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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수/2017 서문수 토론

책읽어주는 남자

by 책이랑 2016. 12. 12.

자유논제

1.책 읽은 소감
독일 제3제국시의 이야기와 그 후의 죄과에 관한 이야기를 한여자와 한 소년의 사랑이야기로 풀어 냈다는 것이 놀라왔다.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중간에 읽다가 그때의 역사를 찾아 읽고,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찾은 후 정독했다. 사랑 얘기로도, 또 국가의 과거의 죄에 대한 이야기로도 훌륳한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같은 주제이지만 에세이형식으로 쓰였다면 이렇게 몰입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서 이성뿐 아니라 감정, 감성을 동원하고,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시켜 추체험하게 하는 이 문학의 힘임이 강력함을 느꼈다.

2.가장 인상 깊은 장면

180p 전후세대가 부모세대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반응하는 방식이 여러가지라는 것을 서술한 부분이 분석이 날카롭다고 느꼈다.
첫째로 자식세대가 부모세대를 비난 하는 현상은
비난하는 경우 최소한 수치심에서는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과

둘째로 자신의 경우 한나(부모세대)를 사랑하기에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지점이 인상깊었다.
사랑으로 서로 연류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2015년에 작가는 과거의 죄라는 책을 펴낸다.
그책  8장에서 이와 관련하여 고대 게르만의 집단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법에 의하면  다른부족에 손상을 입힌 부족원이 있다면 그럴 내쫒아야만 한다.
만일 만일 그 사람을 내쫒지 않으면 범죄에 연류된 것으로 보고  처벌을 받는다는 집단법이 있었다고 한다.

3.
프랑스는 마리안느 독일은 게르마니아를 
“민족적 정체성의 알레고리”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게르마니아를 형상화했던 두 가지 시각,
즉 남성적이고 거칠게 묘사된 ‘자
유로운 게르마니아’와
평화로움을 지향하는 ‘정숙한 게르마니아’가 융합되어


아파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미하엘에게 다가서는 그녀의

제복을 입은 단정한 모습은 마치 군인을 연상케 한다. 게다가 그녀가 들고 있는 우산은 방패와 칼의 변형인 것처럼 보인다. 슐링크의 소설에서 묘사된 한나의 제복 입은 모습 역시 이와 멀지 않다. 



게르마니아가 19세기에 “정치적 전체성으로 통합된 독일 주들이라는 개념을 의인화”15)한 것이었다면,
<더 리
더>에서 한나는 ‘독일의 운명’을 일반화한 것이다.
소설의 화자가 “한나에 대
한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183면)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나는 제 3제국의역사와 동일시된다. 이때 그녀는 ‘문맹’으로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파악할 능력이 결여된 존재이다. 


오딧세이가 언급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주인공인 미하엘의 여정, 즉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것, 일상적인 사건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16)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딧세이󰡕는 미하엘의 이러한 정

체성을 드러내는 데에 중요할 뿐 아니라, 한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에도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 미하엘과 한나의 관계에 있어 직접적으로 󰡔오딧세이󰡕가 언급된 부분은, 미하엘이 한나에게 󰡔오딧세이󰡕를 읽어주는 장면이다. 미하엘은 󰡔오딧세이󰡕를 읽는다, 그것도 두 번. 첫 번째는 이렇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두 번째는 첫 번째의 반복인 듯 보인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 하지만 이 인용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지체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맹세했소. 그녀가 맹세하기를 모두 마치자 나는 키르케의 더없이 아름다운 침상에 올랐소.” 시작만 같을 뿐 두 인용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반복된 두 번째 인용에서 첨가된 부분은 오딧세이와 키르케가 만나는 부분이다. 첫 번째 인용에서는 장대한 서사시의 첫 부분만 인용되어 있기 때문에, 미하엘과 한나의 관계가 이 신화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째 인용에서 첨가된 부분을 듣자마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한나는 키르케인가?’ 소설에서는 신화 속 다른 인물인 ‘나우시카’가 문제된다. “몸매와 외모에 있어서 불멸의 존재인, 하얀 팔의 순결한나우시카-그 이름을 읽으면서 한나를 떠올려야 할까, 아니면 소피를 떠올려야 할까? 틀림없이 두 사람 중 하나이어야 했다.” (76면) 나우시카가 키르케로 대체된 이유는, 아마도 미하엘과 한나가 만날 때면 마치 제식처럼 행해지는 목욕 장면을 연결시키기에 키르케라는 신화적 인물이 더 유용했기 때문일것이다. 오딧세이가 키르케를 만나는 장면은 호메로스의 원작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네 번째 시녀는 물을 길어 오더니 큰 세발솥 밑에 센 불을 피웠소. 그러자 물이 데워지기 시작했소. 이윽고 번쩍이는 청동 안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녀는 나를 욕조에 앉히더니 큰 세발솥에서 퍼낸 물을 기분 좋을 정도로 섞어 머리와 두어깨 위에 부으며 목욕시켜주었소.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내 사지에서 생명을 좀 먹는 피로가 가시게 해주었소.17)

