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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페란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6)(7)

by 책이랑 2020. 4. 19.



(1) 다 두고 왔지만,  캄피 플레그레이에서 릴라는 더 행복했다.

릴라는 신시가지에 새로 지은 집에서 누리던 안락함을 잃어버렸어도 아쉬움이 없었다.

 오히려 선한 마법사의 마법 덕분에 고통받던 곳에서 사라져 행복이 약속된 새로운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p.498)
그 때 릴라는 또 한 번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는 행위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았다. 과거의 릴라와는 안녕이었다. 익숙한 큰길도, 구두도, 식료품점도, 남편도, 솔라라 형제도, 마르티리 광장과도 이제 끝이었다. 나와의 관계도, 신부이자 부인이라는 사회적 신분도 흩어져 사라졌다. 기존의 릴라에서 오직 니노의 연인이라는 모습만 남겨두었다. 니노는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2) "리나....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다가 나까지 망가뜨리지는 말아줘."

"리나, 내 말 똑똑히 들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돌아가서 구두를 팔든 햄을 팔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부탁이니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다가 나까지 망가뜨리지는 말아줘."

그날은 동거가 시작된 지 정확히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신들은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서로를 탐할 수 있도록 23일동안 이들을 구름 속에 숨겨주었다. 릴라는 니노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고 말했다.

"꺼져버려."

<캄피 플레그레이는 구름이 뭉게 뭉게 피어나는 화산지대>
※ 
그리스 로마 신화에 제우스- 이오의 신화
이오는 헤라를 섬기는 사제이자 당시 아르고스의 왕이었던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이었는데, 어느 날 제우스가 이오를 보고 눈독을 들이게 된다. 제우스는 헤라의 눈을 피하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과 이오를 감싸고(혹은 구름 그 자체로 변신해서) 애정 행각을 벌인다. 제우스를 찾던 헤라는 구름을 이상하게 여기고 현장에 나타난다.(다급해진 제우스는 이오를 암소로 변신시켜버렸다. 눈치 100단 헤라가 암소를 달라고 하자 제우스는 마지못해 넘겨주고, 헤라는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에게 이오의 감시를 맡겨 어디 도망 못 가게 감시시킨다. 아버지 이나코스와 가족들이 이오를 찾으러 오자 소가 된 이오는 발굽으로 자신의 이름을 써서 자신을 알렸지만, 이오의 가족들은 그걸 본 아르고스에게 쳐맞고 쫓겨난다.)..


(3) 사라진 릴라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반응

안토니오- 니노를 패준다.
파스콸레- 나는 나서고 싶지 않아.
엔초- "어디, 주소 좀 줘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리나와 이야기해 볼게."


(4)  ① 솔라라 형제, 파스콸레,
          안토니오, 도나토 사라토레
  vs. ② 알폰소, 엔초, 니노 

카르멘의 말: 
(엔초는) 군대에서 돌아온 이래로 그녀에게 딱 네 번 입을 맞췄을 뿐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화를 내며 덧붙였다.

"사내도 아닌 것 같아."

 우리들은 남자가 여자를 잘 돌보지 않으면 종종 사내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엔초는 사내일까? 아닐까? 나는 남성의 어두운 일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랬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이 혼란스러운 행동을 하면 무조건 사내가 아니라고 표현하곤 했다.

솔라라 형제, 파스콸레, 안토니오, 도나토 사라토레 같은 사내들은 스타일은 서로 달랐지만 여자를 원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었다. 공격적인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종속적인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털털한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고 섬세한 여성을 좋아할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여성을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노르말레 대학교 시절 내 애인이었던 프랑코도 이들 부류에 속했다.

하지만 알폰소, 엔초, 니노 같은 사내들은 달랐다. 이들 역시 여성취향이 서로 다르기는 했지만 여성을 대할 때 항상 어느 정도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벽이 있는데 그 벽을 뛰어넘는 일은 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엔초는 군 복무 후에 이런 성향이 더 강해졌다. 여성의 마음을 사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상 그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원래 작았던 키가 더 작아진 것 같았다. 마치 자기 자신을 압축시켜서 몸 전체가 에너지로 꽉 찬 하나의 덩어리가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살이라고는 붙어 있지 않은 얼굴 피부는 한껏져놓은 파라솔처럼 팽팽했고 걸어갈 때는 다리를 제외한 신체의 그 어떤 부분도 옴직이지 않았다.....





(5) 부와 사랑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동시에 도시의 모든 소음이란 소음이 다 들리는 얇디얇은 변면으로 둘러싸인 헐벗은 공간이, 아파트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기야 고약한 냄새와 계단 입구에서 들어오는 바퀴벌레, 습기 때문에 생긴 생긴 천장의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릴라는 유년 시절로 다시 돌아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많던 유년 시절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던, 잔혹한 상실감과 온갖 위협과 폭력으로 점철된 유년 시절이 생각났다.

릴라는 불현듯 어린 시절 우리에게 희망이자 위안이었던 부자가 되겠다는 꿈이 머리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캄피 플레그레이의 빈곤은 어린 시절 놀이의 터전이었던 우리 동네의 빈곤보다 더 암울했다. 곧 태어날 아이 때문에 상황이 악화된 데다 가지고 온 돈을 얼마 되지 않은 동안에 모두 써버렸는데도 릴라에게 있어 부는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상이나 보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유년 시절 꿈꿔왔던 금화와 보석이 넘쳐나는 꿈고에 대한 환상은 사춘기 시절 식료품점 계산대 서랍과 마르티리 광장 구둣가게에 채색된 금속 상자에 쌓인 고약한 냄새가 나는 꼬깃꼬깃한 지폐 뭉치로 실현되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돈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돈과 소유욕의 관계는 그녀를 실망시켰다. 자신을 위해서도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도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릴라에게 부유해지는 것이란 니노를 가지는 것이었다. 니노가 떠나버린 지금 릴라는 가난해졌다. 돈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빈곤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서 질렀던 수많은 실수가 쌓이고 쌓여 마지막 실수로 결말을 맺었다.

자기가 사라토레 집안의 장남 없이 살 수 없듯이 그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버리고 만 것이었다. 자신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운를 타고났으며 평생 서로 사랑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사랑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처하게 된 상황을 나아지게 할 방도가 없었기에 릴라는 죄책감에 빠져 집 밖으로 나가지도, 니노를 치지도 않았다. 먹지도 않았고, 마시지도 않았다. 자신과 아이의 삶이 의미를 잃고 허물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릴라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버림받았다는 사실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기에 화도 나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릴라는 니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지만 거기엔 엔초가 서 있었다. 그래도 실망스럽지 않았다. 엔초가 어린 시절 교장 선생님과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시킨 경합에서 패배한 후 분을 못 이겨 자기에게 돌팔매질을 한 다음에 과일을 가져다 주었던 것처럼 지금도 과일을 가져다주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엔초는 그 웃음을 릴라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이웃 사람들이 릴라를 사내를 받는 창녀라고 오해할까봐 집안에 들어와서도 예의상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릴라의 흐트러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표시가 잘 나지않아 임신을 한 것까지는 몰랐지만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엔초는 특유의 진지한 태도로 아직도 진정하지못하고 웃고 있는 릴라를 향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만 가자."
"어디로?"
"네 남편에게 가야지."
"스테파노가 보내서 온 거야?"
"아니야."



