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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독토

이것이 인간인가- 숭례문학당 새벽독토-2018.2.24

by 책이랑 2018. 2. 23.
이탈리아의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가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간의 기록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타락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작가의 대표작이자, 현대 증언 문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것이 인간인가 - 10점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돌베개

인간 사회를 유지시켜주는 모든 평범하고 사소한 습관과 사물들이 제거된 수용소에서는 수인들이 하루하루 좀비처럼 변해간다.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 의해 제거되며, 살아남는 자들은 나름의 책략을 마련한다. 형제애나 동지애는 없지만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하고 수급하기 위한 지하경제는 원활히 돌아가며 그 주된 동력은 절도와 사기다. 작가는 자신이 목격하고 감내한 공포를 세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특유의 절제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를 운영하고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경험에서 나치에 한정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위기를 보았다. 레비가 그려 보이는 수용소 세계는 인간 세계의 축소판이다. 그 안의 포로들 한 줌의 권력을 위해, 또 자신보다 더 낮은 계층을 만들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레비는 폭력의 체제에 노출된 인간이 어떻게 그 체제와 닮아가는지 수용소라는 실험실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토론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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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은 숭례문학당 새벽독서토론 8기 4번째 시간으로서
현대증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로 토론을 하겠습니다.

■ 자유 논제

1.먼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느낀 공포와 극한의 폭력에 드러난 인간의 존엄성과 타락 과정, 체험을 기록한 이 작품에 대한 별점과 소감을 말해주십시오.


▶ 나는 4.8 점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을 기록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 나도 4.8 점이다.
- 1,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건인 홀로코스트를 기록했다는 점, 
- 이책이 해당 주제의 keybook이라는 점서 그렇다.
- 그리고 끔찍한 체험을 이렇게까지 담담하게 그려낸  점에 대한 존경심
이 들어서이다.

▶ 책에 머리에 오래 남을 끔찍한 장면이 나올까봐 무서운 영화를 볼 때그러는 것처럼 방어적으로 책을 읽었다. 다행이 그렇게 느껴진 곳은 없었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10%에 속한 저자가 쓴 글이다. 책을 읽고 (사실 알 길이 없지만) 나는  희생당한 90%의 사람의 시점이 알고 싶었다. 아마  소설의 형식으로는 그것이 가능할 것 같다.

▶나는 (다소 박한 점수인)3.5을 주었다.
청년기에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읽었던 내용과 비슷하다고 느껴기 때문이다.

▶본문을 읽으면서 책내용이 너무 담담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후기에 독일인에 대한 언급한 부분을 읽고 저자의 분노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다.
수용소에는 여러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간의 민족간의 관계를 잘 묘사해주었다.

▶ 나는 3.5이다. 개인적 상황이 바닥을 치고 있는 때에 읽어,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 내용이 심각한 것이어서 오히려 어려운 내 상황을 축소시켜 바라보게 되었다.
책을 다시 읽는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낮은 점수를 줬다. 재미가 없어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가고 궁금한 점이 생겨서) 책을 읽으면서 이 당시 상황과 관련한 나치, 유대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처절한 고독의 밑바닥을 잘 그려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군데군데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냉소적인 위트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토리노 공대생의 이과적인 유머감각??^^;; )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중심주제가 '인간성'에 대한 성찰이기에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와는 결이 다르다는 생각한다.




2.  이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이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나는 수용소에 의무시설을 설치한 것에 좀 놀랐다.
환자로 판정받으면 최대 20일까지 그곳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런 종류의 일이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일종의 배려인 것 같아서(?)다.


▶나는 p. 9 서문 다음에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나온 시가 기억에 남는다. 

이 책에 기록된 바를 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언제든 다시 재현될 비극이라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따스한 집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당신,

You who live safe

In your warm houses;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음식과 다정한 얼굴을 만나는 당신,

You who find on returning in the evening

Hot food and friendly faces:


    생각해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Consider if this is a man
    진흙탕 속에서 고되게 노동하며

    Who works in the mud

    평화를 알지 못하고

    Who knows no peace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Who fights for a bit of bread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Who dies because of a yes and because of a no

    생각해보라 이것이 여자인지.