영화에서 미하엘이 한나에게 첫 번째로 󰡔오딧세이󰡕를 읽어줄 때 빠져 있는 키르케 이야기는 이렇게 미하엘의 목욕장면을 통해 암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미하엘은 한나의 성적 매력에 너무나도 푹 빠져 있어 이 관계에 대해스스로 성찰할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키르케 이야기는 한나의 침상에서 이미 구현되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성찰 불능은 그녀의 내밀한 곳을 응시하는 그의 태도를 묘사하는 소설 속의 한 대목에 다음과 같이 암시되고 있다.

그녀는 그녀의 몸 안쪽에 들어앉아 자신의 몸을 몸 자체에, 머리가 내리는 어떤명령에도 방해받지 않는 그 나름의 조용한 리듬에 내맡긴 채 외부 세계를 잊어버린 듯이 보였다. 바로 이와 같은 외부 세계에 대한 망각이 스타킹을 신을 때의 모든 태도와 몸놀림에도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스타킹을 신을 때의 그녀는 굼뜨지않고 오히려 유려하게 우아하고 고혹적이었다. 그것은 젖가슴과 엉덩이, 다리에 대한 유혹이 아니라 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바깥세상을 잊어버리라는 요구였다. (19면)

‘(외부)세계의 망각 Weltvergessenheit’은 오딧세이가 키르케의 땅에서 보낸 세월과 적절하게 맞물리는 표현이다. 

두 번째 인용이 나올 때, 미하엘은 감옥에 수감된 한나를 위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있다. 이미 키르케의 위험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하엘이 녹음에 집착하는 것은, 첫 번째 만남이 그만큼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년과 수상한 여인의 만남은 소년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그는 이제 거리를 두고 성찰에만 전념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미하엘은 오딧세이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그와 닮은 듯 닮지않았다. 첫 번째 󰡔오딧세이󰡕를 낭송할 때 그는, 오딧세이가 키르케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것과 달리 성급히 그녀에게 빠져버린다. 두 번째 낭송에서는 오딧세이가 키르케로부터 모든 약속을 다 얻어내고 그녀를 통제하면서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달리, 다시 섣불리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현대판 오딧세이는 한나/키르케에 대해 이중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은 신화가 가지는 기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신화는 내러티브적 인 핵심을 아주 높은 정도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사소하면서도 인상 깊은 변형력이 결합된 이야기들이다.”18) 신화의 지속성은 이미지적이거나 제의적인묘사에서 신화를 거듭 인식하게 하는 매력을 부여하며, 변형가능성은 새롭고도 독자적인 표현수단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매력을 부여한다.

키르케와 한나의 결합을 통해 구현되는 신화와 역사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할 여지를 준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주인공의 마비증상이다. 홀로코스트가 나의 범죄일 수도 있었으리라는생각, 하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는 아닌 것을 알고 있는 주인공의 이중적 상황, 즉 “일정한 거리를 지닌 동일시 Identity-at-a-Distance”19)로 인해 생기는 주인공의 무기력함은, 책에서는 ‘마비’라고 표현되고 있다.

