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트북에 쓰여 있던 그때의 릴라의 심정
▶ "그녀의 글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릴라는 결혼식 이후 이스키마 섬에 오기 전까지 자신은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당시의 느낌을 세세히 묘사했다. 갑자기 기운이 빠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 뇌와 두개사이에 공기방울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고 했다.
모든 것이 다급히 움직이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고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사물에 몸이 부딪쳐 상처받는 느낌이었다고했다. 배와 눈이 정말로 아팠다고 했다.
릴라는 언제나 감각이 둔한 상태였다고 했다. 온몸이 탈지면에 꽁꽁 쌓여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자신의 육체와자기를 감싼 탈지면 틈새에서 상처가 빚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했다. 곧 죽게 될 거라는 상상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것도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고 했다. 멜리나 처럼 미쳐버리기 전에, 대로변을 가로지르다 트럭에 치여 끌려가기 전에 그런 릴라를 변화시킨 것이 바로 니노였던 것이다.
그는 릴라를 죽음에서 구해냈다. 처음 갈리아니 선생님 댁에서 함께 춤추자고 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때 릴리는 그가 내민 구원의 손길이 두려워 춤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이스키아 섬에서 함께 시간을 니노가 내민 구원의 힘은 강해졌다. 그는 릴라에게 감성을 되돌려 주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부활시켰다. 그랬다. 말 그대로.
▶ 릴라는 여러 장에 걸쳐 부활의 의미를 다루었다. 부활이란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이 기쁜 새로운 구속에 얽매이는 것이다.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자 기존 현실을 뒤집는 봉기이기도 한 것이다. 니노와 릴라 릴라와 니노는 함께 인생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인생에서 독기를 제거하고 오직 사유와 삶의 즐거움만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 아르노강은 이탈리아 문화에서 신화적 장소라고 합니다.(한길사 네이버 블로그)
놀라운 반전은 레누가 릴라의 공책을 이탈리아 문화에서 신화적 장소인 아르노 강에 던져 버린 것이다. 소설가 알렉산드로 만초니는 이 강에서 기념비적인 소설 『약혼자들』을 재구성하며 단테를 비롯한 당대 문호들의 예술을 배우기 위해 “옷을 헹군다.” 그러나 이와 달리 페란테의 세계에서 아르노 강은 릴라의 예술이 죽은 장소다. 강의 전통은 남자들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누는 여자의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알렉산드로 만초니 『약혼자들』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소설. 괴테는 인본주의에 대한 천착과 소박하고 해학적인 문체의 조화로움을 높이 평가했고, 루카치는 만초니가 역사소설 분야의 스승인 월터 스콧을 능가하는 위대한 작가라 극찬했다.
밀라노 폭동, 30년 전쟁,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던 17세기 초의 롬바르디아를 배경으로 악독한 지방 태수와 비겁한 교구 사제들 때문에 쉽사리 결혼을 못하는 두 농사꾼 연인의 투쟁을 그린다.
19세기는 신학이나 보편적 윤리가 지배하던 세계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문명의 발전을 도모한 시기. 르네상스, 계몽주의, 프랑스 혁명 등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주체적인 인간, 즉 민중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때문에 <약혼자들>은 전통적인 이탈리아 문학의 폐쇄성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대 문학의 지평을 열어준 작품이 되었다.
(2) 스테파노의 폭력을 아무도 막지 못한다.
▶눈치아 아주머니도 어쩌지 못하고
눈치아 아주머니는 말 그대로 폭발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눈을 번뜩이며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내는 통에 호흡 곤란이 걱정될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스테파노는 장모의 말이 한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눈치아 아주머니의 말이 아직 끝나지도않았는데 릴라를 침실로 끌어당기며 악을 써댔다.
"지금 당장 대답해!"
릴라가 그에게 험한 욕설을 퍼부으며 어떻게 해서든 버텨보려고 가구에 달린 문을 붙잡자 그는 그녀를 세게 잡아당겼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문이 열리면서 가구가 들썩거리는 바람에 안에 든 접시며 컵이 심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릴라의 몸은 주방을 지나 그들의 침실로 이어지는 복도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스테파노는 눈 깜짝할 새에 릴라를 일으킨 다음 그녀의 팔을 컵 손잡이 처럼 잡고서 침실로 밀어넣은 후 문을 등 뒤로 닫아버렸다.
