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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학/책

방랑자들

by 책이랑 2020. 11. 1.

p.12 빠져나가고 싶지만 갈 곳이 없었다. 요동치며 선명한 윤곽을 만들어 내는 건 오로지 나의 현존뿐.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순간 깨달았다. 더 이상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는 그저 여기 있을 뿐이다. 

P. 15 내게는 지속성보다는 역동성이 한결 가치 있게 느껴졌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고, 결국 한 줌의 재로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P. 25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 합리화나 순화 작용, 자기부정이나 사소한 속임수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고 용기 있게 직면하게 된다면 아마도 우리의 심장은 터져 버리리라는 걸.

P. 28 나는 귀 기울이는 법을 잘 몰랐다. 경계선을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끼어들곤 했다. 이론의 입증이나 통계를 믿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인성이 있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축소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연함을 모호함으로 만들고, 반박할 수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 두뇌의 비뚤어진 요가, 내면의 움직임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미묘한 희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모든 판결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혀로 직접 맛보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예상한 결론에 이르곤 했다. 진짜는 하나도 없고 죄다 가짜일 뿐이며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결론, 나는 일관된 견해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저 불필요한 짐 가방이나 마찬가지니까. 

p. 망가지고 손상되고 상처 나고 부서진 모든 것에 자꾸만 끌리는것, 이것이 나의 증상이다. 시시한 것들, 뭔가를 만들다가 발생한실수, 막다른 골목. 좀 더 발전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한 것들, 혹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애초의 설계에서 너무 많이 확장된 것들 말이다. 표준을 벗어난 것, 너무 작거나 너무 큰 것, 넘치거나 모자라는 것, 끔찍하고 역겨운 것. 좌우대칭이 어긋난 모형,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사방으로 번식하고, 싹을 틔우는 것, 혹은 그 반대로 수많은 개체가 하나로 줄어든 경우도 그렇다.(p32-33) 

p.44“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결국 별로 심각하지도 않은 어떤 비밀을 찾아다니며 먼지를 일으키는 것 (44쪽)

p.74 “박물관 입장권 뒤편에 낯선 단어가 적혀 있다. 종잇조각을 눈에 가까이 가져가 더듬더듬 읽어 본다. 아마도 KAIROS일 것이다.“ (74쪽)

P. 80 거기 어딘가에 그에게 발송된 편지가 있다. 아내와 아이의 문제에 관한 편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 자신의 문제에 관한 편지.
글자도 모르겠고 기호도 모르겠다. 그러하니 아마도 인간의 손이 쓴 편지는 아닌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 기호들이 그와 연관되어 있음은 명백하다. 그가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들이 보인다는 것, 그 자체가 신비로운 일이다.
아니, 그가 지금 바라보고 있다는 것, 나아가 그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놀라운 신비다

P. 82 유동성과 기동성, 환상성은 문명화된 사람들의 특성이다. 야만인들은 여행을 하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거나 침략할 뿐이다.P. 82 그녀가 시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내게 설파했다. 그녀에 따르면 농업에 종사하는 정착민들은 순환적 시간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길 원하는데,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모든 사건이 항상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며, 배아 상태로 쪼그라들어서 성장과 노화와 죽음의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P. 118~120 여행 심리학의 핵심적인 개념은 바로 욕망입니다. 바로 이 욕망이 인간에게 이동성과 방향성을 부여하고 어딘가로 향하려는 성향을 일깨웁니다. 욕망 그 자체는 무의미합니다. 그저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진 않으니까요. 목적지는 신기루 같은것이고 불확실한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애매해지고 수수께끼 같아집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목적지에 다다르거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P. 136 무(無)에서 온 사람에게는 모든 이동이 다 귀환인 법이었다. 공허만큼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은 없기에.

P. 158 인간의 신체에서 가장 강한 근육은 혓바닥이다. 

P. 195 인간의 몸은 과연 누가 고안해 낸 것이며, 이에 대한 영원한 저작권은 누가 갖고 있는 것일까?

P. 269 100퍼센트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는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통해 모로코를 여행하고, 제임스 조이스로 인해 더블린에 가고, 달라이 라마에 관한 영화 덕분에 티베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P. 280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선, 면, 구체들, 그리고 시간 속에서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P. 319 필립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사실상 신에 관한 지식이라고 믿었다. 우리 안의 지옥인 슬픔과 절망, 질투와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P. 323 이야기에는 완벽한 통제가 도저히 불가능한, 고유의 타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는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자신감이 없고 우유부단하며 쉽게 현혹당하는 사람들. 단순하고 무지한 사람들.