(6) 스테파노의 현실부정 2

스테파노는 너무나 기뻐했다. 릴라가 "당신 아이는 아니야" 라고 덧붙였는데도 한없이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가 화를 내며 같이 무장을 두세 번 반복하면서 남편을 주먹으로 때리려 하자 스테파노는 릴라를 달래면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이제 그만해, 리나. 그만, 그만, 나 정말 너무 행복해. 지금까지 당 신을 제대로 보살펴주지 않은 거 알아. 하지만 이제 그만하자. 내게 더는 아픈 말을 하지 말아줘."

스테파노의 두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차올랐다.

릴라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진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기쁨에 겨워 자기 자신을 철저히 속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이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스테파노도 아이도 상관없었다. 릴라는 아무런 감정 없이 "당신 아이가 아니야" 라고 몇 번 되뇌다가 임신기의 무기력함에 몸을 내맡겼다. 스테파노가 우선은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관없어. 원하는 대로 하라지. 어차피 지금 고통받지 않더라도 나중에 가서는 괴로울 테니.''
(p.516)


(7) 임신기간동안 두문불출한 릴라

릴라가 반갑게 맞는 사람은 눈치아 아주머니와 시어머니 마리아그 뿐이었다. 어머니들은 릴라가 임신한 동안 그녀를 세심히 돌보아 주었다. 릴라는 구역질은 멈췄지만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겉모습보다 몸 속이 뚱뚱해지고 부어오른 느낌이었다. 몸 안의 모든기관에 살이 붙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이의 숨결에 배가 고기로 만드 풍선처럼 점점 부풀어올랐다. 배가 한없이 불러오자 릴라는 평소에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었다. 자기 몸이 계속 커지다 터져버려서 몸 속 내용물이 밖으로 흘러나와 버릴까봐 두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뱃속의 존재를, 그 부조리한 형태의 생명을, 날이 갈수록 커져가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에서 꼭두각시 인형처럼 나오게 될 그 조그만 결정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릴라는 아이 생각에 정신을 추슬렀다. 임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려고 임신과 임신 기간에 뱃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출산 준비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릴라는 몇 달 동안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옷이며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것도 그만두었다. 대신 어머니와 알폰소에게 신문과 잡지를 두어 종류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 외에는 특별히 돈을 쓰지도 않았다.



(8)  릴라는 꿈에서 품안에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를 입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간에 나는 자주 릴라 꿈을 꿨다. 한 번은 릴라가 레이스가 키렁치렁한 녹색 잠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꿈을 꿨다. 현실에서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품 안에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슬픈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말했다.

"사진을 좀 찍어줘. 하지만 아이 모습은 나오지 않게 해줘. 나만 나오게 해줘."

또 한 번은 내게 반갑게 인사하며 나와 이름이 같은 딸을 불렀다.

"레누! 어서 와서 이모에게 인사드리렴."

그러자 우리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뚱뚱한 거인이 나타났다. 릴라는 내게 아이의 옷을 벗기고 몸을 씻긴 다음 기저귀를 갈고 포대기를 둘러달라고 했다.

잠에서 깬 후 알폰소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잘 태어났는지, 릴라는 행복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공부할 것이 너무 많고 시험 준비를 해야 했기에 다음 날이면 잊어버리고 말았다.

 8월에 학업과 시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그 해에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고는 프랑고,

와 함께 베르실리아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냈다. 그곳에서나는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었다. 한주먹에 다 들어갈 정도로 어디수영복을 입자 내 자신이 대담하게 느껴졌다.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카르멘에게서 릴라가 극심한 산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카르멘이 말했다.


(9)  섬세한 남자 엔초.

 "어쨌든 리나는 온 동네 통틀어서 최고의 엄마야."

 그 어쨌든' 이란 표현에 나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때까지 엔초가 특별히 섬세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리그가 내 옆에서 걸으면서 말은 안 했지만 내가 내심 릴라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엔초는 내가 릴라에게 화난 이유와그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내 행동에서 읽어내린것 같았다.



(10) 율리시스 vs. 오디세이

"무슨 책이니?"

릴라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외모며 목소리는 많이 변했지만 눈빛과 퉁명스러운 말투는 교실에서 질문을 던지던 때 그대로였다. 그래서 릴라도 과거의 태도로 되돌아가 선생님에게 무뚝뚝하고 공격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율리시스 예요."

"오디세이에 대한 책이냐?"

"아니요. 현세가 얼마나 비참한지에 대해 쓴 책이에요."

"그리고 또 어떤 이야기를 하지?"

"그뿐이에요. 우리 머릿속에는 쓸데없는 생각만 가득하다고 해요.

인간은 살과 피와 뼈로 구성된 존재일 뿐이라고, 다 똑같은 거라고,

그저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요."

마지막 말에 선생님은 학교에서처럼 릴라를 야단쳤고 릴라는 뻔뻔스럽게 웃음을 터뜨려 늙은 선생님의 심기를 언짢게 했다. 올리비에로 선생님은 릴라에게 책이 어떠냐고 물었다. 릴라는 너무 어려워서 다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읽는 거니?"

"제가 알던 사람도 읽었거든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너는?"

"저는 마음에 들어요."

"어려워도 말이니?"

"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읽지 말아라. 상처만 줄 뿐이야."

"상처받을 만한 일이 어디 이것뿐인가요?"

"행복하지 않니?"

"그냥 그래요."

"넌 더 크게 될 아이였는데."

"이미 그렇게 된걸요.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잖아요."

"그거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저도 그 아무나 가운데 한 사람이에요."

"아니야."
"아니에요. 선생님이 틀렸어요. 선생님은 언제나 틀렸다구요."
" 어릴 때도 버르장머리가 없었는데 지금도 여전하구나."
"선생님이 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죠."
....

※ 율리시스

율리시스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이름이다. 아일랜드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대표작. 18장의 챕터 모두가 오디세우스 신화에 나오는 모험에 모두 대입되며, 이런 난해한 상징과 의미들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을 따라 마구 흘러나온다. 음향과 분노에서 이런 테크닉이 '읽기 좀 난해하다' 싶은 정도로 나온다면 이 책에서는 충격과 공포급이다.

작품 구조는 오디세이아를 바탕으로 몇 겹에 걸쳐 은유와 비유로 오디세이아를 따라간다.[2] 그렇기 때문에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인물들이 패러디되거나[3] 모티브를 따 왔기 때문에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매우 잘 이해한다면 재밌을지도 모른다. 사실 기본구조는 오디세이아에서 뽑아 왔지만, 등장하는 상징물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 웬만한 율리시스 책은 방대한 서평이 실려 있거나 아예 학생용으로 뒤에 엄청난 양의 해설이 담겨 있는 것도 많다



(11) 아이가 생기면 결혼생활을 청산하기가 힘들다.