열쇠를 잠그는 소리에 나는 겁이 덜컥 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것 같은 그 순간 스테파노의 육신이 아버지의 혼령에 빙의되는 것을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돈 아킬레의 그림자가 정말로 아들의 목 핏줄과 이마의 푸른 핏줄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나는 너무나두려웠지만 눈치아 아주머니처럼 식탁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실 문 손잡이를 붙들고 흔들어대면서 나무로 된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스테파노, 제발 부탁이야. 질리올라의 말은 다 거짓말이니 제발릴라를 내버려둬! 릴라를 때리지 마!" 스테파노는 이미 분노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그가 진실을 말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방에없는 것 같았다. 한동안 스테파노 혼자 말하면서 릴라의 뺨을 때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물건을 부수는 것 같았다.
▶집주인도 모른척 한다.
"집주인을 부르러 가야겠어요."
▶가족 역시 이사태를 방관할 것이다.
"리노에게 말하면 스테파노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리노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는 정말 아주머니의 말을 믿는 것처럼 말했다.
"부탁이니 말씀하지 마세요." 속으로 나는 생각했다.
'리노나 페르난도 아저씨는 릴라가 결혼한 후로 그녀를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어. 태어날 때부터 마음 내키는 대로 때린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내들은 다 똑같아. 니노만 빼고."
나는 커지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릴라가 리노를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해졌다. 결혼을 했는데도 말이다. 둘은 이 더러운 상황에 나만 혼자 내버려둔 채 함께 떠나버릴 것이다
(3) 인생의 전환점이 된 레누의 고등학교 졸업시험
▶
고등학교 졸업시험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두 시가에 걸쳐서 자코모 레오파르디의 시에서 자연이 가지는 의미를 주제로 작문을 했다. 나는 외워놓은 시구절을 인용해가면서 이탈리아문학사 교과서의 내용을 세련되게 재구성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여러 과목 중에서도 특히 라틴어와 그리스어 시험은 알폰소를 포함한같은 반 친구들이 정답을 써내려가기 시작할 시간에 나 혼자 시험을 마치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이 일로 나는 시험관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분홍색 정장 차림에 미용실에서 손질하고 온 듯이 보이는 하늘색에 가까운 은발의 나이 든 교사가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시험은 구두시험이었다. 나는 모든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지만 특히 은발시험관의 격찬을 받았다. 그분은 내가 말한 내용뿐 아니라 내가 말하는 방식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학생은 글솜씨가 아주 뛰어나군요."
어본 적 없는 억양이었다. 나폴리 사투리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나요? 시조차도?"
"레오파르디는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확실한가요?"
"네."
"그러면 학생 생각은 어떤가요?"
"전 아름다움이란 속임수라고 생각해요."
"레오파르디의 정원처럼 말인가요?"
레오파르디의 정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이렇게 대답했다.
"네. 어느 청명한 날의 바다처럼요. 아니면 석양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밤하늘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아름다움이란 공포 위에 뿌린가루와도 같아서 아름다움을 걷어내면 우리는 홀로 각자의 두려움과 마주하게 되는 거죠."
영감 넘치는 어조로 말이 내 입에서 술술 나왔다. 임기응변 식으로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작문시험에서 쓴 내용을 구두시험에 맞춰서 풀어낸 것이다.
"무슨 과에 진학할 예정이죠?" 나는 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용어였다.
나는 주제를 피해가려고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공무원 시험을 볼 예정이에요."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요?"
죄라도 지은 양 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네."
"일자리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인가요?" "네"
자리에 가도 된다고 하기에 나는 알폰소와 같은 반 친구들 같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생님이 나를 복도까지따라와서 피사에 있는 대학교에 대해 오랫동안 설명을 해주었다. 지금 치른 것 같은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고했다.
"이틀 후에 오면 필요한 정보를 알려줄게요."
듣고 있기는 했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같았다. 이틀 후 학교를 다시 찾은 것은 선생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낮은 점수를 받을까봐 두려워서였다. 막상 선생님을 만나니 내게 필요한 모든정보를 커다란 종이에 꼼꼼하게 정리해둔 것을 보고 나는 감동을 받았다.