    Consider if this is a woman,

    머리카락 한 올 없이, 이름도 없이,

    Without hair and without name

    기억할 힘도 없이

    Without enough strength to remember

    두 눈은 텅 비고 

   한겨울 개구리처럼

    자궁이 차디한 이가.
   Vacant eyes and cold womb

   Like a frog in the winter:

    이런 일이 있었음을 생각하라.


당신에게 이 말들을 전하니
가슴에 새겨두라.

Reflect on the fact that this has happened:

These words I commend to you: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잠자리에 들 땐, 깨어날 때나.

Inscribe them on your heart

When staying at home and going out,

Going to bed and rising up;

당신의 아이들에게 거듭 들려주라.
Repeat them to your children:

    그러지 않으면 당신 집이 무너져 내리고

    Or may your house fall down,
    온갖 병이 당신을 괴롭히며

     Illness bar your way,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을 외면하리라.

     Your loved ones turn away from you.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If This Is a Man":> 가운데 

           

이 책의 표지 그림은 <자식을 잃은 아픔>
 1차 세계대전 중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  사회적 발언을 판화·조각으로 표현한 예술가<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 의 작품이다.





▶p. 53 내가 왜 씻어야 한다는 말인가- '입문'  부분이다.

( 극한 상황에서 일상적인 일이 매우 사소해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나중에 나오지만 이런 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는 방법이기도 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우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라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닦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56-57


▶p.56 인간관계에서 소진된다는 부분~이 인상깊다.

▶pp. 57-58아무런 권리가 없을지라도 온 힘을 지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지키는 것이라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이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57-58

▶ 이 책에 나온 외모에 대한 언급이 인상깊었다.
책에도 외모를 다듬어서 살아남은 사람이 나온다.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장에 나오는 p.141
엔지니어인 알프레드  L) 
다니는 회사에서도 비싼옷을 사서 외모를 잘꾸며라 라고 강조하는 말을 들은적도 있고
외국인데도 비싼 옷을 입은 사람을 대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사람과 확 다른 내용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동안  외모가 주는 이점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그렇다라는 것이 인상깊었다.

▶ p. 66  신발에 관한 부분이다.
진흙투성이의 너덜너덜 떨어진 신발들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그의 특권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발을 가지고 카베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그 신발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를 생각해보면 왜 그런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 276 고의적인 태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독일인이 
알고 싶지 않아 모른척하고, 무지를 획득하여 자신을 방어한다는 것이다.
비극적 시대를 알려주는 문장이다. 질문해야 할 상황에 질문하지 않고 눈을 돌리는 것 자체가 유죄라고 말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3.수용소에서 삶의 마지막 모습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15쪽)



▶ 나는 TV에서 볼때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보따리에 귀중품이 아닌 먹을 것과 기초적인 일상용품을 챙기는게 이상해 보였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니 이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본능'에서 나오는 행동인것 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배고픔, 추위 때문에 자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 “자살은 동물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이기에 수용소 안에서 자살은 극히 드물었지만 해방이후 포로들 중에 자살을 택한 이들이 많았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 그 부분을 감동적으로 읽었다.
요리를 즐기지 않는 나는 설겆이를 담당한다. 매우 피곤한 어느 날, 어느 새 설겆이대에 서 있는 나자신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이 엄마들도 아마도 그런 행동이 아니었을까.... 한다.
▶ 안도현 시인의 시 <스며드는 것>이 생각났다.
엄마게가 뜨거운 간장이 쏟아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들을 다독거리며 보듬는 내용인 그 시가 연상되었다.
(이 시를 읽고 나서 간장게장을 못먹는 사람이 생겨났다고 한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일상적 습관이 위기를 버티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최근에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는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배고프다는 얘기를 하면  밥을 차리고, 또 반찬하고 그랬다. 그 순간만은 고민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한편으로는 휴식이 되기도 했다.

▶ 아이들에게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게 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4.수용소에서  ‘특권층’이라 불려었던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프레드   L- 외모 /  엘리아스-일잘하는 사람, 도둑질 /  앙리-조직, 동정, 도둑질 등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한다.
다양한 인간의 모습,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 있다.