릴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피누차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도 않았다. 상관없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귀찮은 파리를 쫒아내는 듯 무심한 몸짓이었다. 조카를 돌보지 못해 아쉬워하면서도 리누초를 데리고 나와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집에 혼자 남게 되자 릴라는 두려웠다. 스테파노가도을 주고 창녀를 사는 것은 상관없었다. 저녁에 자신이 일을 치르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기뻤다. 하지만 피누차의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아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정말 여자가 있고 매일매 순간 그 여자를 원하게 된다면 이성을 잃고 자신을 쫓아낼 수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릴라는 스테파노와 결혼 생활을 청산하는 일을 일종의 해방처럼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집과 자동차, 여유로운 시간,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릴라는 밤에도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근래에 스테파노가 분노한 것은 타고난 성격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온화한 표정의 가면을 벗겨내는 타고난 나쁜 피 때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니노에게 반했던 것처럼 정말로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 감옥 같은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 화를 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책임과 가게 일과 사업조차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된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릴라는 이 문제에 맞서 어떻게 해서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심 스테파노가 자기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정부와 즐기는 정도에서 그치기를 바라면서 문제해결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 2년 정도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아이가 자라고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후일 테니까.

그때부터 릴라는 집을 잘 정맞춰 요리를 하고 저녁식릴라는 집을 잘 정돈하고 스테파노가 돌아오는 시간에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리노와 그 소동을 벌인 다음투버 스테파노는 과거의 온화한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언제나 불만과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


(12) 릴라가 미켈레에게 하는 말: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싫어."

 "말 끝났어?"

"그래."

"그럼 질리올라는?"

"질리올라가 무슨 상관인데? 좋은지 싫은지만 말해줘. 나머지 일은 그다음이야."

"싫어, 미켈레, 내 대답은 싫다는 거야. 당신 형도 원치 않았고 당신도 원치 않아. 우선 당신네들 둘 다 끌리지 않아.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전혀 없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에 싫어." p. 544



(13) 자신의 외도를 들킨 후에 릴라를 더 단속하는 스테파노

.... 결혼한 후로 스테파노가 그때 처럼 남편 노릇을 하면서 릴라를 감시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외도한 것 때문에 릴라의 외도도 정당화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레티필로에서 아다와 밀회를 즐길 때 하는 짓거리는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스테파노는 릴라가 그보다 더한 짓을 그녀의 정부들과 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했다. 자기는대놓고 바람을 피우면서 릴라의 부정 때문에 웃음거리가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렇디고 모든 사내를 질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순서가 있었다. 스테파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미켈레였다. 스테파노는미켈레가 매사에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데다 그화의 종속관계가 평생 유지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릴라는 미켈레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 했던 것도 자신을 정부로 삼으려 했던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스테파노는 미켈레의 성질을 돋우기 위해 릴라와 만나지 못하게 하면 그들의 사업 관계도 파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업적인 차원에서라도 릴라가 조금이라도 정중하게 미켈레를 대해주기를 바랐다. 결과적으로 릴라가 어떻게 행동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끔은 "미켈레랑 만나서 이야기했어? 당신한테 또 구두 디자인을 해달래?"라고 집요하게 물으면서릴라를 압박했고 기콤은 "저 빌어먹을 자식한테 인사도 하지 마 말았이?" 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고는 릴라가 타고난 창녀라는 사실에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 서랍 속을 뒤졌다.

옆친 데 덮친 격으로 파스팔레와 리노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14) 스테파노와 애인 아다의 부정을 알아차린 파스콸레

그들의 모습에 파스콸레는 엄청난 상처를 받았다. 마음 같아서는당장에라도 둘의 숨통을 끊어 놓아도 모자를 지경이었지만 공산당원 교육을 충실히 받았기에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즈음 파스콸레는 동네 공산당 서기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함께 자란 다른 사내아이들처럼 마음 내키면 얼 마든지 여자아이들을 창녀라고 욕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 다. 시사 문제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고, 『통일전선지를 읽 고, 공산당 전단지를 꼼꼼히 읽을 뿐 아니라 관할 구역 토론회 사회 까지 보게 된 후부터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제 파스콸레는 여성을 최소한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려하지는 않았다. 여성의 감정과 이상과 자유를 인정하려 했다. 파스 팔레는 분노와 관대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다음 날 저녁 작업이 끝나자마자 지저분한 상태 그대로 아다에게 가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다.



(15) 레누는 아다의 부탁으로 릴라에게 들렀다.- 릴라의 몸은 변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기쁨이 불편한 감정으로 변했다. 나는 마지못해 릴라의 집으로 향했다. 릴라가 단숨에 우리 둘의 관계에 있어 예전과 같은 우위를 되찾아 내 선택에 대한 확신을 잃게 할까봐두려웠다. 어린 리누초에게서 니노의 흔적을 발견해서 릴라가 내 소중한 인형을 앗아가 버렸던 기억이 되살아날까봐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릴라가 리누초라고 부르는 그녀의아들은 갈색머리의 잘생긴 아이로 아직 니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릴라를 닮고 어떤 면에서는 스테파노도 닮아서 마치 니노와 릴라와 스테파노 세 사람의 공동 작품 같았다.

릴라는 그녀답지 않게 연약해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꼭껴안아주어야 했다.

릴라가 내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급히 머리를 손질했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입술에 립스틱도 급히 찍어 바르고 약혼 시절에입었던 레이온 소재의 비둘기색 드레스를 입고 굽 높은 구두도 신고있었다.

릴라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얼굴뼈가 더 커진 느낌이었다. 눈은더 작아지고 피부 아래엔 피가 아니라 불투명한 액체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삐쩍 말라서 껴안을 때 뼈가 느껴질 정도였지만 딱 달라붙는 옷 때문에 볼록 나온 배만 강조되어 보였다.


(15) 동네 모든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을 들인다면 다음 세대는 모든 것이 바뀔거야.
 릴라는 동네 모든 아이에게 열심히 공을 들인다면 다음 세대는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뛰어난 아이, 멍청한 아이, 착한 아이와 못된 아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16) 스테파노가 내 글을 읽는 것을 원치 않아.
이 상자를 가져가.

릴라는 리누초를 바라보다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내 책을 망가뜨려버렸어."

릴라는 책을 망가뜨린 것이 리누초라도 되는 양 눈물을 흘리며 말하면서 내게 두 동강난 책을 내밀었다. 나는 가까스로 범인은 리누초가 아니라 스테파노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이가 내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어."

릴라가 중얼거렸다.

"스테파노는 내가 생각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아. 아무리 하잘것없는 것이라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면 내게 손찌검을 릴라는 의자에 올라가 침실 옷장 위에서 금속 상자를 하나 가지고내려오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 상자 속에는 니노와 일어난 모든 일이 들어 있어, 머릿속에 떠 오른 많은 생각과 네겐 이야기하지 않은 우리 이야기가 있어. 가져가 줘. 스테파노가 찾아서 읽을까봐 두려워. 그가 내 글을 읽는 것을 원치 않아. 이 글은 그의 것이 아니야. 누구의 것도 아니야. 심지어는 네 것도 아니야."



(17) 이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사는 건 힘들었다.