그 후로 다시는 그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분의 이름도 모르지만 나는 정말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내게 끝까지 존댓말을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진심이 느껴지는 품위 있는 태도로 나를 포옹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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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대학 입학시험에서 릴라에게 들었던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에 대해 말하다.
고등학교졸업시험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았다. 특히 라틴어가 정말 어려웠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시험은 전반적으로 난도가 높았다. 교수님들은 모든 과목에서 내 지식을꼼꼼하게 검증했다. 나는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답은아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척했다. 이탈리아어 교수님은 내 목소리마저 거슬리는 듯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학생은 글을 쓸 때 논리적으로 주제를 전개하지 않고 논지가 흔들리는군요. 내가 보기에 학생은 비판적인 논리전개 방식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지식이 없는 분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 같아요."
나는 절망했다. 내가 하는 말에 자신감을 잃었다. 교수님은 이런내 상태를 알아채고는 비웃듯이 바라보면서 최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분명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을 뜻하는 것이었을 텐데 순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떠오른 생각 중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주제를 골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지난여름 이스키아섬 치타라 해변에서 릴라와 니노와 함께 대화를 나눴던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에 등장하는 댄 루니에 대해서 이야 기를 했다. 나는 댄 루니라는 인물이 이미 장님인데 벙어리에 귀머거리까지 되고자 했다고 말했다. 비웃는 듯했던 교수님의 표정이 점차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그러다가 황급히 내 말을 가로막더니 나를 역사 교수님에게 보냈다.
▶그 때 읽었던 페데리코 샤보의 『국가의 개념』도...
역사 교수님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내가 녹초가 될 때까지 고도의 정확성을 요하는 질문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평생 그때처럼 내가 무식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학교생활이 힘에 부쳐 성적이 제일낮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시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애매모호한 대답이로 일관했다. 교수님이 집요하게 질문을 퍼부으면 나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지막에 교수님이 한심하다는 듯이 물었다.
"학생은 교과서 이외에 읽은 책이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국가의 개념』을 읽었습니다."
"작가가 누군지 기억나나요?"
"페데리코 샤보입니다."
"무엇을 이해했는지 이야기해봐요."
교수님은 몇 분 동안 내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 말을 중단시키더니 잘 가라고 퉁명스레 인사했다. 교수님의 태도로 미루어볼 때 내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다.
나는 펑펑 울었다. 정신을 놓고 있다가 가장 전도유망했던 내 일부분을 어딘가에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뛰어난 아이가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있지 않았던가. 그래, 진정 뛰어난 것은 릴라지. 진정 뛰어난 것은 니노야. 나는 그저 오만방자했을 뿐이야. 이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거야.
그런데 의외로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방과 폈다 접었다 할 필요 없는 침대와 책상과 필요한 모든 책을 가질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수위의 딸인 나 엘레나 그레코는 태어 나서 자란 우리 동네를, 나폴리를 19세의 나이에 혼자서 떠나게 되었다.
(4) 책에 쓰여 있지 않은 중산층의 말과 행동을 익히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레누가 릴라보다 잘 하는 것은 , 남의 눈치 보기!
노르말레 대학교에서 보낸 시기는 릴라와 나의 우정을 떠나 내 이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대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줍음 많은 촌뜨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표준어를 쓸 때 내 말투가 자칫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문어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애써서 생각해낸 문장을 말하다가 표준어로 적당한 단어가생각나지 않아 사투리를 표준어화해서 만들어낸 단어로 문장을 메울 때 가장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말투를 고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일반적인 에티켓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고 음식을 씹을 때도 쩝쩝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민망해하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화를 끊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문외한인 분야에 끼어들기도하고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문제를 깨닫고 친절하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노력했다.
한 번은 로마 출신의 여학생이 내 질문에 평소 내 억양을 흉내 내서 대답한 적이 있었다. 질문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다들 깔깔대며 웃어대서 상처받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이들과같이 웃으면서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명랑한 목소리로 일부러 더 사투리를 강조했다.