▶수용소에서는 나치, SS는 거리가 있어 접할 수 없어 분노할수 없었고
-근접거리에 있는  동료수용자들에게 '몹시'화가 났다고 말했다.

▶ 엄마라서,  누군가를 위해서 등 살아남을 이유를 찾은 사람은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라면 남을 생각지 않고 그렇게 그렇게 행동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완장'을 차게 되었는데  자기 능력으로는 수행하기에 힘겨운  자리인 경우,  비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 같다.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것이 좋다고 한다. 

▶  프리모 레비의 다른 작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보면 패전해서 수용소가 해체되는 상황에서도  수용소장이 수용소를 떠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권력에 취한 것이다. 그는 자기얼굴을 넣은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었다.


억압적인 상황을 즐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 동물들이 무리에서 개체를 배척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는 말이 나온다.

▶ 일제시대의 '마름'이 생각났다.

▶ p.139 에 보면 살아남는 비결 세가지가
조직만들기,권력자에게  동정구하기, 약자에게 도둑질하기
라고 나온다.
일상에서 비난받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며 드러나지 않게 할 뿐인 것 같다.
나는 이런 것에서 당당한가? 자문을 해보았다.

▶TV에서 국회의원들이 몸싸움을 하는것을 보면, 한심하고 
처음부터 저러지는 않았을 텐데, 저 자리에 가면 그렇게 되는건지?? 하는 한탄을 한다.

나는 그래서 그런 자리에 있지 않기를 선택해왔다. 그럴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의사는 아픈사람을 계속 만나고, 검사는 사람을 계속 의심하고 제압해야 한다.
'거울애'라는 것이 있는데 남의 행동을 보면서 자기의 그부분의 근육도 자극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나, 검사등이  자신을 지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
하다. 

▶국회의원보좌관과 친분이 있다.
이분이 유독 정치적 이슈에서만은 이성적이지 못하다.
생존/이익이 걸려 있다면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다 같지 않고 유난히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고 본다. 그런 사람들이 기회가 왔을 때 권력에 복종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비열해진다고 본다.

▷ 그런에 앞서 나온 말중에 수용소에서의 행동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는데 그건 생존욕구라고 본다.
현사회의 일상에서의 행동은 '성공욕구'이며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p. 84에 보면 알베르토는 상처입지 않고 타락하지도 않은채 수용소에서 살았다고 했다. 

▶ 나의 할아버지가 늘 하신 말중에 君子和而不流(군자화이불류)'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울리기는 하되 휩쓸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를 잘 지켜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치인의 다툼 등에 관한 건 화합의 순간은 기록하지 않고
갈등에만 촛점을 맞추는 언론의 보도 행태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5. 수용소를 지배했던 사람들이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었으며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1987에 보면 청자켓을 위아래로 입은 전투경찰, 백골단이 나온다.
시위전에 그들을 극한상황에 가둬놓았다가 시위대에게 증오를 가지게 만든 후
시위를 진압에 투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토록 폭력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나는 87학번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1987영화가 과장이라고 말하는데 오히려 덜어낸 것임을 모르더라. 프리모 레비도 과거를 과장한 것으로 오해받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축제에서 시위대와 진압대 두편으로 나누어 각각 밀가루와 신문지방망이로 
"모의시위"를 했었다.
진압대로서 신문지로 상대를 때렸는데도  쾌감, 엄청난 자극이었다. 제동을 걸지 않으면 무감각해질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얻어질 것이 없어 그 행사는 중지되었었다.

▶그 시절 대학에 와서야 경찰과 군인이 시민을 죽였다는 말에  설마 했던 광주에 대한 소문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대학에 와서야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는데 그런 소식을 접하지 않은 사람과는 생각이 너무 다를 것이다. ( 우리사회의 지역, 세대간 갈등의  이유가 이해가 간다.)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문자로 변하는 유리포프라는 설치미술가의 작품이 있다.
현대에는 자극이 엄청나게 많아서 언어의 자극에 무감각해진다는 의미라고 한다. 
너무 많은 정보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요새 아이들의 상황인 것 같다.