 불현듯 '거의' 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해낸 건가. 거이 그렇다. 나폴리에 있는 고향 동네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난 건가 거의 그렇다. 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갈리아니 선생님이나 그녀의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시험에시험을 거치면서 권위 있는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거의'라는 단어 뒤에 실상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피사로 온 첫날부터 나는 두려웠다. 나는 '거의'라는 수식어를붙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노르말레 대학에 그런 학생은 많았다. 라틴어, 그리스어, 역사 시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뛰어난교수님들과 지난날 학교를 거쳐간 다른 모든 중요 인사들처럼 대부분 남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앞서나갈 수 있는 것은 힘겨운 학업의 있음- 현재와 미래의 목적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안이 좋거나 타고난 재능 덕분이었다. 이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만드는 방법도알고 있었고 출판사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이미 잘 알고있었다.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국이 무엇인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대학 서열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는 작은 마을이나 도시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프스 산맥이나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중요 인사들의 이름과 존경할 만한 사람은 누구고 경멸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게는 신문이나 책에 이름이 실린 사람은 모두 신처럼 보였다. 누군가 내게 부러워 하는 목소리나 적의를 가진 태도로 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지, 저 사람이 바로 그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든지, 저 사람이 또 다른대단한 사람의 조카라고 하면 나는 입을 다물거나 그냥 아는 척했다. 물론 이들이 언급하는 이름이 '정말로 중요한 가문의 성이라는것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 그런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런 인물들이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을 했는지도 몰랐으며 명망 있는사람들 간의 관계도 알지 못했다. 예컨대 아무리 시험준비를 열심히해도 어떤 교수님이 내게 갑자기 "내가 어떤 계보를 통해서 이 대학에서 이 과목을 가르치게 됐는지 학생은 알고 있나?" 라고 묻는다면나는 십중팔구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그배경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들 사이에서 실수하거나틀린 이야기를 할까봐 두려워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프랑코가 내게 반했을 때 그 두려움은 많이 누그러들었다. 그는 나를 이끌어주었다. 나는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프랑코는 명랑하고 배려심이 깊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뻔뻔할 정도로 두려움이 없었다. 자신이 읽은 책은 다 옳고, 자기 생각도 옳다는확신이 있기에 언제나 권위 있게 이야기했다.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나 가끔은 공적인 자리에서도 프랑코의 명성에 기대어 말하는 법을 배웠다. 솔직히 나도 말은 꽤 잘했다. 적어도 실력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의 강함에 기대어 가끔은 그보다 더대담한 태도를 취해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게 능력이 없을까봐, 말실수를 할까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아는 사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경험이 없는지 드러날까봐 불안했다.

프랑코가 원치 않게 내 인생에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두려움이 다시 몰려왔다.  마음속 깊은 곳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동안 프랑코의 부유함과 높은 교육 수준, 학생들에서 꽤나 명망 높은 좌파 청년이라는 그의 지위와 사교성, 권리자들에게 대항한다는 내용을 대학교 안팎에서 균형 있게 연설하느 그의 용기와 아우라가 그의 애인이며 여자친구이며 동료였던 나에게까지 자동적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내 능력의 공식적인 인증서였던 셈이었다.

그랬던 그가 대학교에서 쫓겨나 그의 명성이 사라지자 나도 그 후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생들은 이제 일요일마다 나를 그들의 파티나 소풍에 초대하지 않았다. 몇몇은 다시 내나폴리 억양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프랑코가 내게 선물했던 모든 것은 이제 유행이 지난 한물간 물건이 되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 삶에 들어온 프랑코의 존재가 내 현실을 잠시 가려 주었을 뿐 전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이들과 완전히 동화된 것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내고 어느 정도의 호감과 존중을받기는 했지만 당당한 태도로 터득한 지식에 대한 최고의 결과를 보여주는 학생 축에는 속하지 못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18)  프랑코가 사라지자, 여학생들은 심술궂게 굴었고 남학생들은 추근댔다.

그 시기가 암울했던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프랑코의 방에서 밤을 보낸다는 소문은 이미 카발리에리 광장에 꽉 퍼져 있었다. 둘이서 파리와 베르실리아에 다녀온 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헤픈 여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프랑코가 사람들에게 열렬히주장하던 성적 자유 이론에 나 스스로도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었는지 설명하기는 복잡했다. 그에게 자유롭고 의식이 깨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그런 내 감정을 숨겼었다는 사실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공공연하게 프랑코가 내게 복음처럼 전파한, 반쪽짜리 처녀는 최악이라는 이론을 떠들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반쪽짜리 처녀란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이지 애매하게 엉덩이만 내어주는 부르주아 계집들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내겐 16세에 결혼을 하고 18세에 바람을 피워서 애인의 아이를 임신한 채 다시남편에게 돌아간 데다 이외에도 수많은 일을 저지른 친구가 있다는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프랑코와 잠자리를 가진 것은 릴라가 벌인 격동의 연애사에 비하면 별일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나를 향한 여학생들의 심술궂은 일격과 남학생들의 잔혹한평가와 내 풍만한 가슴을 쫓는 그들의 끈질긴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내 전 남자친구를 대신하려는 남학생들의 노골적인 구애를 그에못지않게 노골적으로 거부해야 했다. 내게 거부당한 후 그들이 쏟아내는 천박한 말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나는 이를 꽉 물고 묵묵히 참으면서 생각했다.

.... 


(19) 책을 타고 온 프린스, 피에트로

그는 사과와 작별인사 비슷한 것을 뒤섞은 듯한 몇 마디를 중어기 리더니 자리를 떠났다.

다음 날 그를 먼저 찾은 것은 나였다. 강의 시간에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함께 오랫동안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면에서 나를 놀라게 했다. 우선 그도 나처럼 이미 논문 준비를 시작했고 라틴문학을 주제로 삼았다고 했다. 그는 나와는 달리 '논문'이라고 부르지 않고 '작업'이라고 불렀다. 한두 번 '책'이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흘러나왔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을 대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출판할 계획이라고 했다. 작업이라고? 책을 출판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제 겨우 22세인데도 말투에 무게감이 느껴졌고 어려운문헌을 계속 인용했다. 벌써 노르말레 대학이나 아니면 다른 대학에자리를 맡아놓은 것처럼 말했다.

"정말로 논문을 출판할 생각이야?"

내가 믿기 어렵다는 투로 물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결과가 좋으면 그래야지."

"잘 쓴 논문은 다 출판하는 거야?"

"그렇게 하지 말란 법은 없잖아."

피에트로는 바쿠스의 의식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는 「아이네이스』 제4권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바쿠스가 디도보다 더 흥미로운 주제일지도 몰라."

"잘 풀어내기만 하면 흥미롭지 않은 주제는 없어."

우리는 일상적인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 미국이 서유럽에핵무기를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프랑코와 그랬던 것처럼 펠리니와 안토니오 중 누가 더 뛰어난지에 대해서도 논하는 법이 없었다.  피에트로와는 오직 고전 라틴 문학과 그리스 문학에 대한이야기만 나눴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관계가 없을 것 같은 텍스트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서 눈앞에 책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내용을추출 읊었다. 젠체하거나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면학도로서 당연한 일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와 시간을 함께 보낼수록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처럼 될 수 없을 것이었다. 내가 틀릴까봐 조심스러워하는 부분에서 그는 사려 깊게 생각한 다음 결코 가볍지 않은 의견을 너무나 수월하게 제시했다. 그와 함께 두세 번 이탈리아 가나대성당과 캄포산토 부근으로 외출하고 오니 주변 사람들이 나를 다르게 대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안면이 있는 여학생이 내게 친한 척하면서 은근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대체 너는 남자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니? 이번에는 이아로타 가문의 아들 마음을 사로잡았더라."