학기 초 몇 주간은 고향에 돌아가 내 검소한 일상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힘이 들었다. 하지만 서서히 학교생활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여학생, 남학생 할 것 없이 모든 학생과 수위 아게씨들 교수님들의 호감을 얻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애쓰지 않는 것 같았겠지만 실은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목소리와해도 을 통제하는 법도 익혔다. 단순한 에티켓을 넘어 모호한 상황에대처하는 방법에도 익숙해지게 되었다. 나폴리 억양을 최대한 숨겼다. 나는 뛰어난 아이이고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되 절대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내 무지에 대해자조적으로 풍자했고 좋은 성적을 받아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놀라는 척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 여학생 중에서 적의를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상냥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대방을 공략했다. 친절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 상대방의 태도가 누그러져 그쪽이 오히려 나를 찾게 될 때도 항상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교수님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교수님들을 대할 때는 더신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목적은 같았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호감과애정을 얻고 싶었다. 엄격하고 다가가기 힘든 교수님은 헌신적인 자세와 평온한 미소로 대했다.
.....
1년 후 나는 학교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학생 가운데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면 모두에게 상냥한 응답을 받는 그런 학생이 되어 있었다.
(5) 공산당원이고 부자인 남자친구가 생겼다.
▶ 프랑코 마리를 알게 된 것도 바로 그날 밤이었다. 그는 못생긴 편이었지만 재미있고 영리한 청년이었다. 약간은 건방진 구석이 있는데다 낭비벽이 심했고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레조 에밀리아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공산당원이기는 했지만 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얼마 되지 않는 여유시간을 즐겁게 보내곤 했다. 그는 내게 뭐든지 다 사주었다. 옷, 신발, 코트, 내게 눈과 얼굴선을 돌려준 새 안경, 그가 가장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인 정치 관련 서적 등. 그에게서 스탈린에관한 끔찍한 사실을 들었고 이를 계기로 트로츠키의 책도 읽게 되었리 다. 덕분에 나는 반(反)스탈린주의적 정서를 갖게 되었고 러시아 연방에는 진정한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갖게 되었다. 혁명은 중단되었고 언젠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프랑코가 경비를 부담해 난생처음 해외여행도 했다. 우리는 유럽전역의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하는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과리에 갔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정작 파리구경은 거의 하지 못했다. 나폴리나 피사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상이 인상적이었던 파리의 길과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경찰차의 경보음, 어딜 가나 흑인이 많아서 신기했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지나가다 길에서도 흑인을 쉽게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프랑코가 이스어로 긴 연설을 한 강당에도 흑인이 많았다. 연설 후 프랑코는 박수를 받았다. 나중에 파스콸레에게 내 정치적 경험을 들려주니 그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6) 릴라와 떨어져 있지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삶을 릴라의 삶에서 떼어낼 수 있을까? 릴라 없이 내 삶이 가능할까?
만약 릴라가 나 대신에 노르말레 대학에 입학했다면 릴라도럼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을까. 로마 출신 여학상의 이뺨을 때렸을 때, 나는 릴라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는 릴라가 어떻게 내 가식적인 온화함을 걷어내고 내게 필요한 결단력을 주었으며 욕설까지 퍼붓게 만들었을까. 나는 어디까지 릴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은 프랑코의 방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도 릴라의 과감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프랑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내말라붙은 감성에 대해 깨달았을 때의 불만도 릴라가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 릴라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7) 내가 서술한 것은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자리 거짓일수 있다.
그러니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 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8) 이스카야 섬에서 돌아온 후 릴라는 이전과 같은 삶에의 의미를 잃었다.
