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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지금 이대로 이미 무아이며 진리 그 자체

by 책이랑 2020. 9. 11.

생각의 프레임이 재촉하는 노력과 상관없이 지금 이대로 이미 무아이며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반하여 살게 되는 것이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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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무아(無我)의 공존

모든 사람의 '나'는 무아(無我)와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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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프레임이라는 것은 계속 목표를 만들어 사람이 그 안에 에너지를 쏟게끔 만드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의미한 행위들을 용인할 수가 없다.
추구한다는 진리조차 그런 생각의 프레임에 가두어버린다.

깨달은 사람들은 욕망, 고통, 불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부분이 공존함을 아는 것

'나'가 고도의 수행목표를 달성하여 궁극의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것은, 생각의 프레임이 추구하는 방법일 뿐이어서 생각의 세계에서만 진리일 뿐이다. 깨달음은 생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생각의 프레임을 착실하게 수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의 프레임이 재촉하는 노력과 상관없이 지금 이대로 이미 무아이며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반하여 살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고오타마는 이전의 모든 진리 추구자들이 몰두했던 선정 수행과 고행 실천이 맹목적인 생각의 프레임에 갇힌 것일 뿐이라고 타파해버렸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성제(苦集滅道)를 생각의 프레임으로 해석하여, 고(苦)의 원인인 집(集)을 멸절하여 도에 이른다고 왜곡을 한다. 그렇지만 고오타마의 무아와 연기를 적용하여 해석하면, 생각의 다발에 불과한 '나'를 주재자로 삼는 오해로 인하여 집(集)이 생기는 것이므로 이 망상만 깨지면 저절로 멸도(滅道)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해는 '생각'만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 

깨달은 사람은 '나'와 무아의 완전한 공존에 기반을 두고 사는 산다. 
'나'- 생각, 시간과 공간 만들어지고 연기(緣起)에 의해 사건들이 전개
무아는 흔들리지 않는 안심이 되어 일체의 노력을 멈추게 한다.
내가 무아를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번 그렇게 되면 다시 되돌릴 방법도 없다.
생각 또는 '나'가 쳇바퀴를 멈추는 습관이 형성되어 뇌에서의 사고 회로가 바뀌면 세상에 대한 시선이 달라져서 저절로 무아 자체가 된다. 이 과정에서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노력을 멈추는 노력'

며칠 전에 "깨달은 사람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나?"하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질문자는 그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죽은 뒤는 무아이다. 죽은 뒤를 설명하는 어떠한 미사여구와 논리적 설명도 가짜 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살아서 활동하는 이 순간도 무아이다. 무아에는 시공간이 없다. 

14무기(十四無記)라는 불교용어가 있다. 고오타마가 대답을 거부하고 침묵한 14가지의 질문이라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고오타마는 대답을 한 것이고(침묵이라는 대답을 한 것임)  사람들이 그 답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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