▶ 히틀러는 복장이나 눈빛 등을 체크하면서 대중선동기술을 무수히 연습했다고 한다. 
저자의 후기에  '들뜨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지도자를 잘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가 모여서 하는 토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교사로서 정해진 교과를 조정하더라도 아이들과 꼭 토론을 하고 있다.
직접 토론을 해봐야 의사결정과정을 알 수 있고, 나중에라도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다른 도구로,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을 앞세워 우리을 설득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선각자와 가짜 선각자를 구별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선각자를 의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들의 주장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그것의 단순성과 눈부심이 우리를 들뜨게 한다 해도, 무상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더 좋다.(pp.303-304)


▶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의 개념을 알게 되었고
- 왜 신영복 선생님의 "화이부동"을 강조하며 계몽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호모 사케르'란 로마시대의 특이한 죄인으로서 사회적, 정치적인 삶인  bios를 박탈당하고 생물적 삶인 zoe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이다.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다.(175) 이다.   호모사케르를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수용소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 프리모 레비가 결국 하고자 한 말인 것 같다. 박노자 교수가 북한주민을 악마화하여 보도하는 언론의 보도행태에 대해 우려를 표한바가 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계몽주의는 근대 서양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과학과 기술, 이성을 앞세워 동일성을 강요한다. 그러나 동일성은 분쟁과 충돌을 낳게 된다. 상대를 인정하되 같아지려고 하지 않는 것, 계몽주의를 벗어난 세계관이 필요하다.


 

아우슈비츠의 붉은 장미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입니다

http://www.shinyoungbok.pe.kr/index.php?mid=travel&sort_index=title&order_type=asc&document_srl=2168


" 아유슈비츠는 단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찬미하는 모든 '번영의 피라미드'에 바쳐진 잔혹한 희생의 흔적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내면보다는 외형의 화려함이 우리의 시선을 독점하고 있는 오늘의 풍토에서는 전도된 가치가 얼마나 끔찍한 희생을 동반하는가를 묵상하는 제단(祭壇)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나는 '죽음의 문'안으로 길게 뻗어 있는 철길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철길은 이제 잡초만 간간이 자라고 있는 녹슨 가찻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에는 과연 '죽음의 열차'는 없는지. 자기 민족의 번영과 영광을 위하여 질주하고 있는 '번영의 열차'는 없는지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문득 누군가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철길의 종착역은 어디에 있는지,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이어지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악마화, 비인간화란 결국 제노사이드로 연결되는, 타자에 대한 최악의 접근법이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간화는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최악의 범죄 중 하나를 준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같은 방법으로 지금 진행 중인 북한과 북한인에 대한 악마화는 결국 평양이나 원산의 민간인을 대량 살상할 폭탄을 하등의 가책 없이 떨어뜨릴 잠재적 전범들을 키우고 있다. 한 사회를, 세계를 위협하는 악마적 지도자를 따르는 세뇌된 좀비들의 무리로 그린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며 범죄적이다. 우리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막고자 한다면 우선 상대방이 우리와 똑같은 존엄성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부터 인정해야 한다





2.저자가 1987년 이탈리아 토리노 자택에서 돌연 자살을 선택한 것이 충격이었는데
Primo Levi, Holocaust Writer is Dead at 67
New York Times, OBITUARY
April 12, 1987

여러분은 저자가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사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기억의 고통? 대학살의 기억을 잊은 세상? 아니면 어떤 것 생각하는지?


대학살의 기억을 잊은 세상 때문일 것 같다.
나는 저자의  자서전인 <주기율표>가 생각난다.  
기율표를 원용하여  주기율표 순서대로 원소를 나열하고, 이것이 환기하는 일화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쓰여진 최고의 자서전이다.  p.51  아연 페이지에서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너는 파시스트가 아냐. 파시스트는 모두가 똑같기를 원하는데, 너는 그렇지가 않아.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프리모 레비는 스스로를 "나는 아연에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불순물이며, 소금과 겨자다.(p. 54)"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긍정적인 입장) 그러나 ( 아우슈비츠에 관한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되고 나자)  본인이 변해간다는 자괴감과 세상이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기억할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치고 더이상 지탱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한다.