나는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분명한 것은 같은 학년 친구들이 내게 다시 존경심을 표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파티를 열거나 술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나를 초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나를 찾는 이유가 피에트로를 데리고 오기를 바라기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가끔 들기까지 했다. 그만큼 피에트로는 워낙 자기일에만 몰두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새 남자친구의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았다. 그 결과 나는 피에트로의 아버지가 제노바에서 그리스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사회당의 중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 박학다식한  아이로타 집안

…… 정부에 우리 같은 사회당원들이 없었다면 너희 학생들는  학에서 성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감옥에 끌려갔을 거다. 평화를 주장하는 내용의 전단지나 뿌리고 다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고 "

"북대서양조약기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겠어요."

"우리 입장은 언제나 반전주의였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민주당과 협력하면서 반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식의 문장들이 빠르게 오갔다. 둘 다 이런 토론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익혀온 습관 같았다. 두 부녀를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평생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 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마리아로사는 친절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철제된 어조로 말을 했다. 갈리아니 선생님의 아들 아르만도나 니노처럼 표현을 과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다른 때에는 내게 멀고 차갑게 느껴졌던, 그저 창피당하지 않기 위해서 알아두는 정도였던 청치적인 문제에 대해 정말로 관심이 생겼다. 서로의 말에 빠르게 등답하면서 전혀 상관없게 느껴지는 주제를 넘나들며 북베트남 폭격과 몇몇 대학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 반제국주의 투쟁의 온상인 남미와 아프리카에 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부분에서는 딸이 아버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아 로사는 정말 박학다식 했다.


(21) 그 토론에 끼어들었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한 짓을 생각하면 이들도 한 죄악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아이오타 집안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했다. 마리아로사가 훌륭하다고 외치면서 악수를 청했고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는 용기를 얻어 말을 쏟아냈다. 지난날 각기 다른 시기에 익혀두었던 문장의 조각들을 사용했다. 나는 계획경제와 합리주의, 기독교사회 민주주의의 파멸과 신자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구조란 무엇이고, 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논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치원과 아동심리학자인 장 피아제, 경찰과 사법부의 공존, 모든국가 조직에 기생하는 부패한 파시스트들에 대해서 열변을 쏟았다. 두서없이 숨 가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가슴이 세게 뛰었다. 어디에서 누구와 있는지 잊고 있었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이 내 의견에 점점 동조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꽤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그처럼 수준 있는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어디 출신이고 아버지와 어머니가무슨 일을 하시는지 묻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 순간 나는 나일뿐이었다.

오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식사 전까지 모두 산책을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아이로타 교수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부인과 함께 지나가던 두 교수도 아이로타 교수를 보고 열정적으로 인사했다.


(20)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전화를 하지 않았다. 릴라에게 전화하는 것이 무슨 소 용이란 말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녀에 게 일어난 일이나 들으려고? 내게 말할 틈을 준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실 피에트로에게 일어날 일이 내게는 절대로 일어나지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도 프랑코처럼 내 인생에서 곧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 그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는 것도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가 이 좁고 어두운 길과 푸른 들판을 그와 함께 걷는 것은 그저 두려움을 조 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니까.


(21) 어머니가 내 병간호를 하러  피사에 왔다.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한마디 할 때마다 내 친구들이 나보다 성공하지 보기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어머니에게 화가 나 중얼거렸다.

"그만하세요."

어머니는 내 말에 개의치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너는 그 애들과는 달라."

하지만 내가 더 상처받았던 것은 자부심 뒤에 언제라도 상황이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 성적이 나빠져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세상이 안정적인 곳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고, 땀을 닦아주고 수도 없이열을 재게 했다. 어머니는 당신 인생의 트로피 같은 내가 죽기라도할까봐 두려워진 걸까. 내가 기력이 빠져 학교를 포기하고 영광을잃고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봐 두려운 걸까. 어머니는 광적으로 릴라의 이야기에 집착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어머니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릴라를 의식했는지 깨달았다. 내 어머니까지도 릴라가 나보다 뛰어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를 내가앞섰다는 사실에 놀라서 아직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동네에서 가장 운 좋은 어머니 자리를 놓칠까봐 두려워하고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저 전투적인 모습을 보라, 저 허영심 가득한 눈빛을보라.

어머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면서 절뚝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더 저절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대할 때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사나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어떠한가? 아버지는 작고 허약했다. 언제나친절한 태도로 얼마 되지 않는 팁을 받기 위해서 눈치 있게 손을 내밀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모든 장애물을 이겨내고그 장엄한 시청 건물에 입성하지 못할 것이다. 험한 세상을 이겨낸어머니와는 다를 것이다.

어머니가 떠난 다음 주변이 조용해지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열 때문인지 감정이 복받쳤다. 어머니가 절뚝이는 걸음걸이로 홀로 미지의 도시를 걸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기차역으로 가는 길을 묻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버스타는 데 돈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단돈 5리라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역까지 무사히 도착할 것이다. 표를 맞게 사고 기차를 맞게 타 밤새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의자에 앉거나 선 채로나폴리로 돌아갈 것이다. 나폴리에서도 집 정리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먼 길을 걸어서 갈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시도쉬지 않고 크리스마스 만찬을 위해 뱀장어를 자르고, 샐러드와 닭고기 수프, 크리스마스 전통과자 스트루폴리를 준비할 것이다. 여전히화가 난 상태이겠지만 머릿속으로는 한 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위안을 삼고 있을 것이다.

'레누차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아이야, 질리올라나 카르멘이나 아다나 리나보다 더.'



(22)  아다는 엄마처럼 자기도 남자에게 버림받을 까봐 너무 두려웠다.

아다의 얼굴에도 아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아이 마음에 불꽃을 일으킨 것이 사라토레의 부인이 아니라 릴라였조 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깨닫지 못했었지만 과거 상황이현재에도 반복되는 고약한 거울놀이 같았다. 하지만 릴라만은 그 사1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다를 증오하거나 평소처럼 망설이않고 반격에 나서는 대신 씁쓸함과 동정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릴라는 "여기 좀 앉아봐. 캐머마일 차를 끓여줄게"라고 말하면서 아다의 손을 잡으려 했다.

아다는 릴라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특히 자신의 손을 잡는 그 행동을 일종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발끈하며 몸을 뒤로 빼내는가 싶더니 흰자위만 보이는 눈으로 릴라를 소름끼치게 째려보았다. 겨우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아다는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보고 미쳤다는 거야? 내가 우리 엄마처럼 미친년이라고? 내 말 똑똑히 들어, 리나, 이 손 치워. 저리 비키라고, 캐머마일차는 너나 마셔, 나는 엉망인 집을 정리해야겠어." 아다는 입을 꾹 다문 채 빗자루질을 하고, 바닥을 닦고, 침대를 다시 정리했다. 릴라는 그러는 아다의 모습을 두 눈으로 쫓았다. 아다.

의 몸이 인형처럼 보였다. 너무 빨리 움직이다 망가져 버릴까봐 두려웠다.

릴라는 리누초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아이에게 눈에 보이는사물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름을 말해주고, 동화를 지어 들려주면서 신시가지를 거닐었다. 아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자신의 불안함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아다가 현관을 나서서 약속에 늦은 것처럼 달려 나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난 후에야 릴라는 집으로 돌아갔다.




(23)  
 몇년이 지난 후에야, 마론티 해변에서의 일이 의식위로 떠올랐다.

