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물은 정밀 독해, 역사적 맥락, 정치이론을 결합하는 관점에서 <논어>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목차
* 삶과 세계를 읽을 수 있기 위하여 고전을 읽는다.
매니페스토: 생각의 시체를 묻으러 왔다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그렇다면 <논어>를 왜 읽는가? 고전을 왜 읽는가? 실로 고전 텍스트를 읽는다고 해서 노화를 막거나, 우울증을 해결하거나, 요로결석을 치유하거나, 서구문명의 병폐를 극복하거나, 21세기 한국 정치의 대답을 찾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거나, 현대인의 소외를 극복하거나,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길은 없다. 고전 텍스트를 읽음을 통해서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p.17)
텍스트를 ‘정밀 독해’해야만 침묵까지 읽을 수 있다.
1. 침묵의 함성을 들어라
왜 구태여 침묵했는가 -②
텍스트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려면
[..] 텍스트 정밀 독해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정식화된 절차를 외우는 대신, 상대적으로 더 훈련된 감수성을 지닌 독해자를 만나 그와 더불어 상당 기간 동안 함께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p.22)
-정신집중
침묵이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다
침묵은 심오한 발화가 될 수 있다.(p.28)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
이와 같이 침묵을 매질媒質로 삼은 메시지는 그에 걸맞게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독해자를 요청한다. 이것은 『논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논어』에서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는 말하거나 혹은 침묵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시적으로 자신은 특정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자 함을 표명한다. “나는 말하지 않고자 한다.”予欲無言, 『논어』 ‘양화陽貨’ 편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논어』 텍스트 전체는 발화한 것, 침묵한 것, 침묵하겠다고 발화한 것, 이 세 가지로 분류도리 수 있다. 이러한 분류를 염두에 두고, 독해자는 의도된 침묵마저 읽어낼 자세를 가지고 『논어』를 탐사해 나가야 한다.(p.29)
그러나 서두에서 이야기한 학자는 아직 내 주변에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왜 평생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셨죠? 왜 사랑에 대해 침묵했나요? 어떤 박해가 두려웠나요? 고요히 술에 취해 있던 그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사랑은 너무 중요한 단어이기에 쉽게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서 침묵했다고. (p.30)
당시의 관행적 발화의 주제,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자유주의 송편 -③ 침묵과 생략, 비틀기
그러나 <논어> 텍스트는 대개 간결한 언명이나 대화로 분절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가 다짜고짜 침묵한 사안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던 사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당시 관행이 되다시피 흔해져버린 발화의 주제와 방식을 알아야, 누군가 그에 대해 각별히 침묵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관행을 알기 위해서는 목전에 놓인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p.33)
ex) 17세기 영국 철학자 존 로크. 로크는 <통치에 관한 두 논고>에서 영국 전래의 헌정질서에 따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논변을 전혀 펼치지 않았다. 로크가 그런 관행에 대해 철저히 ‘침묵’함을 통해 그 관행을 무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에둘러 표현해 기존 질서에 균열낼 수도- 관행과 정면충돌하는 것은 아니지만 범주 차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할 수도
침묵이나 생략은 전복적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p.39)
이처럼 관행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신, 관행을 비틀거나 전용하거나 침묵하거나 생략하는 행위에 동반되는 정치적 의미를 파악하려면, 해당 텍스트를 넘어 보다 넓은 콘텍스트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일견 단순한 침묵이나 생략으로 보이는 것들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간파할 수 있다.(p.40)
그래서 저자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든, 어떤 것에 대한 침묵이 다른 것에 대한 발화로 해석되기도 하고, 다른 것에 대한 발화가 어떤 것에 대한 침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p.41)
모순과 함께 걸었다 -④ 모순적인 어법
모순적인 어법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논리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일견 모순적인 언어 혹은 시적인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게 곧 살아가는 것이기에, 인간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p.49)