나의 그런 태도는 마치 한 달 한 달 죽지 않고 살아남아 강제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가면서 새로 오는 사람들의 공포심을 무심하게 기록하는 수감자와 같았다. 나는 살인과 죽음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느낄 법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든 기록은 이러한 마비 상태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

이렇게 널리 번진 마비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마비가 범행을 저지른 자와 희생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즉 나중에 판사나 참심원, 검사나 의사록 작성자의 자격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다루게 된 우리 모두를 사로잡아버렸다는 사실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던 당시에 […]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111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생겨났다가 금방 마취 상태에 빠졌던 모든 의문들과 불안들, 비난들과 자책들, 모든 경악과 모든 고통들이 다시 돌아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추위를 타는 것이 당연한데도 추위를 타지 않을 때 의사들이 이 상태에 대해 어떤 진단을 내리는지 나는 모른다. 나 자신의 진단으로는 내 몸 전체가 마취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179면)

범죄를 저지른 자나 희생자,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과거의 끔찍한 현실을 접하게 된 가해자의 다음 세대에게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이 보편적 마비상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우리는 블루멘베르크의 신화론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마비는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현실의 절대성에대해 주인공이 가지는 무기력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신화에 기댄다. 블루멘베르크의 신화론에 따르면, 신화는 “현실의 절대성을 감소시키는 작업”20)이며 신화의 과제는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은 이번에는 다른 무기력의 상태, 정신분석학적 연관성 속에서 말하자면 모태로의 회귀나 퇴행과 같은 신화의 원초적 무기력상태로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이 역사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마침내 현실의 지배에 대한 인식을 통해 얻은 모든 것이, 인간에게서 무기력의 단계, 말하자면 고대의 체념 상태로 다시 가라앉으려는 위험, 아니 그러한 동경을 빼앗아갈 수 없었다는 것”21)이다.

소설 속 화자 혹은 영화 속의 내레이터가 자신의 경험 전체를 관류하는 주도적 형상으로 신화적 인물인 오딧세이를 선택적으로 불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류의 신화적 회귀에 다름 아니다. 화자인 미하엘이 행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형태 없는 끔찍한 무명성과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의 위협적인 압도적 성격,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낯선 것의 비친근성을 몰아내고 제거하려는 시도”22)인 것이다. 

http://s-space.snu.ac.kr/bitstream/10371/87393/1/3.%20%EC%97%AD%EC%82%AC%ED%99%94%EB%90%9C%20%EC%8B%A0%ED%99%94%20%EB%98%90%EB%8A%94%20%EC%8B%A0%ED%99%94%ED%99%94%EB%90%9C%20%EC%97%AD%EC%82%AC%20-%EC%8A%A4%ED%8B%B0%EB%B8%90%20%EB%8B%AC%EB%93%9C%EB%A6%AC%EC%9D%98%20%EB%8D%94%20%EB%A6%AC%EB%8D%94%20%EC%9D%BD%EA%B8%B0.pdf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 - 기원전 43년 12월 7일)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로 어떠한 텍스트에서도 볼 수 없는 인간다움, 사람냄새, 공동체의 정신, 덕, 용기, 절제

등이 들어 있다. 그기원전 80년 로마, 친부살해(Parricidium)죄로 한 청년이 고발당했다.섹스투스 로스키우스(Sextus Roscius)다. 정의가 무엇이고 공동체는 어떠해야하며 그 구성원

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드러낸다. 말이 곧 그 사람이 아니던

가? 키케로의 말이 곧 키케로의 정신이자 전부였다.

알 수 있는 부분으로, '신 앞에서의 모든 피조물이 동등하다.'는 작가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은 패배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희망을 버리다니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것은 확실한 죄란 말이다. 아니 죄 같은 거 생각해서는 안돼. 그 밖에도 문제가 산같이 있어. 게다가 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 노인의 희망이 되살아남.