나는 릴라의 고통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고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기술로 스테파노가 아닌 니노의 아이를 가졌기에 나는 릴라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릴라가 우리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려고 했기에,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남편과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유함을 버리고 애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뜨리려 했기에 나는 릴라가 그만큼이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 나올 법한 격정적인 행복감을 느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부부간의 행복은 내 관심 밖이었다. 내 관심은 열정에 의한 행복이었다. 내가 아닌 릴라를 찾아온 선과 악이 뒤섞인 극단의 혼동 상태와 같은 행복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틀렸음을 안다. 스테파노가 우리를 데리고 이스키아 섬을 떠날 때를 들리를 떠날 때를 돌이켜 볼 때 배가 해안에서 멀어지는 순간 릴라가 느꼈을 아픔을 이제는-경을 아픔을 이제는 실감한다. 릴라는 당장 다음 날부터 아침 해변에서 니노와 만나고,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속삭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함께 수영도, 키스도 포옹도, 사랑도 나누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닫고 격렬한 아픔을 느꼈을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라치 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인생은 사라져 진정성을 잃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전략을 짜고 전투를 벌이고 전쟁을 준비하거나 동맹을 맺는 삶, 짜증스런 공급업자들과 고객들, 무게를 속여 계산대 서랍에 돈을 쌓는 데 전념하는 삶은 의미를 잃었다. 그녀의 삶에서 구체적이고 진실한 존재는 니노뿐이었다.
릴라는 그런 니노를 갈망하고 있었다. 단 한순간도 그를 원치 않은 적이 없었다. 밤이면 어둠에 잠긴 침실에서 잠깐이라도 그를 잊어보려고 남편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그 순간 니노에 대한 욕망이 오히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껴져 스테파노를처음 본 사람처럼 밀어냈다. 릴라는 침대 한구석에서 울면서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거부하거나 욕실에 들어가 열쇠로 문을 잠가버렸다.
(9) 니노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기를 원했지만
니노는 절망스럽게 말했다.
"이제는 날 원하지 않는 구나."
릴라는 니노를 원했다. 시간이 갈수록 원하고 또 위해릴라는 니노에게서 다른 것도 원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다시 학업에 열중하기를 바랐다. 이스키아 섬에서 그래다처럼 계속해서 자신의 지성을 자극해주기를 원했다. 초등학교 지의 그 비범한 아이, 올리비에로 선생님을 매혹시키고 『푸른 요정』을 쓴 그 소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기력을 찾은 것이다. 그 소녀를 어두운 심연에서 구해 끌어 올려준 것이 바로 니노였고 이제는 그소녀가 니노가 예전과 같은 젊은 면학도의 모습을 되찾아 자신에게서 카라치 부인의 모습을 지워버릴 힘을 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니노가 예전처럼 성난 연인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사랑의 열정이 자아를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 달은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처음에 릴라는 기뻐했다. 니노는 차츰 안 정을 되찾고 이스키아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럼으로써 릴라는 니노를 더 원하게 되었다. 니노만 되찾은 것이아니라 그와의 대화, 그의 생각을 되찾았던 것이다. 니노가 마시지해 애덤 스미스의 책을 읽으면 릴라도 따라 읽으려 했다. 니도(덤 스미스를 읽을 때보다 더 마지못해하며 제임스 조이스의었을 때도 릴라는 니노를 따라 읽었다. 릴라는 어렵게 만 니노가 말해주는 책을 모두 샀다. 릴라는 니노와 책에 대해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9) 스테파노가 들어올 수 없는 영역
스테파노의 마음을 눈치챈 릴라는 이런 생각을 최대한 오래 지소시키려고 했다. 저녁에 함께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남편을 적의 없이 대했다. 그러나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는 조심스럽게 독서에 몰두했다. 남편은 범접할 수 없는, 오직 자신과 니노에게만 허락된 정신적 영역이었다.
그 시절 릴라에게 니노는 무엇이었을까? 성적 환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육체적 욕망의 대상? 그와 같은 수준이 될 수 있게발전하려는 의지에 불을 붙이는 존재? 은밀한 한 쌍의 연인으로서미래를 함께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꿈?
두 연인이 꿈꾸는 미래에는 그들 둘만의 사랑의 오두막과 복잡한세계에 대해 함께 고찰할 수 있는 작업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니노는 적극적이고 활발했고, 릴라는 그의 발걸음을 따르는 그림자요 신중한 조언자이자 헌신적인 조력자였다. 가끔 도망치듯 헤어지지 않고 한 시간 정도라도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면 내내 지치지고 육체적 쾌락과 언어의 유희를 함께 즐겼다. 그보다 더 완벽할 ㅜ는 없을 것 같은 행복한 시간이었기에 헤어진 후 다시 가게 일을 보고 스테파노와 잠자리를 함께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10) 사실은 릴라도 스테파노에게 벗어나려는 계획이 죽을만큼 무서웠다.