P. 359 우리의 몸뚱이는 가엾고 추하다. 예외 없이 전부 가루로 으깨어질 운명을 타고났다.

P. 389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이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그는 정지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꼼짝도 하지 않는 것,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든 것을 지배해. 그러니까 움직여, 몸을 흔들어, 걸어, 뛰어, 도망쳐! 네가 그 사실을 잊고 멈춰 서는 순간, 그의 거대한 손이 너를 낚아채서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만 작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국가가 만들어지고 국가 간에 국경선이 수립되었다는 것은 결국 명확히 규정된 공간에만 인간의 육체를 머물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자와 여권이 만들어졌다는 건, 이동과 움직임의 자유로운 필요성을 제한하고 조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세금을 부과하는 통치자는 자신의 국민에게 어떤 것을 먹이고 어디서 잠을 재울지, 비단옷을 입힐지 마직 옷을 입힐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P. 416 그녀의 가족들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항상 일 분 정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폴란드 시골 마을의 오랜 관습이었다.

P. 572 ˝모든 것을 마다하라. 보지 말라. 눈꺼풀을 닫고 시선을 바꿔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지만,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다른 것에 눈을 떠야 한다.˝

P. 597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순례객 모두가 가장 열광한 대상은 횡단면으로 자른 표본들이었다.
그렇게 여러 조각으로 잘린 한 인간의 몸이 지금 눈앞에 놓여있다. 덕분에 우리는 인체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 푸른꽃


P. 601 우리는 서로에 대해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기에. 우리는 문자와 이니셜을 서로 교환하고, 종이 위에 서로를 불멸로 남기고, 서로를 플라스티네이션 처리하고, 문장의 포름알데히드 속에 서로를 담글 것이다.
공황 발작은 어땠냐면요..….˝
나는 귀 기울이는 법을 잘 몰랐다. 경계선을 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끼어들곤 했다. 이론의 입증이나 통계를 믿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인성이 있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축소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연함을 모호함으로 만들고, 반박할 수없는 논거에 끊임없이 의심을 품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 두뇌의 비뚤어진 요가, 내면의 움직임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미묘한 희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모든 판결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혀로 직접 맛보면서 궁극적으로 내가 예상한 결론에 이르곤 했다. 진짜는 하나도 없고 죄다 가짜일 뿐이며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결론, 나는 일관된 견해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 건 그저 불필요한 짐 가방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토론을 ㅎ

요동치며 선명한 윤곽을 만들어 내는 건 오로지 나의 현존뿐.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한순간 깨달았다. 더 이상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나는 그저 여기 있을 뿐이다. - 덴레일라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 모든 것, 모든 나라와 교회, 인간이 세운 정부, 이 지옥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그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 명확히 규정된 모든 것,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구획이 정해진 것, 프레임에 들어맞는 것, 명부에 기록된 것, 전시된 것, 번호가 매겨진 것, 증명된 것, 서약된 것, 수집된 것, 전시된 것, 상표가 부착된 것, 정지 상태에 놓인 것, 집과 안락의자, 침대, 가족, 땅, 파종과 모종, 생장의 확인, 계획 세우기, 결과 가다리기, 일정 개괄하기, 순서 지키기, 그러니 아이들을 잘 키워라. 예기치 않게 그들을 낳았으니, 그리고 길을 떠나라. 부모를 잘 묻어라. 예기치 않게 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었으니, 그리고 떠나라. 그의 순결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가라, 그의 케이블과 전선, 전파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그의 민감한 도구의 측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거야.  

모든 죽음은 삶의 일부이며,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오류나 잘못 또한 없다.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와 타락에 이르고, 결국 한 줌의재로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면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을까. - Blue

많은 이들은 세상의 좌표 어딘가에 시간과 공간이 서로 딱 들어맞는 완벽한 지점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다들 여행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소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움직이면서도 어떻게든 가능성이 싹터서 결국엔 목표 지점에 다다르리라는 희망을 품은 채로 말이다. -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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