나는 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 대해서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릴라가 엔초와 그곳으로 떠났다고 했을 때 내게 떠오른 것은 니노의친구인 브루노 아버지가 그 지역에 햄 공장을 갖고 있다는 말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짜증이 났다. 이스키아 섬에서 보낸 여름 을 잊은 지 오래였다. 순간 그해 여름 즐거웠던 기억은 이미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고 유쾌하지 않은 추억만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를 연상시키는 모든 소리며 냄새가 역겹게 느껴졌다.

그때 기억 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들어 두고두고 눈물을 흘린 일은 도나도 사라토레와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상태가 아니었다면 내가 도나토 사라토레와의 행위를 기분 좋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어둠 속 마론티 해변의차가운 모래 위에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인 그 속물과 가진내 첫 경험이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사실에 수치심을 느꼈고 그 수치심은 당시 내가 경험하고 있던 전혀다른 성격의 수치심과 합쳐졌다.

……

 나는 작은 침대 위에 누워 신경이 예민해져 잠 못 이루며 몸을 척였다. 불현듯 내가 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 코와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나 좋았던가. 그때도 내 수줍음은 여전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불편한 상황을 참아냈고, 수치를 당하고 모멸감을 느껴도 이겨내려 애를 썼었다. 가장 기쁜 순간들까지도 면면히 뜯어보면 감정이 희석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

마론티 해변의 암울한 기억이 프랑코와 피에트로의 육체까지 확장되었다. 나는 애써 기억을 떨쳐버렸다.

 언젠가부터 논문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기간 내에 논문을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핑계로 나는 피에트로와 만나는 횟수를 줄여나갔다.

 어느 날 아침 나는 네모난 줄이 있는 공책을 한 권 구입해서 바라 노 해변에서 내게 일어난 일을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점으로 이스키아 섬에서 일어난 일과 나폴리와 동네 이야기도 조금씩 써내려갔다. 그러고는 등장인물의 이름과 장소와 상황을바꿨다.

나는 주인공의 삶 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힘을 상상했다. 그존재는 주변 세상을 산소 용접기의 불꽃으로 납땜할 수 있는 능력이있었다. 보랏빛에 가까운 짙푸른 반구형 지붕 아래서 불꽃이 일면서 모든 일이 주인공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산산각 나서 보잘것없는 잿빛 조각으로 부서져버렸다.

이야기를 쓰는 데 20일이 걸렸다. 그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시합 때만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몇 페이지를 다시 읽어보니마으에 들지 않아 나는 글을 그만 쓰기로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수치심이 내게서 공책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서둘러 논문을 마무리 짓고 피에트로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24)  결혼 계획을 잡아온 피에트로- 그런데 어딘가 안토니오와 닮았다.

피에트로는 진지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에게는 이미 확실한 계획이 있었고 내게 그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2년 안에 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1969년 9월로 날짜까지 정해두었다.

 그는 내가 준 공책을 식탁에 두고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나는 장난조로 그에게 말했다.

"내가 준 선물은?"

그는 당황하며 공책을 가지러 달려갔다.

 우리는 오랫동안 산책을 했다. 입을 맞추고 포옹하면서 아르노 강가를 걸었다. 나는 진담 반 농담 반 조로 내 방에 몰래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내게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안토니오와 피에트로 사이에는 도서관 하나가 통째로 있었지만 둘은 정말 닮아 있었다.



(25)  소설이 출판되었지만 어머니, 가족, 동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과 항상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걸로 보아서 어머니는 이미 선입견에 사로잡혀 내 말이 아예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결혼을 허락받으러 집에 찾아오지도않는 데다 교직에 있기는 하지만 돈은 제대로 벌지 못하며 책은 출판했으나 유명하지 않은 사람과 사귀고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내게 대놓고 난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자신의 불만을 어떻게 해서든 참아보려했다. 못마땅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였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내가 쓰는 언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더욱 이 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너무 복잡 한 언어를 사용했다. 나는 억지로 사투리를 써보려고 했고 내 말이 너무 복잡하다 싶으면 문장을 최대한 단순화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게 만들려다보니 문장이 부자연스러워지고 의미가모호해졌다.

 피사 사람들에게는 내 나폴리 억양을 말투에서 지우려 했던 노력이 통하지 않았는데 정작 우리 가족과 동네 사람들에게는 통했다.

길에서나 상점, 우리 집 건물 층계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나를 는경심과 비웃음이 섞인 태도로 대하며 등 뒤에서 나를 피사 사람이다.



(26) 피누차도 우리의 엄마들처럼 몸이 변해가고 있었다.

 피누차도 찾아갔는데 거의 못 알아볼 뻔 했다. 그녀는 옷차림이 헝클어진 데다 신경질적이고 삐쩍 말라 있었다. 인생을 다 포기한 듯했다. 스테파노에게 복수하려는 리노의 주먹질 때문에 온몸에 멍이들어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행의 흔적이 눈가와 입가에깊게 파인 주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27) 지적으로는 깊은 교류를 하지만 에로스는 없는 릴라와 엔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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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해줘."

릴라는 부부침대를 보고 이야기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다정하게 엔초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존경해, 엔초. 어린 시절부터 그랬어. 혼자 공부해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따냈지. 대단한 끈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잘알아. 나는 그런 끈기가 없었어. 그 점에서 나는 정말 너를 높이 평가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관대한 사람이기도 해, 그 누구도 너처럼 나와 리누초를 위해 나서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

고 너와 잠자리를 함께할 수는 없어. 우리가 단둘이 만난 것이 겨우두세 번에 지나지 않아서가 아니야. 네가 끌리지 않아서도 아니고,

내겐 그런 욕구가 사라져버렸어. 나는 여기 있는 이 벽이나 탁자와별다를 바가 없어. 그러니 내 몸에 손을 대지 않고 같은 지붕 아래 살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 그렇지 않다 해도 너를 이해해. 내일 아침부터 머무를 만한 곳을 찾아볼게. 그래도 나는 네가 나를 위해서 한 일에 평생 감사할 거야."

………

 "간이침대가 하나 더 있던데."

혼자서 잘 수 있어?"

"그럼."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돼."

"정말?"

"그럼."

"불미스런 일로 우리 관계가 망가지는 것은 원치 않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미안해."

"이대로가 좋아. 혹시나 그런 욕구가 돌아오면 내가 네 곁에 있다.

는 걸 기억해줘."



(28) 돈을 쌓아놓고 물쓰듯이 쓰던 시절은 빈곤하던 어린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업다.

 처음엔 릴라도 버텨보려 했지만 조금씩 아이에게 져주기 시작했다. 밤에도 엄마 침대에 오게 해줘야 안정을 찾았기에 결국 아이를데리고 자야 했다. 아이의 영양상태가 좋아 꽤나 무거웠는데도 장을보러 갈 때는 안고 다녀야 했다. 한 손에는 가방을, 한 손에는 아이를안고 다니다보니 돌아올 때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릴라는 가난한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책은커녕 잡지책이나 신문도 살 수 없었다.

 리누초를 위해 챙겨온 물건은 리누초가 눈에 띄게 자라다보니 벌써 작아졌다. 릴라 자신도 입을 옷이 거의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엔초가 매일 힘겹게 일하면서 필요한 생활비를 주었지만 원체 월급이 적은 데다 그마저도 쪼개어 동생들을 돌봐주는 친척에게 보내야 했다.