'난 잘 몰라. 죄란 걸 믿는지 어떤지도 확실치 않다. 필시 죄일 것이다. 물고기를 죽인다는 것은 설혹 자기가 먹기 위해서이며, 많은 사람을 먹이기 위해서 했다 해도 죄는 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죄가 되느냐 말이야. 죄니 뭐니 하는 것 생각지 않는 게 좋다. 첫째는 이미 지난 일이고, 그런 것을 생각하기 위해서 돈을 받고 있는 인간도 많지 않은가. 죄에 대해서는 그러한 작가들이 생각해 주는 것이 좋겠다. 넌 어부로 태어났어. 물고기가 물고기로 태어나듯 성 베드로도 어부였다. 대 디마지오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 물고기를 죽인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위하는 노인


하지만 노인은 자기가 관계된 일에 대해선 이것 저것 생각을 하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읽을 거리도 없고 라디오도 없었으나 생각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아직도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네가 물고기를 죽인 것은 단지 살기 위해서도 아니다.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도 아니다. 너는 긍지를 갖고 물고기를 죽인 것이다. 어부이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너는 고기가 살아있을 때, 아니 죽어서까지도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 만일 네가 사랑하고 있다면 죽었다 해도 죄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더욱 죄가 무거울까. 그건?'


"좋아, 영감. 자넨 너무 생각을 한단 말이야." 노인은 큰 소리로 외쳤다. - 계속 생각에 몰입하는 노인. 고기를 죽인 것을 정당화함

/2016_spring_02.pdf



 , 그래서 서양에서는 남자가 여성의 육체에 넋을 빼앗길 대는 키르케에게 흘렸다는 비유를 합니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 여신 키르케와 오디세우스가 처음 대면했을 때도 샘과 숲, 강에서 태어난 요정들이 하녀로 등장하면서 온수목욕이란 손님접대를 준비한다. 오디세우스가 “동료들을 풀어 달라”고 키르케에게 요구하는 것은 목욕을 마친 뒤 좋은 옷을 입고 키르케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다.이 같은 일련의 ‘목욕 서비스’신에 대해 고대 희랍문학 전문가인 강대진 박사는 서사시의 주인공들이 원시적 자연영역에서 문명세계로 진입할 때마다 목욕이 반복되는 점을 들어 목욕을 ‘오디세우스가 문명세계로 진입했다는 징표’로 해석한다. http://m.blog.naver.com/maximilian1/110190052916


는 러시아 민중의 정신, 신의 의지를 믿으며 그 의지에 순응하며 거역하지 않는, 이러한 보이지 않는 러시아 민중의 정신이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


 그녀는 타인과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서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의 기회가 차단되었던 인물이다. 이것은 곧 ‘말’(언어라고 포괄적으로 부르는 게 허용된다면)이 사라진 세계에서의 기계적인 ‘행위’가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인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이 이같은 한나에게 실망하고 거리를 두는 것은, 그가 전쟁 1세대와의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인류 발생 이후로 지속되어온 고통의 역사에 대해 ‘구경꾼’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격론장이 되었다.


원작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내가 법에 대해 정말 좋아했던 건, 법이 역사나 철학처럼 끝없는 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법에선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사건들은 판결받는다.”

법대 교수이자 판사,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이력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는 자신의 고등학생 시절 고마웠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어렵게 털어놓은 바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스탕달, 디킨스, 발자크를 영어로 읽게 했던 그 멋있는 선생님은, 실제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게슈타포와 관계있는 사람이었음이 밝혀졌다.

1944년생인 슐링크 세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통스런 깨달음을 매우 자주 겪었을 것이다. 슐링크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그들의 경험에 대해 방어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는 우리 세대의 독일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나이든 독일인에게 전쟁에서 그들이 무얼 했는지 물어보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또한 우리 자신도 동시대인과 함께 터놓고 대화하는 것 역시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슐링크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개 형사거나 그들 삶의 숨겨진 단서를 찾아가는 남자들이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5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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