▶ 미래는 내일이 되고 그다음 날이 되고 또다시 그다음 날이 되었다. 릴라는 갑작스럽게 공책을 대학살 장면과 피투성이 이미지로 채우기도 했다. 릴라는 절대로 '나는 살해될 것이다'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역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한 기록을 공책에 남겼고 가끔은 이를 재구성하기까지 했다. 여성을 대상으로한 살인사건들에서 릴라는 범인의 분노와 피투성이가 된 범죄현장을 강조해서 묘사했다. 뉴스에는 보도되지 않은 구체적인 내용을 덧붙이기도 했다. 눈에서 눈알을 파내고 칼로 목을 베고 내장을 찌르가슴을 관통하고 젖가슴을 잘라내는 장면, 배꼽 아래까지 칼로가 그어 배가 터지고 날선 칼날로 성기를 긋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실제로 당할 수 있는 처참한 죽음을 언어화함으로써을 최소화하고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 같았다.
(11) 릴라는 결혼을 통해 빈곤을 벗어나려고 했다가 모멸감만을 맛봤다.
릴라가 마르티리 광장의 가게를 살펴보러 갔을 때 신부복을 입은 사진이 걸려 있던 곳에 아직도 누르스름한 그을음 자국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흔적이 눈에 거슬렸다. 니노를 만나기 전에 일어난 일 중에서 마음에 드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문득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치열했던 릴라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들이 모두 바로 그곳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밀레 가의 청년들과 충돌이 있었던 것도 그곳이었다. 그날 저녁릴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빈곤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정을 후회하면서 신부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훼손한 것도, 그리고그 모멸감 때문에 모멸감의 결과인 사진을 가게 장식으로 사용했던것도 바로 그곳이었다. 유산기를 느낀 것도 그곳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곳에서 솔라라 형제의 탐욕 때문에 구두사업이 난항을 맞은 것이다. 앞으로 그녀의 결혼이 파탄을 맞이할 곳도 그곳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릴라는 스테파노와 그의 이름올 그에게 속해 있는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벗어던질 것이다.
(12) 다시 릴라의 재능은 자기 자신이 아닌 리노에게 쓰이게 된다.
▶ 더 격정적인 시험 기간이었다. 한편으로는 구두 장사에 기여하는 수좋은 젊은 부인 역을 연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니노를 위해 책 읽고 니노를 위해 공부하고 니노를 위해 생각했다. 가게에서 알 게 된 몇몇 중요 인사와 가까워진 것도 앞으로 니노를 돕는 데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즈음 니노는 『일 마티노지』에 나폴리에 대한 글을 기고했는데 이 일로 그는 대학가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나는이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스키아에서처럼 다시릴라와 니노의 일에 휘말렸다면 나는 너무 큰 영향을 받아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때 내가 그 기사를 읽었다면그 글의 상당 부분을 릴라가 썼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릴라가 개입한 곳은 깊은 지식이 필요한 정보 서술 부분이 아니라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주제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낸 발상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글의 전체적인 어조도 분명 릴라의 것이었다. 니노에게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그런 글을 쓸 수 있는사람은 오직 릴라와 나뿐이었다.
(13) 드디어 릴라는 칼을 들었다. 2년이나 걸렸다.
"집에도 있기 싫으면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야?"
릴라가 말했다.
"떠나고 싶어."
"어디로?"
"당신과 있기 싫어졌어. 당신을 떠나고 싶어."
스테파노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엄청난 선언이어서 잠깐은 오히려 안심하는 것 같았다. 스테파노는 릴라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면서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그들이 부부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남편과 아내는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했다. 다음 주말에는 릴라를 아말피 해변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자고 했다.
릴라는 이제 둘이 함께 있을 필요가 없다고 침착하게 말했다. 약혼했을 때도 약간의 호감만 느꼈을 뿐이고 지금은 당신을 좋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니 그에게부양받고, 그의 돈벌이를 도와주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 모두 더는 견딜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릴라가 말을 마치자 스테파노의 손이 릴라의 뺨을 향해 날아들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릴라는 의자 밑으로 나동그라졌다. 릴라는 스테파노가 다시 달려들려는 틈을 타 재빨리 일어났다. 싱크대쪽으로 달려가 행주 아래 숨겨두었던 칼을 집어 들었다. 스테파노가다시 릴라를 때리려는 순간 릴라는 스테파노를 향해 칼을 겨누고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몸에 손을 대면 당신 아버지 꼴이 날 줄 알아."