 그러다보니 집세, 전기세, 가스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그래도 릴라는 걱정하지 않았다. 릴라의 마음속에서 돈을 쌓아놓고 물쓰듯이 쓰던 시절은 빈곤하던 어린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었다. 돈이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실체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보다는 지금까지의 교육이 수포로 돌아갈까봐 걱정하며 리누초를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활기차고, 뭐든지 열심히 잘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되돌리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이제 리누조층계참에서 이웃집 아이와 함께 놀 때만 즐거워보였다. 거기서 리두초는 싸우기도 하고 몸을 더럽히며 웃고, 더러운 것을 주워 먹으며, 즐거워했다.



(29) 중상류층  엄마는 우리 엄마와는 다른 역할을 하더라.

아델레 부인은 상황의 아이러니함을 강조하면서도 다시 내 글을칭찬했다. 아델레 부인은 "아이네이스 같은 위대한 문학작품도 교정을 본 작품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아델레 부인은 내가 당연히 혼자 글쓰는 연습을 해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작품이 있는지 물었다. 난생처음으로 쓴 소설이라고 고백하자 놀라는 눈치였다.

"재능도 있지만 운도 좋군요."

아델레 부인이 소리쳤다. 부인은 출판사 스케줄에 갑자기 공백이생겼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출판사 사람들은 내 소설이 훌륭할 뿐 아니라 운도 좋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출판 시기를봄으로 잡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빨리요?"

"싫은가요?"

나는 다급히 그렇지 않다고 했다.



(30)
릴라가 10살 때 쓴  <푸른 요정>이 레누가 22살에 쓴 작품의 원천이었다.

장 페이지를 넘기니 놀랍다' '좋다' '너무 훌륭하다'는 글씨가 빼곡했다.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심술궂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은 건가요? 왜 릴라에게 그런 칭찬을 해주지 않은 거죠? 왜 릴라 대신 내 교육에만 그리도 열을 올린 건가요? 단지 구두수선공인 아버지가 딸을 중학교에 진학시키지 않겠다고 한 것 때문인가요? 그것이 선생님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선생님에게는 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릴라에게 화풀이를 하신 건가요?'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잉크 자국을 따라, 당시 내 필체와 너무나비슷한 릴라의 필체를 따라서 『푸른 요정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첫 장부터 속이 뒤틀리기 시작했고 온몸에서 진땀이 났다. 다읽고 나서야 실은 처음 몇 줄만 읽고도 바로 느꼈던 사실을 완전히인정했다.

릴라가 어린 시절에 쓴 몇 장 안 되는 짧은 이야기가 바로 내 책의숨겨진 심장이었던 것이다. 내 글의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이어주는보이지 않지만 단단한 그 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내 글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화사하게 색칠한 표지에제목도 서명도 없고 녹슨 핀으로 고정한 어린아이가 쓴 열 장 남짓한 종이 묶음을 읽어야 할 것이었다.



(31) 푸른요정은 릴라와 내가 두 몸을 가진 한사람이거나, 한몸을 가진 두사람이라는 증거

나는 그날 당장 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릴라에게 『푸른 요정』을 돌려주고 내가 쓴 공책도 보여주고 싶었다. 함께 책장을 넘기면서 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쓴 평가를 보며 즐기고 싶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릴라를 내 옆에 앉혀놓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얼마나 잘 통하는지 좀 봐. 우리는 두 몸을 가진 한 사람이기도 하고 한 몸을 가진 두 사람이기도 해."

 나는 노르말레 대학에서 배운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피에트로에 게서 배운 문헌학과 관련된 지식을 바탕으로 릴라가 어린 시절에 쓴 이야기가 어떻게 내 마음속에 깊은 뿌리를 내려 몇 년 후에 다른 책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릴라의 이야기와는 다른 성인의 관점에서 쓴 내 이야기이지만 그녀의 이야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책이다. 어린 시절 뜰에서 함께 놀면서 그녀와 함께 끊임없 이 만들어내고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내던 상상의 산물이었다. 나는릴라를 껴안고, 입을 맞추면서 말하고 싶었다.

"릴라,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 절대로 헤어지지 말자."




(32) 우리 동네보다 더 못사는 동네가 있는 곳이 나폴리

그날 아침 나는 정말이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온 도시가 나와 릴라 사이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한 것 같았다. 나는 가난에 찌든 육체들 사이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꽉 끼인 채 마리나행 만원버스를 탔다. 한참을 가다가 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탄 버스로 갈아타야 했는데 하필이면 버스를 잘못 탔다. 나는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서 엉망이 된 채 버스에서 내렸다. 속으로 분노를 삭이면서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다음 버스를 탔다.

 기껏해야 나폴리를 벗어나지 않는 그 짧은 여행이 나를 완전히 지치게 했다. 오랫동안 받은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은 나폴리에서 도무지 써먹을 데가 없었다. 산 조반니에 도착하기 위해서 나는 과거로도아가야 했다. 릴라가 큰길이나 광장 근처가 아니라 과거의 시간이시냇물처럼 흐르는 곳으로 이사를 한 것 같았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보다 더 먼 과거, 규율도 존중도 없는 암흑의 시대로 되돌아간것 같았다.

 나는 고향 동네에서도 가장 험한 축에 속하는 사투리로 욕을 했고그만큼 욕을 먹었다. 위협을 하기도 했고 조롱을 당하면 되받아쳤다. 사실 나는 이런 못된 태도에 익숙해 있었다.

 피사에서 생활할 때에는 나폴리의 경험이 유용했지만 나폴리에서는 피사의 경험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방해만 될 뿐이었다. 예의 바른 태도와 목소리, 잘 가꾼 외모, 책에서 배운 내용을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모두 나의 나약함의 증표일 뿐이었다. 언뜻 보기에 반항조차 하지 않을 것 같은 쉬운 표적처럼 보이게 했다.

산 조반니를 향하는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나는 필요하다고생각할 때 평소의 온화한 모습을 던져버리는 능력에 새로 획득한 지위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생긴 허영심을 결합시켰다. 나는 만점으로 대학을 졸업한 데다 아이로타 교수님과 식사도 하고 그의 아들과까지 한 사람이다. 우체국에 돈도 조금 있고 밀라노에서는 수준-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런 나를 이 거지 같은 사람들이감히 이렇게 대하다니.



(33) 푸른색 가운을 입고 고기 손질을 하고 있는 나의 푸른요정 릴라

"그럼 관둡시다."

"말씀해주세요."

"기분 나빠하는 거 아니죠?"

"그럴 리가요."

"당신 친구는 한마디로 골칫거리요."

남자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 동안 아무도 나를 붙잡기 않았다. 인부들은 남자건 여자건 주변 일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서로 웃거나,

욕설을 주고받을 때조차도 자신들의 입에서 나오는 웃음소리와 목소리, 작업하고 있는 그 쓰레기 같은 재료며 악취에서조차 고립되어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푸른색 가운을 입고 머리에 모자를 쓴 채 고기 손질을 하고있는 여공 사이에서 릴라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기계가 고철소리를내는 가운데 잘 갈린 부드러운 재료들이 혼합된 반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곳에도 릴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소시지 피에 지방덩어리가 섞인 분홍색 반죽을 넣고 있는 곳에도, 인부들이 날카로운단칼로 껍질을 벗겨내 내장을 제거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몸짓으로위험해보이는 칼날을 휘두르며 고기를 써는 곳에도 없었다.