⑤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
<논어> 속의 공자는 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다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공자가 희망하였던 것은 소리 없는 작은 행위가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그런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공동체란 일종의 해석공동체다. 커뮤니케이션이 거칠어진 나머지 구호와 폭력만이 만연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이라 부를 수 없으며 곧 정치적 타락의 지표가 된다.그것은 공자가 개탄했던 당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논어> 속의 공자는 불필요한 과장(overstatement)을 비판하고, 침묵 및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를 옹호한다.(p.61)
“마르크스‘도’ 읽어야지”-⑧ 역사적 맥락 읽기
공자는 그가 속한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했던, 지성인의 한 사람
마르크스 이론은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혁을 경험한 당대 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을 고민한 산물이다
사상가는 당대의 지적 담론의 소산
어떤 사상가를 혜성처럼 나타난 성인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악의 근원처럼 간주하다 보면 자칫 사상을 둘러싼
역사적 환경에 눈감게 된다 (…) 숭배의 대상이든 혐오의 대상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느닷없는 천재나 악마는 사실 드물다.(pp.69-70)
이렇게 해서 드러난 춘추시대의 모습은 <논어>에서 드러난 공자의 입장 역시 당대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앞으로 살펴보겠듯이, 공자는 도대체 예상할 수 없었던 발언을 갑작스럽게 해낸 천재가 아니라, 이미 선례가 있는 입장이나 경향을 나름대로 소화해낸 사람이었다. 당대의 자료 속에 들어가 보면, 공자는 그가 속한 시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를 사유했던,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언젠가부터 대학시절의 선생이 고독한 천재라기보다는 궁핍한 시대에 살면서 마주한 현실의 문제와 고투했던 당대의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처럼.(pp.71-72)
2. 실패를 예감하며 실패로 전진하기
우리는 사랑을 발명해온 인류의 긴 역사의 한 부분에 <논어>를 위치시킬 수도 있다.(p.83)
신의 가호에 회의를 품게 된 시대 ─ 仁 ⑬ <논어>와 사랑(仁)
가상의 유토피아 도시를 무대로 그린 어설라 K.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며>에서 사랑을 발명한 대가는 풍요의 가짜 낙원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하는 것이다. 사진은 오멜라스를 모티브로 삼은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 ‘봄날’의 한 장면.
즉 인은 기원전 5세기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주 쓰이게 된 용어이다. 공자는 바로 그 시대의 사람, 즉 인이라는 개념에 주목하기 시작한 세대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세대는 바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의 가호에 의지하는 일에 회의를 품게 된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신의 무정함을 깨달은 당시 사람들이 신의 가호에 대한 대안으로, 즉 일종의 자구책으로, 인간의 사랑(仁)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마치 이영광의 시에서 나오는 화자처럼.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을 발명해온 인류의 긴 역사의 한 부분에 <논어>를 위치시킬 수도 있다.(p.83)
사람들이 “더러운” 사회계약을 파기하고 마침내 오멜라스를 떠나고 난 뒤, 그 지하실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작 동정심과 정의감을 불러일으킨 그 아이는 여전히 고통 속에 있지는 않을까? 오멜라스를 떠나버린 사람들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결국 정주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까? 정주했다면 그들은 지하실 없는 복지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떤 사회계약을 만들었기에 그것이 가능했을까?(p.84)
이러한 질문이 쏟아지는 복잡한 정치 현실 속에서, 동정과 사랑은 더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정서적인 격동을 좀더 섬세하게 구별하기 시작한다.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세요.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입니다.” 돼지고기를 사주기 위해서는 동정심 정도로 충분하지만, 소고기를 사주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혹은, 돼지고기를 사주는 이는 “순수한” 동정심에서 그러는 것이지만, 소고기를 사줄 때는 뭔가 정치적 속셈에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혹은, 동정심은 처지가 좀더 나은 사람이 처지가 열악한 사람에게 베푸는 시혜이기에 결국 불평등을 조장하는 감정은 아닐까? 인간의 “사랑”은 이러한 질문들로 가득한 복잡한 정치 현실 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pp.85-86)
‘논어’의 주요 주제, 정교한 미움
- 미워하라, 정확하게 ─ 正
오롯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자기의 편견을 투사하지 않으면서 잘 안다고 스스로 기만하지 않으며 상대를 정확하게 미워할 수 있나?
