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에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도 인상깊었고, 언제나 처럼 같이 토론을 하면서 경험과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음번에는 3부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 <반쪼가리남작>< 나무위의 남작> 토론하기로 했습니다. 9월 27일(월) 저녁 7시입니다~.♥
사이보그가 되다 - 김초엽.김원영 지음/사계절 |
■ "김초엽x김원영, 인간의 몸과 과학기술"
기술은 인간의 삶을 더 나은 곳으로 데려갈까? 그건 '나음'의 상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인간의 몸에 관하여 '나음'을 요철 없이 매끄러운 상태로 정의하는 순간, 기술은 진짜 불편을 해소하지 못한 채 불편을 말하는 입을 막거나 어떤 종류의 불편을 더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섬세한 사유를 거치지 않은 인간의 창작물은 사회의 위계를 그대로 지닌 채 태어난다. 지금의 기술이 무엇을 간과한 채 달리고 있는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나음의 방향이 어디인지에 대해 김초엽과 김원영이 각자의 사유를 풀었다.
추천의 글
들어가며 _ 김원영
1부 우리는 사이보그인가
2부 돌봄과 수선의 상상력
3부 연립과 환대의 미래론
대담 _ 김초엽, 김원영
나오며 _ 김초엽
감사의 말
참고문헌
목차
[1] 책읽은 소감
▶ 나 자신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많이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장애에 대해 짐작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있었다. 노원구로 이사온 후, 휠체어를 탄 분 등 장애인을 자주 보게 되어 놀랐었다. 청계천을 철거주민을 노원구로 이동시켰다고 들었는데, 그 영향인가 싶었다. 하지만 장애인이 인구중 5%, 20명중에 한명이라면 더 자주 만나는 것이 정상이다.
▶ 아이들이 '장애 '운운하며 놀리거나, 배척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장애'= 정상이 아님 이라는 사회, 어른들의 생각의 반영일 것이다.
▶ 영화 <학교가는 길>에 나오고 설립시 이슈가 되었던 서진학교가 있는 강서구에 살고 있다. 서진학교는 장애중심적 설계로 학생들의 불편함이 훨씬 줄어든 환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학교의 안만 그렇고, 학교 담너머의 바깥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초등학교까치는 보조교사가 있고 통합교육을 실시해서 잘 지내왔던 경우에도 학부모들이 중학교 진학을 두고 고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생각났다.
▶ 이 책에서 제기한 ① 매끄러운 이음새의 문제( 장애인에게는 더 불편해진다.), 지금 ②현재 사회와의 즉시 통합을 말하는 청테이프 등의 문제는 매우 귀중한 논의 임에 비해 '사이보그' 라는 말은 장애포괄적 키워드로 부적절하다는 문제제기를 봤다. 자폐나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의 경험은 포괄하지 못하는 개념이기에.
https://theindigo.co.kr/archives/18572
[2] 일상에서 알차차리지 못한 것들
▶ 김초엽작가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일상에서 무관심하게 여겼던 약한부분을 포착하여 두드러지게 한다.
20대 젊은 작가에게 배우고 싶은 시선이다.
▶ 구부러지는 빨대가 필요한 경우는 미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상에서 놓친 것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윗집의 층간소음이 너무 심했는데, 알고보니 장애를 가진 성인자녀가 있는 집이었다.
▶ 장애가 낙인으로 작용하므로 감출 것인가,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가 경계성 지능인 경우, 언 뜻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알리는 쪽을 택한 학부모를 만났다. 드러내지 않으면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3] 같이 살고 싶다
▶ 코로나가 되면서 접촉이 줄어들었지만, 유튜브1인 방송 등, 혼자서 하는 활동도 결국 타인과의 연결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소속의 욕구가 그만큼 더 늘어난 것이라고 볼수 있다.
장애인 자립연대를 활동을 하고 있는 분이 '같이 살고 싶다'는 말씀을 했다. 누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닌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고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함께 살수 있게 생존권 예산을 보장)
- 자치의 경험, 함께 한 경험이 중요한 것 같다. 한 혁신학교의 경우 2/3의 학생이 학생회, 모임등에 참여하여 자치활동을 하고 안건이 있으면 즉시 공론장을 열어 의논한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섞여살다보면 자연스럽게 함께 살게 될 것 같다.
[4] 정체성, 타자의 문제
p. 49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내 안에 '타자'가 등장해서 그 타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볼 때) 시작된다. 자신을 낯선 존재로 인식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본질에 의문을 던질 일이 거의 없다. 물론 그런 의문을 지니지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SF 영화의 '휴먼'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이나 사이보그처럼 자기 정체성을 의심할 필요가 훨씬적고, 자신을 낯설게 볼 계기도 많지 않다. 표준이고 정상에 해당하는 존재, 현존하는 시스템의 안정성 가운데서 충분히 편안한존재는 자신에게 의문을 품을 이유가 별로 없다.
