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에 모였어요. 휴일점심에 모임을 하다니 ,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까페 에무에 콘서트가 있어서 루프탑전망으로 유명한 까페 아르크에서 만났습니다. 루푸탑 조망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지만 덥고 흐려서 안에서 모임을 했습니다.
- 토론을 마친 후 10여분거리의 서촌 이가면옥에서 냉면을 먹었고,
- 수성동 계곡에 들렀습니다.
비가 내린지 얼마 안되어서 계곡에 물이 있었어요! 가족들끼리 와서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잠시 손을 씻었고요.
그리고
- 사직터널 위쪽의 '딜쿠샤'에가서 도슨트 해설을 들으며 관람을 했습니다.
가봤던 곳을 정리하며 보니 인왕산과 서촌에는 가 볼 만한 곳이 더 많았습니다. 지역주민인 제가 먹고, 마시고, 걸으며 틈틈이 답사를 해두겠습니다. 가을에 또 같이 산책해요.
목차
인왕산과 서촌의 장소들
인왕과 서촌
■ 인왕은 중인들의 터전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를 가리킨다. 양반들은 넓은 집에 살았으므로, 좁은 골목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인 이하였다. 한양을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면 그 중간지대인 청계천 일대가 위항이었으며, 좁은 집들이 모여 있던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을 중심으로 한 인왕산 일대도 위항이었다. 청계천 일대에는 역관이나 의원으로부터 상인에 이르기까지 재산이 넉넉한 중인들이 살았으며, 인왕산 언저리는 위항인 가운데 주로 서리나 아전들이 많이 살았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206026003
■ 중인 지식인들이 꿈꾸었던 인왕산 공동체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217023001
■ ③ 겸재 정선, 인왕산을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https://news.nate.com/view/20210503n02421
[1] 카페아르크
루프탑 전망으로 유명하다. 봄에는 벚꽃이 아름다운 top3 이런식으로 꼽히고 가을도 절경일 듯.
까페 바로옆에 있는 한옥집은 선조의 후손이자, 제12대 국회의장 운경 이재형 선생이 살았던 운경고택인데,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하는 듯하다. 최근에 예주간 행사를 한듯 하다.
https://blog.naver.com/dssa1020/222303090119
https://www.allurekorea.com/2022/03/15/165841/
[2] 이가면옥
냉면맛집. 냉면 맛집이 워낙 많아 탑오브 탑은 아닌 듯하나 무난한...
매운양념중에 회냉면은 양념이 진하고 비빔냉면은 담백하게 한다고 하니 참고해야 할 듯 하다.
왕군만두를 꼭 시키라는 평이 많았다.
https://blog.naver.com/lll_lalala/222786202474
[3] 유르트
수성동 계곡 바로 밑에 있는 가방가게이다.
이전에는 매장이 한남동에 있었던 듯 한데, 명품을 드는 젊은이들 사이에 명품많큼 인기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버선, 보따리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다고 하는데, 부드러운 가죽에 심플한 디자인들의 가방이어서 아주 오랫동안 쓸 수 있을 것 같다.
폭풍검색을 해서 알아낸 바로는 매년 10월 쯤에 "유르장"이라는 세일행사에서 B품은 정가의 70%, 신제품은 20~30% 할인된 가격으로 겟할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세일 안할때 가방한개값보다 돈을 더 쓸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ㅎㅎ 든다. 중고거래에서 '새것같은 중고'를 사는게 돈을 가장 적게 쓰는 방법일 듯.
[4] 수성동계곡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334626
[5] 딜쿠샤
■ .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 앨버트W.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L.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
기업인이자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고종의 장례식 취재를 의뢰받았던 테일러는 기사 내용에 3.1 운동을 추가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마침 아들 브루스가 태어난다. 메리는 출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통해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 왔던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서 도쿄에 가서 타전했고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3.1 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테일러에 의해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3.1일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각종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 운산금광
당시 운산금광의 채굴량은 세계 3위였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다. 공식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미국인 감독관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1897∼1915년 사이의 금 생산액만도 약 4,950만 원이었다고 한다. 그 무렵, 한강철교공사에 든 비용이 약 40만원 이었고, 일본이 선언한 한일합병의 구실 가운데 하나가, 조선정부가 일본에 진 빚 4500만 원이었으니 그 가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얼마나 금이 많았는지 광산에서 조선인부들이 금을 캐면서 혹시 빼돌릴까 봐 자꾸 ‘노 터치(no touch)’라고 소리 친 것이 변해서 ‘노다지’라는 말이 생겼다니 과히 어마어마한 금광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뿐만 아니다. 미국의 운산금광 채굴권 획득은 곧바로 영국, 독일,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중요한 경제이권들을 빼앗기는 구실이 되어 조선이 근대화로 가는데 힘이 되어야 할 국내자원은 그야 말로 누더기가 되고 만 것이다.