인자는 모든 이 좋아하는 사람 아닌 미워할 사람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 공정성 인식과 높은 공감능력 필요
무골호인과 아첨가는 지옥으로
안정복은 <천학문답>(天學問答)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덕으로 원수를 갚고 원한으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쳤다는데… 군주나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 이런 식으로 가르친다면 정의를 해치는 바가 클 것이다.”(天主敎士, 以德報讐, 不以讐報讐… 若以君父之讐, 而以此爲敎, 則其害義大矣.)
그렇다면 지하철의 쩍벌남에 대해서 공자는 어떻게 했을까? 논어에서 딱 한번 공자가 직접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원양(原攘)이라는 이가 길가에 무식하게 틀어놓은 유행가처럼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자(夷俟), 공자는 그에게 “사람들에게 해만 끼치는 놈이다”(是爲賊)라고 일갈하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후려쳤다.(以杖叩其脛) 마치 정확한 미움을 실험하는 것처럼.(p93)
② 공자의 불멸성-서투른 열정의 인간
삶이라는 유일무이의 이벤트 ─ 欲
비록 현실정치에서 실패했지만 납작하고 안이한 삶 경멸
소소한 일상을 살더라도 끝내 위대한 것의 일부 되려 해
삶 속에서 분투했던 사람 결핍 느꼈기에 과잉을 꿈꾼 사람
제자들은 그런 그를 사랑했고 ‘논어’를 남겨 그를 불멸케 했다
서투른 열정의 인간
공자는 영생하는 신이 아니었기에, 괴력난신(怪力亂神)으로부터 거리를 둔 사람이었기에, <논어>가 전하는 이러한 공자의 페르소나는 실로 삶이라는 유일무이의 이벤트에 집착했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삶이라는 이벤트에서 끝내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사람, 과잉을 찬양했던 사람, 노년에 이르러도 그치지 않는 배움이라는 긴 마라톤에 출전하기를 꺼리지 않았던 사람. <논어>는 그렇게 분투한 사람에 대한 재현이다. 누가 그랬던가. 아무리 배고프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있어도 누군가 밥을 짓지 않으면 굶주림이라는 난관은 타개되지 않는다고. 인간은 생각보다 게으르다고. 보통 사람들은 사채를 빌리지 않는 한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공자는 사채빚 없이도 삶 속에서 분투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동시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정치라는 현실의 철로를 달리고 싶었으나 달리는 데 실패한 사람이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질문의 책’이라는 시에서 “빗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차보다/더 슬픈 게 세상에 있을까?”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이나 <논어>의 편집자는 유려한 예식의 집전자로서의 공자만큼이나 현실에서의 실패한 선생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다. 결국, 기적과는 인연이 멀었던 사람, 신이 아니라 인간에 불과했던 사람, 결핍을 느꼈기에 과잉을 꿈꾸었던 사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을 사랑했던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은 때로 완벽하게 계산하고 행동하는 합리적 인간보다는 서투른 열정의 인간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끌리곤 하지 않던가. 누가 그랬던가, 완벽한 복근을 가진 사람보다는 쥘 수 있는 한 줌의 뱃살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 더 끌리게 된다고.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매미 소리가 시끄럽다고 여기는 사람보다는 매미가 오래 살기를 바라며 흐느끼는 사람에게 매료된다고. 매료된 이들은 텍스트를 남기고, 남겨진 텍스트는 상대를 불멸케 한다.