● 자기 스스로를 낯선 존재로 인식한 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 나는 결혼 후에 그랬는데, 여러가지 역할이 주어졌을 때 그랬다.
▶ 어렸을 때와 대학때 쌀쌀 맞다는 평가를 들었었다. 그런 인상을 줬었는지 몰랐었다.
▶ 여성들은 일생동안 그런 것 같다. 항상 타인의 잣대로 자기를 보는 시선을 요구받는다.
[5] 만일 노년에 돌봄이 필요해 졌을 때 사람과 로봇 중에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 사람에게 부담되어 싶지 않아 로봇을 선택할 것 같기도 하다.
▶ 왠지 테드 창의 작품 <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가 생각난다.
결국 그 기술이 담긴 인간의 마음을 이 중요하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 왠지
[6] 토론소감
▶ 오랫만에 묵직한 생각이 담긴 책을 읽고 토론해서 좋았다.
▶ '중립성'개념이 와 닿았다. 그동안 ' 보편'은 언제나 매우 특정한 신체, 백인-남성-시스젠더cisgender-이성애자-비장애인-중산층으로 대표되었다고 하는 말. '모든 사람' 에게 적용되는 것은 없다는 것, '정상'이란 것 없는 것이라는 말도 .
P. 203~204
보편적 설계가 아닌 장애 중심적 설계
(…) 보편적 설계가 ‘보편’의 범주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정작 보편에서 장애인들의 요구가 탈중심화될 여지가 생긴다. 인류 역사의 보편은 언제나 매우 특정한 신체, 백인-남성-시스젠더cisgender-이성애자-비장애인-중산층으로 대표되는 중립적 템플릿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 햄라이의 주장이다. 장애 중심적 디자인은 장애인의 몸이 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이러한 이해 없이 단지 모두를 위한 설계만을 원칙으로 두면,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끔 설치한 경사로가 유아차를 미는 사람과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는 유용하지만, 정작 수동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너무 가파르고 좁게 설계되는 일이 생겨난다.
▶ 인간의 생명을 주어진 ‘선물’로 보는 마이클 샌델의 ‘선물로 보는 윤리(the ethics of giftedness)’가 생각난다. 삶을 선물로 보는 시선과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욕망 사이에 서 있다.
▶ 우리 인생의 팔할은 운이기에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주변과 나눠야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P. 57~61첨단 기술로 무장한 사이보그가 되면 나의 ‘없음’은 정말로 없어질까?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identify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과학이 장애를 여전히 ‘없음의 상태(결여)’로만 바라본다면 휠체어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여전히 보행 능력 ‘없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조기기로만 간주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P. 299~304
완벽한 테크놀로지를 갖춘다면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괜찮을까?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향할 때, 열려 있는 상호 작용의 장으로 나아갈 때,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이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 (…) 한 장애인거주시설에 당뇨병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커피 믹스를 매일 열 잔 넘게 마시는 이용자가 있었다. (…) 어느 날 사회복지사가 다른 장소에서 만난 자폐성 장애인이 손으로 종이를 툭툭 끊어내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는 커피 믹스를 매일 열 잔 이상 마시던 그 이용자를 떠올렸다. 혹시 그가 커피가 아니라 커피 믹스의 포장지 떼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실제로 그랬다!)? 현실의 돌봄 공동체는 우리가 상상한 미래의 돌봄 시스템에 비하면 비효율적이고 안정적이지도 않아 보이지만, 언제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돌봄을 둘러싼 물음의 형식을 해체할 수도 있다. 발달장애인에게 심한 당뇨가 있으니 강제로라도 커피 믹스를 자제시켜야 하는가라는 돌봄 윤리의 문제는, 자기결정권과 건강 보호라는 가치 충돌에 관한 물음으로 보였다. 그러다 손으로 종이를 끊어내는 자폐성 장애인이라는 ‘타자’와 연결되자, 돌봄의 대상과 목적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다.
장애학의 도전
김도현 지음/오월의봄
‘장애’를 ‘개인의 몸’에 존재하는 손상이 아닌 ‘사회적 산물’로 볼 것을 강조한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겸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활동가 김도현이 10년 만에 새로운 저서이다. 장애인과 소수자를 향한 편견, 첨애한 장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뤘다. 여전히 지배적인 ‘우생학’ 논리와 장애인이 겪는 사회적 억압과 배제, 장애인의 자립.자기결정권, 노동 등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고도 논쟁적인 화두를 엮어냈다.
https://booksreview.tistory.com/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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