 무와는 다르다.- 다만 일상에서는 "쓸모 있는 허구"로 인지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사물은 자성을 가지고 상주하지는 않지만(非有),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非無) 대승의 공(空)의 가르침이다. 한자(漢字) 문화권에서 불교의 공(空)과 무(無)를 마치 같은 개념인 것처럼 두 단어를 섞어 쓰는 경우를 많이 보았는데, 그토록 중요한
공(空)의 개념을 뚜렷한 비판적 검토도 없이 무(無)와 섞어 쓰는 것은 철학적으로 대단히 무책임하다

※ ex) 자동차도 수많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집합체로서 하나의 허구(fiction)이지만, 그래도 대단히 유용한 허구이기 때문에 그것을 당분간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물이 이렇듯 쓸모 있는 허구들이다. 말하자면 우리 세계는 쓸모 있는 허구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이런 것들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로 다가온다. 이렇게 허구로 존재하는 모습을 불교에서는 환(幻)이라고 하는데, 철학에서는 좀 더 가치중립적인 개념으로 현상(現象)으로 분류한다.
https://www.kbpf.org/145343//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8-공空을-어떻게/

 

우리 세계의 사물은 어떤 기체나 바탕 없이 단지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공(空)하다. 그래서 현상(現象)의 세계여서 공(空)한 우리의 세계는 아무 바탕이나 기체(基體)도 없이 묘(妙)하게 존재한다. 현상과 공은 동전의 양면이다. 단, 그것들은 동전이 없이 마주 보는 양면(兩面)이다.
https://www.kbpf.org/145476/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9-공空을-어떻게/

 

● (3)연기와 무상(無常) 1,2,3


수학과 자연과학의 모든 법칙은 그 스스로 절대 불변하는 본질적 속성을 드러내주는 진리가 아니고, 모두 주어진 배경 이론 또는 패러다임에 의존해서만 참으로 간주될 뿐이다. 배경 이론이 바뀜에 따라, 또는 한 배경 이론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론의 수정 작업이 벌어진다면, 주어진 법칙은 달리 해석되고 그 참 거짓도 달리 결정될 것이다. 최근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이후 물리학에서 절대 불변의 상수라고 여겨져온 빛의 속도조차 우주 생성 초기에는 지금보다 더 빨랐을 것이라는 가설이 주목받고 있으며, 이 가설을 검증할 관측이 진행되고 있다. 모든 법칙은 배경 이론 및 실험과 관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이 법칙은 관계로서의 연기에 의존하고, 또 연기하는 것은 무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학과 자연과학의 법칙들도 모두 무상(無常)하다.
https://www.kbpf.org/145751/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0-연기와-무상__/

 

저 하늘 구름 한 점의 가장자리는 어디일까. 

만물이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이 공(空)하며 아무것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오직 현상 또는 환(幻)으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받아들이는 교에서는 구름과 그 가장자리의 실재에 대해 헛된 집착을 갖지 않는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실재하지도 않는 구름의 분명한 가장자리가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이 연기하기에 자성을 결여해 공하며 또 조건의 생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무상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
...
서구의 상식으로는 사물이 고정불변한 본질을 지니고 실체로서 실재한다. 그래서 사물은 무상하지 않다. 그러나 지난 호와 이번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삼라만상이 연기하기에 자성을 결여해 공하며 또 조건의 생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무상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불교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처음부터 생겨나지도 않는다. 잘못된 전제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난제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힘들어했을까. 어리석음으로부터 비롯된 지적 고뇌도 고(苦)이다.
https://www.kbpf.org/145925/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1|무상한-사물/

 

상(相)과 상(相)에 대한 집착은 그것에 해당되는 대상들이 어떤 자성을 가지고 그 밖의 사물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미혹된 견해를 산출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언어와 상(相),감각질과 상(相)

....