‘논어’, 운동권 서적에서 고시수험서가 되다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알았던 사람 ─ 禮 - ③ 공자의 실패
공자와 그 제자들은 당대의 운동권
‘예’라는 화살을 들고 정치에 반기
전쟁의 시대에 맞지 않았던 비전
승리보다 더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
한당 시대 정치인과 지식인들 ‘논어’를 대안이데올로기로 선택
명나라 과거시험의 필수과목 정착 실패자의 텍스트, 기득권 텍스트로
공자(기원전 551~479)가 정치적인 권력을 쥐었다고 한들 성공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살던 시대는 만성적인 전쟁의 시대. 전국 시대(기원전 403∼221)에 이르면 진나라 통일 전까지 적어도 590회의 전쟁이 일어났다는데, 공자가 그때까지 살았던들 그 추세를 되돌릴 수 있었을까. 그와 같은 전쟁의 시대에 금속촉을 기꺼이 빼고 활을 쏘는 것 같은 비전은 시대가 원하던 부국강병책에 맞지 않을 운명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공자나 그의 제자들은 해도 안 되는 줄 이미 아는 사람들(知其不可而爲之者)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력에 의존하여 천하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말했듯이, 그들은 승리하기보다는 다시 더 낫게 실패하기를 선택한다. 새를 맞히지 못할지언정 자는 새를 쏘지 않는 이의 위엄, 자청해서 실패를 선택하는 이의 위엄, 기어이 성취를 포기하는 데서 오는 위엄이 그들에게는 있다.널리 알려져 있듯이, 천하의 통일은 예를 통한 통치보다는 전쟁 기계로서 국가의 강화를 추구한 이들에 의해 달성되었다. 진시황제의 독재정치가 가속화되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좋아했을 법한 운동권 서적들은 금서로 지정된다.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 통제에도 불구하고, 통일왕조 진(秦)나라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무너진다. 진나라가 단명하자, 지식인들은 왜 그토록 강했던 진나라가 그토록 빨리 망하고 말았는지 원인을 찾고자 골몰한다. 진나라의 실패 이후, 한당(漢唐) 시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찾는 과정에서 <논어>는 정부에 의해 지원해야 할 텍스트로 마침내 채택된다. 그 뒤에도 정부의 간헐적인 애정의 대상이 되다가, 진시황에 버금가게 독재권을 휘둘렀던 명나라 초기 황제들에 의해 <논어>는 과거시험이라는 공무원 고시의 필수과목으로 완전히 정착한다. 한때 운동권 서적이었던 책이 본격적인 고시 수험서가 된 것이다. 실패자의 텍스트가 기득권의 텍스트가 된 것이다.
과해 보여도 상황에 적절하면 중용
우유부단함은 중용이 아니다 ─ 權
④ 중용의 의미
중용은 단순한 산술적 중간 아냐 과해 보여도 상황에 적절하면 중용
역동적 상황 속 적절성 찾아내려 기존 규범에서 이탈할 수 있어야
원칙과 임기응변 조화시키는 경지 오랜 숙련 거친 소수에게만 가능
공자, 혼란기 ‘예’ 변화 필요 인정 융통성 발휘하는 리더십 중시해
규범의 기계적 이행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규범을 적절히 적용하고, 때로 이탈하기도 하는 행위는, 마치 다양한 변주를 가능케 하는 음악과도 닮았다. 주례(周禮)는 중용이 음악의 덕임을 암시한 바 있고(以樂德?國子, 中和祗庸孝友), 논어는 음악이야말로 예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는 경지 이후에 오는 최고의 경지라고 천명한 바 있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공자에게 음악은 그저 소리와 악기 이상의 것. 최고의 사람이 구현해낼 수 있는 경지의 대명사이다. “음악이라고 일컫고 음악이라고 일컫곤 하는데, 종과 북을 말하는 것이겠는가!”(樂云樂云, 鍾鼓云乎哉) 급진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는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는 각종 조처를 통해, 공동체는 위기로부터 구원되고 리더는 위대해질 기회를 얻는다.