 홀로코스트 기념관 초입에 있는 프리모 레비의 말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 this is core of what we have to say."
(이건 일어났던 일이고,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 이것이 우리가 말해야 할 핵심이다)


▶ 처음에는 그에게 "영웅적"이라고 칭찬했던 사람이
" 시간이 많이 지났지?" 라고 하며 외면했기 때문이 아닐까?

▶ p.338 에 보면 이를 이해할수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 위험하다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기거나
- 풍요로운 가운데 '과거'로 인식하거나
-경험이 "과장"된 것이라거나,
-그를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 그것을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시각이 많아져서가 아닐까 한다.

▶ 인간의 본질에 대한 좌절 때문이 아닐까?
전환점을 돌아 
역사가 진보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회가 바뀌지 않아 아우슈비츠와 같은 비극이 재현될 것이라 생각한 데서 온 절망감 때문일 것 같다.

 ▶ 프랑스의 극작가 이오네스코의 희곡 작품 <무소(코뿔소)>가 생각이 났다.
사람이 코뿔소로 변하는 가공의 질병인 코뿔소병(rhinocérite)을 제재로 한 우화이다.

 베랑제는  친구인 장과  찻집 테라스에 앉아 일요일 아침을 보다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가는 코뿔소 한 마리를 봤다. 깜 짝놀란 친구 장과는 달리 베랑제는 무관심한 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베랑제의 회사에도 코뿔소가 몰려들고  마을 곳곳에서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했으며 베랑제는 친구 장이 자기 눈 앞에서 코뿔소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다.  마을은 이제 코뿔소들의 천국이 되어 떼로 몰려다니며 건물을 하나 둘 부수기 시작했다.  베랑제는 자신도 언제 코뿔소가 될지 몰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의 애인마저,   “우리들이야말로 틀림없이 비정상적일 거예요.” 라는 말을 하며 코뿔소로 변해 버리고만다.  주인공 베랑제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코뿔소로 변하는 현실에서 인간으로 남아있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오네스코는 「코뿔소」서문에  나치주의자들의 시위 광경을 기록했다. 이상의 실현을 위해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무고한 이웃을 수단이나 제물로 삼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 움직임이 단체나 지방의 경계를 넘어 나라 전체를 삼키는 무서운 소용돌이로 변해간 히틀러의 나치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작품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다가  "히틀러는 왜 유태인을 미워 했는가?"
과연 "유태인은 어떤 사람들 인가?"라는 의문이 들어 자료를 찾아 보았다.
- 결정적인 요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유였다.  1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가 붕괴했다. 당시 독일 경제와 언론은 유태인이 좌지우지했다.( 1919년 당시 독일의 민간은행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 증권시장 유태인들이 장악,  독일 신문의 약 절반이 유태인 소유, 연쇄백화점의 80%도 유태인 소유)  히틀러는  '소득이 없는 유대인 주식 재벌과 은행 재벌'의 '불로소득'을 몰수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싫어하는 독일의 중산층의 기본 욕구를 대변했다. 또한 볼셰비즘 앞에서 떨었던 독일 노동자계층의 두려움을 부채질해서 유태인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1. 생존자는  ‘그 기억을 잊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과 
‘기억을 자신의 저장고에 넣고 잊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로 태도가 나뉜다고 하는데 
자신이 수용자의 입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 같은지?.


▶ 나는 기억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겠다. 그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수치심을 봤던 기억이기에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증언하고, 힘들더라도 용기를 내고 잘 버텨내고 싶다.

▶나는 잊고 싶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개인이 살아가기 위해 잊고 싶을 듯하다.

▶ 나는  기억하는 것을 택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처럼 나를 대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암웨이와 같은 네트워크 마케팅에서는 친구사이가 순식간에 판매자와 소비자 관계가 되어버린다. 커밍아웃 후에 나를 전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한 사람으로만 바라볼 것이 두렵다.