나’에 대한 상을 갖는다면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아트만으로서의 참 나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이는 불교의 무아론에 배치된다. 어떤 한 개인, 예를 들어 ‘이순신’이라는 개인에 대한 상을 만들어놓는다면, 우리는 또 이순신이 어떤 자성을 가지고 존재했다고 믿으며 집착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공(空)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한편 위에서 논의한 보통명사로 표현되는 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논의가 적용된다. 우리가, 예를 들어 ‘민들레’라는 상을 마음에 품는다면 우리는 먼저 ‘민들레임’이라는 자성을 가진 민들레들을 분별하고, 이 세상을 민들레들과 민들레 아닌 것들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이들을 서로로부터 차별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의 가르침에 어긋나고 또 서로 연기해 상호작용하면서 걸림 없이 연결되어 있는 이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왜곡하게 될 것이어서, 우리를 깨달음의 길에서 필연적으로 멀어지게 할 것이다.

연기와 공에 어긋나고 자성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이 세상을 분별과 차별의 눈으로 왜곡되게 보게 만드는 그 어떤 상에도 매달려서는 안 되겠다. 실은 처음부터 상을 일으키지도 말아야 한다.
https://www.kbpf.org/146888/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2|무상과-상相__/

 (4)무아 (無我)  1,2,3

무아

https://www.kbpf.org/151467/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3/ 

무아2
오온(五蘊)

붓다는 우리 개개인을 오온,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의 다발이 모여 있는 복합체로 보았다. 이 오온의 각각을 간단히 살펴보겠다.

1. 색(色) 모양을 가진 것, 즉 물질적 또는 물리적인 대상을 말한다. 물리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공간 속에 존재하고, 공간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모양을 갖는다.
2. 수(受) 쾌락이나 고통의 감각, 또는 이 둘 다 아닌 무덤덤한 감각
3. 상(想) – 대상의 감각적 속성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하늘의 푸른빛 보기나 꽃향기 맡기, 또는 종소리 듣기와 같은 것들이다.
4. 행(行) – 심신의 활동을 가져오는 심리적인 동력, 예를 들어 탐욕과 분노, 애증, 집중, 시샘 등이다.
5. 식(識) 심신 상태의 자각 또는 그 자각 자체를 말한다.

오온의 무상(無常)함과 무아(無我)

무아에 대한 붓다의 몇 가지 논증이 있는데, 우리에게 잘 알려지고 또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논증은 오온 각각이 무상하다는 통찰과 함께 진행된다.

1. 우리의 존재를 구성하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무상하다.
2. 자아(참나)나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영원불변 불멸이다.
3. 그러므로 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https://www.kbpf.org/166102/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4/1

무아3
https://www.kbpf.org/166380/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5|무아無我-3__/

 (5) 마음  1,2,3,4

정말 마음이 없을까?

지금까지 ‘마음은 없다’라고 몇 번 말했지만, 그것은 실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대로 본질을 지니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고, 또 한국 불교계 일부에서 말하는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의 참마음이 없다는 뜻이지, 실체가 아닌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는 심리 상태들의 존재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붓다가 가르친 오온(五蘊)에서 네 가지 심리 상태를 언급했는데, 이 네 종류의 다발들은 실체라기보다는 심리 상태(mental states) 또는 심리 현상(mental phenomena)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이기도 한다. 현대 신경과학이나 생리학 그리고 철학은 실체로서의 마음은 인정하지 않지만 뇌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물리현상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며 생멸하는 의식 또는 심리 상태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그 속성을 연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마음은 없다고 해도 현상(現像, phenomenon) 또는 가(假, provisional)로서의 심리 상태 또는 심리 현상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연기에서 벗어난 본질을 가진 실체로서의 ‘경직된’ 마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물리현상에 의존하며 변화하는 심리 상태 또는 심리 현상으로서의 마음은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기로 한다.
https://www.kbpf.org/166523/현대적으로-이해하는-다의가르침-16-마음은-없다__홍/

 

다시보아도 마음은 없다
https://www.kbpf.org/166913/166913/

 

내 마음은 내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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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내용은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내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https://www.kbpf.org/166767/

 

논리적,실용적,도덕적· 법률적으로 요청되는 나의 존재는 있다.
참나는 없지만 나는 편리상 있다.
  나는 참나로서 상주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무(無, 斷滅)도 아니다. 나는 묘(妙)하게 있다.
https://www.kbpf.org/167106/현대적으로-이해하는-붓다의-가르침-19-참나와-나__홍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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