근년의 고고학적 성과에 따르면, 주(周)나라는 기원전 11세기에 새로운 나라로 성립했으나 사회적 관습, 규범, 예라는 점에서는 그 전 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기원전 850년경에 이르러서야 종족 조직 내의 변화와 인구 변동으로 인해 기존의 관습, 규범, 예가 비로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공자는 그때 시작된 예의 변화가 아직 끝나지 않은 혼란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공자의 중용, 시중, 혹은 권의 사상은 그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종래의 예를 그대로 묵수하기보다는 변화에 나름대로 적응할 필요를 인정한 전향적 태도의 일부였다.(p127)
위선을 계속 떨다 보면, 예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어떤 내면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실연의 기술 ─ 習
⑤ 예와 인의 관계
행동과 구별되는 내면 존재할까
인하지 않으면 예는 의미 없나 예를 반복하면 인 생겨날 수 있나,‘논어’, 인과 예의 관계 논해
인 없는 예는 위선이다? 위선의 빤스를 내려버리면 쓰레기 매립지를 봐야 할지도
그런데 위선이 나쁘기만 한 걸까요? 사람들이 무턱대고 ‘위선의 빤스’를 내려버리면 우리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 아름다운 내면 풍경이 아니라 쓰레기 매립지가 있다면 어떡하란 말입니까. 누가 위선의 장막 아래 덮어둔 쓰레기를 구태여 들여다보고 싶겠습니까? 들여다보고 싶다고요? 너 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쓰레기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요?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위선을 떠는 모습 말고 별도의 자아란 없으니, 위선 떠는 데 유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죠.그렇다면 위선의 빤스를 입은 사회는 하의실종의 야만 상태보다는 나을 겁니다. 누가 아나요? 위선을 계속 떨다 보면, 예식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다 보면, 어떤 내면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예를 통해서 신에게 뭔가 얻어낼 수는 없지만, 예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라고
완성을 향한 열망 ─ 敬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이 할 일은 무엇인가?
공자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 들지도 말고 신과 거래하려 들지도 말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들지도 말고
(……) 신을 무시하지도 말고 신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말고 신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에게허여된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이다
묵자가 상상하는 인간은 능동적 존재 신이 없는 중국 사회는 수평적 구조
공맹자도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한 거다. 사람들은 신에게 뭔가 얻기 위해 기도하고 전례를 행하지만, 거기에 응답할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예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고. 예를 통해서 신에게 뭔가 얻어낼 수는 없지만, 예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인간끼리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거라고
⑧ 메타시선 ─ 知- 앎의 한계와 인간 능력의 한계에 민감한 정신력
알다, 모르다, 모른다는 것을 알다 ─ 知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려면 자신을 바라보는 메타시선이 필요
인생을 두배로 살게 하지만 많은 에너지 필요한 고단한 일 자신을 끊임없이 다그쳐야 하는 삶
정교한 질문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훈련된 행위이며, 대상을 메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외워 받아쓰기하듯 척척 행하는 것이 곧 예를 아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척척 행동하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일삼는 공자를 비웃는다. “누가 공자보고 예를 안다고 했나?” 그러나 공자는 질문한다. 몰라도 아는 척을 하거나, 알아도 침묵하거나, 아는 것을 가지고 ‘꼰대질’을 하는 대신, 질문하기를 선택한다.이러한 태도는 신으로부터 복을 갈구하기 위해 예식을 일삼던 이들의 자세와 사뭇 다르다. 공자의 시대 이전에는, 그리고 공자의 시대에도, 심지어 공자의 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안다는 것’은 인간사를 좌우하는 귀신의 뜻을 알아채는 것을 의미하곤 하였다. 그러나 제자 번지가 안다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 세계의 합당함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거리를 두면 知라고 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고 대답한다. 귀신을 덮어놓고 경배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귀신을 공경하는 동시에 멀리하는 이 절묘한 자세보다는 차라리 쉬울지 모른다. 이 절묘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메타 시선, 앎의 한계와 인간 능력의 한계에 민감한 정신력이 필요하다. 그런 정신력은 제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도 아직 모르겠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라고 대답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자아 수양에 필수적인 이러한 정신력은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기존의 예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을 때, 기복신앙에 의존해서만은 더 이상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힘들 때, 특히 필요하다.
3. 회전하는 세계의 고요한 중심점에서
자성,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고통 ─ 省
논어’, 자기통제 중요성 수차례 강조
자성은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 자신의 못남을 적극 탐색하는 행위
파놉티콘- 가능하면 싼값에 통제하기
그러나 공자가 말한 자기반성이란, 국가가 사람들 일반에 대해 행하는 통제가 아니라, 통치 엘리트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이다. “안으로 반성하며 거리끼지 않으면,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랴?”는 말도 사마우(司馬牛)가 군자(君子)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가 한 대답이었다. 또 공자는 못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자성하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見不賢而內自省也) 주희(朱熹)에 따르면, 여기 나오는 자성이란 자신에게도 이러한 못남이 있지 않나 두려워하는 일이다.(內自省者, 恐己亦有是惡.) 즉 자성이란, 세끼 밥을 통해 자신에게 영양을 주는 행위나, 막연히 몽상에 빠져 있는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 즉 자기 파괴적 속성이 있는 행위이다.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는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이라는 면에서 국가가 가하는 고통과는 다르다.