■ 토론소감

▶ 어려서부터 히틀러에게 관심이 많았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어머니가 원하지 않았던 그의 불우한 출생과 남성성이 없음을 정복욕, 대중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것, 소아마비였던 괴벨스의 결핍  등 유년의 불우한 상처의 영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매우 크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오늘 다른 측면에서의 분석을 들었다. 토론을 통해 풍부해진 느낌이다.

▶ 과거 기억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언제든 재현될 상황이라는 것
그런데 지름길이 아닌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해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어떤 한 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전체를 보는 시야를 길러야 겠다고 생각한다.
오지랍이라고 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옳지 않은 일에 침묵해서는 안되겠다.

▶ 나는 인간은 타고난 본성이 있는데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프리모 레비는 소수자였다.  나도 다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기에 내면적으로 나 자신을 소수자라고 느껴왔다.  지금은 여러  소수자들을 연결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소수자의 외로움 때문에 자살한 것 같다. 이책과 함께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읽었다. 시기마다 인연이 되어 다가오는 책이 있는데, 이 두 책에서 힘을 얻어 이 시기의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책이 혹시 유대인의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한 선전도서인지를 의심하면서 읽었다. 
   ......

▶학교 다닐때 배우는 것에 대해 어떠한 질문이 일지 않았었다. 다 당연하게 느껴졌었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 앉은 자와 구조된 자> 아우슈비츠 문제에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를 둘러싼 굉장히 논쟁적인 질문을 품고 있다. 폭력(이토록 끔찍한 폭력이, 왜?), 책임(그 책임은 누구에게, 어디까지?), 기억(이 사건은 어떻게 기억에 남을 것인가?), 증언(이 사건은 증언 가능한가, 그 증언은 전해질 수 있는가?), 윤리(극한의 피폐와 갈증 속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물 한 모금을 동료와 나누지 않은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등,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계속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그가 자살을 인간적인 권리로 생각하고 선택해서 실행했을 듯 하다.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적극적 표현이기도 하다.)

▶ 글을 빨리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멈춰가면서 읽었다.  오늘 토론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책읽기를 하게 된 것에  만족한다.


3월 10일 새벽독토 9기에서 또 만나요.
http://www.shdang.kr/programDetail/9YryrSkbgk2hzFo8F
제발~





참고 도서


[1] 호모 사케르

호모 사케르 - 10점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호모 사케르'란 로마시대의 특이한 죄인으로서 사회적, 정치적인 삶인  bios를 박탈당하고 생물적 삶인 zoe밖에 가지지 못한 존재이다.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다.(175) 이다. 호모사케르를 인정한다면 언제든지 수용소가 재현될 수있다는 것이 프리모 레비가 결국 하고자 한 말인 것 같다.

전통적 주권이론에서는 주권이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법을 멈출 수 있는 권한, 법을 멈추고 예외 상황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다.  국가권력은 법 외부도 내부도 아닌 식별되지 않는  법질서 외부의 영역, 예외를 만들어 낸다.  예외는 “무언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그것을 포함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관계”(59)이다. 

ex) 이주노동자가 그러한 위치이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는 폭행을 하거나 임금을 체불해도 무방하다.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이를 참지 못하고 경찰서로 달려가면, 도리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 - 10점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문학과지성사

<계몽의 변증법>은 집단 수용소의 대량 학살과 전쟁을 통한 살육이 한창이던 2차 세계대전 중에 두 망명 지식인이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해 총체적인 해석을 시도한 책이다. 
.......

20여 년 뒤에 쓴 「개정판 서문」에서 보듯 그 후의 역사가 본론에서 보여주는 '어두운 진단'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20세기 후반 이후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 자연파괴와 소외된 노동, 대량소비사회의 등장과 같은 현상들은 이 책을 더욱 중요한 고전으로 만들었다.