릴라를 발견한 곳은 고기 저장고였다. 그녀는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냉장고에서 나왔다. 자그마한 사내의 도움을 받아 어깨에 붉은색냉동고기를 짊어지고 있었다. 릴라는 고기를 수레에 넣고는 다시 냉장고로 들어가려 했다. 붕대 감은 릴라의 손이 내 눈에 들어왔다.

"릴라!"

라는 조심스럽게 뒤돌아보고는 나를 확신 없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여기서 대체 뭐하는 거야?"




(34) 레누, 엔초와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어.

나는 렐라에게 리누초가 너무 잘생기고 똑똑하다고 칭찬했다. 나는 릴라의 이웃집 여인을 칭찬하며 엔조의 안부도 물었다. 라는내가 리누초를 좋아하자 기뻐하며 자기도 이웃사존을 칭찬했다. 하지만 릴라가 생기가 돈 것은 엔조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때만은 얼굴이 환해지더니 말이 많아 졌다.

"엔도는 친절해."

릴라가 말했다.

"선량한 데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몰라. 밤이면 언제나 공부를 해 아는 게 정말 많아."

릴라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물었다.

"무슨 공부를 하는데?

"렌초가?

"그래, 컴퓨터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아니 광고를 봤다고 했나??

아무튼 거기에 푹 빠졌어. 컴퓨터라는 것은 영화에서처럼 삐삐거리면서 꺼졌다가 켜지는 번쩍거리는 색전등 같은 것이 아니래. 컴퓨터의 본질은 언어라고 했어."

"언어라고?

릴라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소설을 쓰기 위한 언어가 아니야."

릴라가 '소설'이란 단어를 은근히 무시하는 투로 말하는 것 같아거슬렸다. 뒤이은 웃음소리도 거슬렸다.

"프로그래밍을 위한 언어야. 저녁에 리누초가 잠들고 나면 엔초는 공부를 시작해."
릴라의  아래입술은 주위와 건조함에 갈라졌고 얼굴은 피로에 초췌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엔초가 밤에 공부한다는 말을 할 때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3인칭 단수를 주어로 말했지만 컴퓨터에 푹 빠진 것이 엔초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너는 뭘 해?"

"곁에 있어줘. 엔초는 피곤해서 혼자 있으면 잠이 들거든 둘이 있으면 참을 만해. 한 사람이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이 대답을 하면서, 너순서도라는 게 뭔지 아니?"

 내가 고개를 저어보이자 릴라의 눈이 아주 작아졌다. 릴라는 내팔을 놓더니 나를 자신의 새로운 열정에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모닥불에서 나무 타는 냄새와 동물의 지방과 살점, 신경줄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풍기는 마당에서 코트 위에 푸른 작업복을 껴입은 릴라는 상처투성이에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한 데다 얼굴에 화장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다시 기운을 차리고 생기를 되찾았다. 릴라는 모든 것을 진실과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체계로 단순화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부울대수와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개념들을 언급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릴라의 언어는 나를 매혹시켰다.

…… 

그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둘은 순서도를 구성하는 연습을 한다.

세상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정리해버리고 일상의 모든 행위를 단 두개의 가치, 0과 1로 도식화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허름한 방 안에서리누초를 깨우지 않기 위해 그 무미건조한 언어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35)  내가 릴라를 찾아간 것은 교만심 때문이었을까?

 순간 나는 내가 거기까지 릴라를 찾아간 것이 교만심 때문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물론 좋은 마음에 애정을 가지고 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 긴 여행이 결국 릴라가 잃어버린 것을 나는 얻었다는 것을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라는 내가 자기 앞에 나타난 순간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동료와의 마찰과 벌칙금을 낼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금 나에게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 실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자신의 인생은 나만큼이나 다양하고 무모한 모험으로 가득하며 시간은 그저 별 의미없이 흘러가기 마련이니 가끔 이렇게 만나 한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터무니없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메아리치는 정신 나간 생각을 나누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36)  엔초와는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아.

"엔초와는 잘 지내?"

내가 물었다.

"아이를 낳을 셈이야?"

릴라는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우리는 애인 사이가 아니야."

"아니야?"

 "응,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아."

"엔초는?"

"기다리지."

"오빠같이 느껴지나보다."

"아니야. 남성으로서 이끌려."

"그런데 왜?"

"모르겠어."

우리는 불 옆에 멈춰 섰다. 릴라가 수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식을 조심해. 나갈 때 네 몸을 더듬고 싶어서 네가 모르타델라 햄을 몰래 훔쳤다고 할지도 몰라."

우리는 포옹하고 뺨에 입을 맞췄다. 나는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다시는 릴라를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릴라는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래. 나도 널 잃고 싶지 않아."

릴라도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몹시 흥분한 상태로 공장을 떠났다. 마음속으로는 릴라를 두고 떠나는 것이 괴로웠다. 릴라가 없으면 내게 아무런 중요한 일도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과거의 확신이 되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릴라의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싶었다. 급히 걸음을 옮기다가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릴라에게 인사하려고 뒤돌아보았다. 릴라는 모닥불 옆에 서 있었다. 옷차림 때문에 여자같이 보이지도 않았다. 릴라는 푸른 요정을 들춰보다가 종이 묶음을 불 속에 던져버렸다.



(36) 너의 성은 아이로타가 되겠구나.

그 시절, 나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피사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변화를 겪었다. 봄에 책이 출판된 후 내 책은 학위보다 더 뚜렷한 정체성을 내게 부여해주었다.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과 남동생들에게 출판된 책을 보여주자식구들은 침묵 속에서 책을 돌려보았다. 겉표지만 볼 뿐 아무도 내용을 들춰보지는 않았지만, 식구들은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책 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위조문서를 발견한 경찰들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버지였다.

"내성이로구나."

말투에서 만족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다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기 주머니에서 돈이라도 훔친 것 같은 말투였다.

며칠이 지나 첫 서평이 나왔다. 나는 불안해하며 모든 서평을 읽었다. 약간이라도 비판하는 내용이 있으면 상처를 받았다. 온 가족앞에서 가장 호의적인 서평만 읽었다. 아버지의 기분이 좋아졌다.

엘리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레누차라고 서명하지 그랬어. 엘레나가 뭐야."

흥분된 나날 속에서 어머니가 사진 앨범을 사서 나에 대한 좋은 평을 오려 붙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내게 물었다.

"네 약혼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어머니는 이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 얘기를 꺼낸 것이었다.

"피에트로 아이로타예요."

"그러면 나중에 네 이름은 아이로타가 되겠구나."

"네."

"결혼하고 또 책을 쓰면 책 표지에 아이로타라고 쓸 거니?"

"아니요."

"왜?"

"엘레나 그레코라는 이름이 좋으니까요."

"나도 그렇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말을 그렇게 했지만 어머니는 내 책을 읽지 않았다. 아버지도 페페도 잔니도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동네에서 내 책을 읽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사진기자가 와서 두 시간가량 공원, 큰길, 터널 입구로 나를 끌고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릴라와 레누가 살던 동네 Rione Luzzatti, Naples의 입구가 세 개인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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