공자는 제국의 신민으로서 자성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후대에 성립된 중국 제국은 자성이라는 아이디어를 활용한다. 신민들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통제를 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명나라 때 사상가이자 반란진압군 수장이었던 왕양명(王陽明)이 그러한 양심의 자기 통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 반란을 진압한 지역에서. 국가 행정력이 불충분하여 적절한 치안을 제공하기 어려운 곳에서 차선책으로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이,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양심’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힘이 충분히 미치지 않는 곳에서마저 사람들이 양심을 발휘하여 스스로 질서를 이루고 살아준다면, 국가 입장에서야 얼마나 좋겠는가. 가성비 좋은 질서 유지는 국가의 오랜 꿈이다.
21세기 한국형 파놉티콘- 국가의 그러한 꿈은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 마포구에서도 발견된다
⑦ 효와 국가 -교육·복지·육아·노인돌봄 해결방안 바뀌는 시대 맞춰 새로운 답 요구
“빡센 삶, 각오는 돼 있어?” ─ 孝
인간은 모두 동의 없이 태어나지만 태어나고 나면 누군가 삶을 책임져야
공자의 관심은 효 자체보다 삶의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논어’의 효의 대상은 소규모 가족 과도한 국가 활동은 제한하는 쪽
교육·복지·육아·노인돌봄 해결방안 바뀌는 시대 맞춰 새로운 답 요구
일상의 삶을 지탱하는 데 필요한 위생, 교육, 복지, 육아, 노인 돌봄 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당사자, 가족, 사회, 국가 가운데 누가 어떻게 무엇을 얼마나 나누어 맡아야 하는가. 이는 공자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인류가 고민해온 문제이며 매 시대 조건은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시대마다 새로운 답을 요구한다. 새로운 답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동의 없이 태어나고, 많은 노인들이 동의 없이 요양원으로 실려 간다.5월13일치 <한겨레> 기사를 보면, 현재 한국의 요양원 대다수는 죽음의 길로 방치되는 현대판 고려장에 불과하다. 평생 위태롭게 지켜왔을 삶의 존엄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내어 버리게 되는 곳. 사전 동의 없이 시작된 삶이었으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삶이었으나 민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결국 물건이 되고 마는 곳. 이 사태를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가족 내 효 실천을 넘어서는 국가의 좀 더 조직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이다 ─ 無爲
<논어>에는 행정의 필요를 인정하는 발언은 있어도 명시적으로 관료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찾기는 어렵다. <논어> 주석사의 큰 아이러니는, 바로 행동의 침묵을 설파한 <논어>의 구절이 관료제의 적극적인 운용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재해석되어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오규 소라이(荻生?徠)는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 덕 있는 이들을 등용했기에 수고롭지 않게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秉政而用有德之人, 不勞而治) 그리고 다산 정약용 역시 얼핏 무위처럼 보이는 통치는 그 일을 대신 잘해줄 수 있는 관료를 기용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해석했다. “순임금이 22인을 얻어 그들에게 각각 직책을 맡겨 천하가 이로써 잘 다스려졌다. … 그리하여 국가는 인재를 얻지 않을 수 없음을 극진히 말하였다.”(舜得二十二人, 各授以職, 天下以治 … 所以極言人國之不可不得人) 이 아이러니는 공자가 상상했던 이상적인 정치공동체와 후대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바람직한 정치공동체의 모습이 달랐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후대 주석가들의 이러한 해석들은 공자가 꿈꾸었던 국가보다는 주석가들이 꿈꾸었던 국가의 모습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부러우면 지는 거, 아니 지배당하는 거다 ─ 威
너의 존재는 거짓이 아니다 ─ 事
고전의 정밀 독해에 임하는 사람들은, 텍스트를 반드시 실증적인 차원의 보고서로 다루지는 않는다. 많은 텍스트들은 실증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면에서는 “예술적”이라고 부를 만한 다차원적 언술로 가득 차 있다. <논어>에 나온 주나라 문화에 대한 공자의 언명 역시 주나라 문화에 대한 실증적인 차원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예술적인 재현(representation)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예술적 재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계를 탐구한 예술적 재현물이다
⑪ 실증과 재현
후대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을 주나라 문화라는 이름으로 재현하는 게 공자의 목적이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언명이 고고학적 증거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공자를 대뇌 망상가라 서둘러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지구의 영정 사진 찍기 ─ 再現
⑫ 모사와 재현
재현 행위는 해당 대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대상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정 사진은 망자를 상기시키기 위해 거기에 있지만,영정 사진이 곧 망자는 아니다. 즉 재현은 그 어떤 대상을 상기시키지만 그 대상 자체는 아니다. 어떤 풍경화도 그것이 표현하는 풍경 자체는 아니다."