https://www.minjok.or.kr/archives/76100
https://museum.seoul.go.kr/www/intro/annexIntro/annex_dilkusha/annex_dilkusha_02.jsp?sso=ok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 최지혜 지음/혜화1117 |
그 외 가 볼 만한 장소
① 운경고택
운경고택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후손이고, 제12대 국회의장 운경 이재형의 집이다.
2022년 5월에 전시회 개최를 하며 한시적 개방을 한듯하다.
https://woonkyung.or.kr/notice-134/
■ 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2041719411
② 사직단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사직단(社稷壇·사적 제121호)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인) 사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따라서 사직단의 중심에는 건물이 아니라 텅 빈 제단이 자리잡고 있다. 사직단에는 왕릉에도 하나만 세우는 홍살문이 무려 8개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얼마나 신성한 장소인가를 알 수 있다.
*동쪽제단:토지신인 사(社)에게 제사 올리는 곳이고,
서쪽제단:곡물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
[...[] “이 중요한 공간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민족의 얼과 정신을 파헤치기 위해 사직단을 공원으로 만들고 격을 낮추었다.”면서 “담장은 신작로를 지으며 없어지고, 유구는 신축 건물의 기초석으로 사용되었다. 사직단은 파헤쳐지고 축소되어 수영장과 놀이공원으로 격하되었다.”
지금은 종묘에 비해 규모가 크게 축소된 사직단이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경복궁과 경희궁 사이 현재 사직동 주민센터와 어린이 도서관 그리고 종로 도서관 및 황학정 아래까지 모두 사직단이었다.
■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https://news.nate.com/view/20210426n02396
③ 필운대
배화여자대학교 뒤쪽에 이항복의 집터이자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지었다는 필운대가 있습니다.
이항복은 권율장군의 하나밖에 없는 딸의 사위인데, 권율은 권철의 4번 째 아들이기도 하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항복의 후손 중에는 정승·판서가 많이 나왔는데 가장 유명한 후손은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등 일제 때 독립운동가 6형제라고 합니다. 6형제는 조선이 망한 뒤 엄청난 재산을 팔아 간도로 망명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다. 특히 우당 이회영(1867~1932)은 무장투쟁과 무정부주의 운동을 이끈 지도자였습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269.html
④ 국사당
“원래 내 자리는 남산이었지. 그런데 일본이 나를 여기로 강제로 옮겨버렸어.”
문화재를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사람의 눈으로 문화재를 바라보지 말고, 문화재가 사람에게 말을 건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를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다.
인왕산 국사당(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이 이야기를 건네면 아마 이같이 뼈아픈 역사부터 풀어놓지 않을까. 100여 년 동안 품어온 한을 토해내듯 말이다.
◆원래 자리는 남산
현재 인왕산 중턱에 있는 국사당의 본래 자리는 그곳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남산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자신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남산 정상(현재 팔각정 위치)에 있던 국사당을 철거해 이곳으로 쫓아냈다.
■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135135
⑤ 무계정사
먼저 만나는 인물이 안평대군이다. 이 일대가 바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武溪精舍)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배경으로도 추정된다. 안평대군이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안견에게 그리게 한 ‘몽유도원도’에는 기암괴석과 바위산이 나오는데 지금의 부암동에 그런 것이 많다.
안평대군은 첫째 형 문종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통틀어 한시에 가장 능한 인물로 꼽힌다. 운자가 주어지면 자유자재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뿐 아니라 서화에도 재능을 보인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모였는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둘째 형 세조가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안평대군은 역모를 도모했다는 이유로 교동도로 귀양가 죽음을 맞는다.
안평대군이 죽은 뒤 이 일대는 왕의 기운이 서린 땅이라는 이유로, 건물이 모두 철거됐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 안평대군의 자취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은,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각자가 유일하다. 혹자는 이 글씨가 안평대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옆에는 허물어져 가는 한옥이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지은 것으로 안평대군과는 무관하다.
■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507131783814045
일요일에 같이 돌아본 곳
(계속 업데이트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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