스테파노는 릴라의 입에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기가 막혀서멈칫했다.
"그래. 죽이고 싶으면 죽여 보라지."
스테파노는 중얼거리더니 성가시다는 손짓을 해보이고는 길게하품을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하고 나니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스테파노는 불만에 찬 말을 중얼거리며 릴라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래, 가. 가버리라고. 난 당신에게 모든 것을 주었어. 뭐든 허락했는데 이런 식으로 되갚다니. 당신을 가난에서 구해주고 당신 오빠와 아버지와 당신의 그 거지 같은 가족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줬는데,
말이야."
스테파노는 식탁으로 돌아가 빵을 하나 더 집어 먹고는 침실로 들어가 갑자기 고함을 쳤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상도 못할걸!"
릴라는 칼을 다시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정말 자신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내게 다른남자가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지.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사람이야."
릴라는 애써 힘을 내어 니노와의 관계와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사실을 고백하려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마법에 걸린 망토라도 입은 것처럼 잠이 들어버렸다.
릴라는 그길로 코트를 걸쳐 입고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났다.
(14)스테파노의 현실도피
스테파노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잠에서 깨자 릴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행동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두려운 아버지 때문에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조용히 느릿느릿행동하면서 주위 환경과 절제된 거리감을 유지했다. 그렇게 해야만두 손으로 아버지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빼내고 싶은 욕망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었으니까.
(15) 경계의 해체 현상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신가된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릴라의 공책을 보고서야 첫날밤 경험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상처로 남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면의 욕망과 분노 때문에 또는 음흉한 계획이나 비열함 때문에 남편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할까봐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에 눈을 뜰 때마다 남편이 변형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남편이 물집같은 것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했다. 체액으로 꽉 차서 물집이 터지면살이 흐물흐물해져 흘러내릴 것을 두려워했다. 가구와 아파트와 스테파노의 어내인 릴라 자신까지도 주변의 모든 것과 함께 부서져서 살아 숨 쉬는 더러운 그 물질에 흡수될까봐 두려워했다.
(16) 니노 나는 니가 진짜 개자식이라고 생각해.
왜냐면 그 개자식이 관심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니까."
"그렇지 않아."
아니. 내 말이 맞아. 내가 뭐 바보인 줄 알아? 넌 문제만 일으킬뿐이야."
"무슨 뜻이야?"
"네 말을 듣지 말걸 그랬어."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내 생각을 혼란스럽게 했잖아. 너는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같아. 똑, 똑, 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지. 네 마음대로 될 때까지 결코멈추지 않아."
"네가 생각해낸 글이고 네가 쓴 글이야."
"맞아. 그런데 왜 네 번이나 다시 쓰게 한 거야?"
"다시 쓰려고 했던 건 너야."
리나, 내 말 똑똑히 들어. 넌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돌아가서 구두를 팔든 햄을 팔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부탁이니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려고 애쓰다가 나까지 망가뜨리지는 말아줘."
그날은 동거가 시작된 지 정확히 23일째 되는 날이었다. 신들은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서로를 탐할 수 있도록 23일 동안 이 들을 구름 속에 숨겨주었다. 릴라는 니노의 말에 깊은 상처를 받고말했다.
"꺼져버려."
니노는 화를 내면서 스웨터 위에 재킷을 걸쳐 입고는 문을 등 뒤로 쾅 닫았다.
릴라는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10분 후면 다시 돌아올 거야, 책, 공책, 면도용 비누, 면도기도 다 놔두고 갔으니 돌아오겠지.'
그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감히 그와 함께 살 생각을 했지? 그를 도와줄 수 있다고생각한 거지? 다 내 잘못이야.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을 써내려다 그에게 잘못된 글을 쓰게 했어."
릴라는 침대에 누워 니노를 기다렸다. 밤새 기다렸지만 니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도, 그 후로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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