대의정치는 민의에 기반해야 하지만 민의를 모사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진정으로 뛰어난 정치 행위는 관련된 민의를 모사하는 것보다는 그 열망을 정책에 얼마나 입체적으로 잘 구현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돌직구와 뒷담화의 공동체 ─ 敎學
4. 성급한 혐오와 애호를 넘어
새 술은 헌 부대에
‘논어’ 원래부터 큰 고전은 아니었어 공자 사료 여럿인데, 이상하게 집중
담은 내용 때문에 유명하다기보다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텍스트 돼
일단 고전 되면 사람들 앞다퉈 이야기 자기 생각을 주석 형식 빌려 발표해
주석사는 단순한 고전 해설 넘어시대 따라 달라지는 사상 보여줘
그렇게 발전한 주석사는 단순히 고전을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다양한 생각들을 담는 매개체가 된다.
계보란 무엇인가-법률적, 경제적,정치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흥미로운 자료
족보야말로 한국의 법률적, 경제적,정치적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흥미로운 자료가 아닐까? 거액이 오가는 경제적 차원, 신분상승과 권력이라는 정치적 차원,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법적 차원이 모두 들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태와 <논어>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유교”라는 용어의 뜻이 정밀하지 않다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공자 생전에는 오늘날 알려진 “유교”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 그리고 <논어>에 따르면, 공자는 당시 만연한 여성 혐오의 일단을 보여주되(‘양화’(陽貨)편), 족보 작성을 옹호하거나 조상신의 덕을 보라고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여자와의 염문설에는 부정으로 일관했으며(‘옹야’(雍也)편), 자신의 친아들보다는 제자를 더 사랑했다. 그렇다면 위에서 묘사한 현상들과 <논어>와의 착잡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복합적인 접근, 좀 더 역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유교’란 무엇인가
그러나 하나의 단어가 너무 많은 것을 의미할 때, 그 단어는 유용한 동시에 무용하다. 결국 ‘유교’라는 말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도대체 모르게 되어 버리는 상황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들에 다 잘 들어맞는 유교의 특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교라는 말로 지칭하건, 유학이라는 말로 지칭하건, 컨퓨셔니즘이라는 말로 지칭하건, 그 대상은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불균질하게 전개되어온 전통이기 때문에 시공을 넘어선 불변의 유교 본질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무리해서 유교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들기보다는, 사람들이 어떤 때 어떤 이유로 유교라는 말을 환기하고 사용하려 드는가에 주목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과거의 특정 문화, 전통, 혹은 텍스트를 너무 성급하게 혐오하면, 그 혐오로 인해 그 혐오의 대상을 냉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혐오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마찬가지로 특정 문화를 너무 성급하게 애호하면, 그 애호로 인해 그 애호의 대상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 대상을 정교하게 애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성급한 혐오와 애호 양자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 설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논어 에세이 시리즈가 서 있고 싶었던 지점도 그러한 지점이었다.
*에필로그
dbr.donga.com/author/article/writer_no/3286#list9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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