-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는 계몽과 이성이 동일성을 추구하면서 이에 반하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축출해버리는 것과 똑같다.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말이다. 가난한 자가 자신을 가난하게 만든 세력이나 사회 구조가 아닌 또다른 피해자에게 증오를 품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쉽게 볼 수 있다.

http://blog.aladin.co.kr/komah/1320820


레비의 증언은 단순한 체험수기가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폭력적인 현대 역사를 가슴에 새겨 두길 바랐으며, 그래서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인간 내부의 집단적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으며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알고 있었다.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한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해 살금살금 들어오거나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저항할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 

[3]현대성과 홀로코스트


현대성과 홀로코스트 - 10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새물결

바우만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반문화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의 생활방식, 신념, 가치 등에 저항하고 대안을 창출하는 문화로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한다. 자본주의적 인간관계는 새로운 문화가 그것을 제거해버리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현대인의 일상생활은 자본주의적 문화로 잠식되어 있다. 언뜻 무해해 보이는 이 문화들은 현대인들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소비로 정의된 삶에 가둬두고, 인간의 행위를 단조로운 반복 속에 단단히 묶어두며, 지배체제에 복종하는 것을 합리성으로 위장시킨다. 

바우만은 “문화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을 피할 수 없는 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문화혁명’을 언급한다. 문화혁명으로서 이 자본주의 문화를 없애지 않는 한 인간의 주체성 회복은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의 지점은 구체적인 권력과 수단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문화에, 다시 말해서 사람들의 상식 속에 있다고 말한다. 그 헤게모니를 뒤집고 대중의 상식을 바꿔나가야 한다. “어떤 대안적인 헤게모니 문화가 현재 헤게모니 문화와 그 상식의 기반을 조금씩 무너뜨릴 때만 새로운 대안 사회를 건설하려는 의지로 나아갈 수 있다.”




왜 인간은 서로를 죽이는가? 어떻게 하면 이 살육의 비극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하려는 사유의 노력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에 따르면 정치 지도자들은 민족.종교.인종.국가.지역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형성되고 구성되는 과정 그리고 그 기억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 과정에 개입하고 그 기억을 조작하거나 왜곡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제노사이드 범죄나 잔학 행위를 저지르게 한다. 나치 독일에서의 홀로코스트, 보스니아에서 일어난 민족 청소 등 20세기에 발생한 대부분의 대량 학살 사건이 이 기억의 정치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기억과 정치의 결합 고리가 부른 죽음의 비극을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또 다른 차원의 ‘기억’, 즉 ‘생존자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서 그 해법을 찾고 있다. 홀로코스트와 보스니아에서의 민족 청소와 같은 대량 학살을 경험한 생존자의 목격과 증언에 귀 기울이고, 인간성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그 기억을 전달하고 삶을 보존하는 윤리를 발전시키고 내면화할 때 제노사이드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10점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창비



[7] 인간 본성의 역사

인간 본성의 역사 - 10점
홍일립 지음/에피파니

“인간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이제껏 이루어진 사상가들과 과학자들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해낸 ‘최초의 책’이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이해한, 인간 본성의 모든 관념을 시간적으로는 통시적, 내용적으로는 전체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

저자 홍일립이 약 5년간의 칩거와 성찰과 공부로 완성한 이 책의 주된 내용은, 인간 본성의 관념을 주제로 공자, 맹자, 순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동서양의 주요한 사상가들, 마키아벨리와 데카르트, 홉스, 로크, 흄, 루소 등 서양 근대 초기와 계몽기의 독창적인 철학자들, 마르크스와 다윈, 프로이트, 파레토, 보아스, 스키너 등 근현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이끈 선구자들, 그리고 에드워드 윌슨과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현대의 정치ㆍ사회 관련 이슈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생물학과 신경과학 연구자들의 견해와 그 한계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역사’(에피파니·사진)를 낸 홍일립(본명 홍석기·61) 
 웬만한 사전 두께(7cm)다. 동서양의 고대부터 현대, 철학·사회과학과 생물학을 넘나들며 
1115  페이지 인간 본성에 대한 관념의 역사를 전개한다. 469명의 이론가가 등장하고 참고문헌만 총 1596종이다.》 

결론부분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한 대부분의 답은 아마도 자연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역사에서 이 이상의 진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지 않거나 명백하게 확증될 수 없는 수많은 모든 교설들을 의심한다. 나는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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