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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동아리/보늬샘

학부모 보늬샘 양성 심화연수 2016 [5강] 담론

by 책이랑 2016. 8. 24.


[1] 과제로 제출한 담론 논제 첨삭
[2] 논제를 골라 토론


숭례문학당에서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는 <강의> 출간 이후 10년 만에 출간되는 선생의 ‘강의록’이다. 이 책은 동양고전 말고도 <나무야 나무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 선생의 다른 책에 실린 글들을 교재 삼아 평소에 이야기하신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과 세계 인식, 인간 성찰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2014년 겨울 학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다. 이 책의 부제를 ‘마지막 강의’로 한 이유이다. 선생의 강의실은 늘 따뜻하고 밝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다루는 내용이 한문 고전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문맥을 현재로 끌어내어 우리의 입장에서 읽기 때문이다. ‘공감’의 힘이다.

“우리의 교실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각성이면서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여행이기를 바랍니다. 비근대의 조직과 탈근대의 모색이기를 기대합니다. 변화와 창조의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대표 지성인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강의>이후 10년 만에 신간을 출간했다. 신영복 교수의 2014년 하반기 강의 녹취록과 강의 노트를 저본으로 만든 책 <담론>은 동양고전들을 오늘날의 과제와 연결시켜 현대 사회를 읽어내는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과 20년의 수형생활 중 느끼고 깨달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로 구성됐다.


과거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성돼 20년 간 복역한 신영복 선생은 출소 이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등의 저서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자기 성찰, 역사와 사회 현실, 세계 인식에 대한 깊은 사유로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전하고 있다. 이번 <담론>에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존재론을 뛰어 넘는 관계론과 역사를 바라보는 탈근대적 인식,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주체성에 대해 언급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무엇인가를 하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또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화려한 영상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에게 포획되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간다.


이에 대해 신영복 선생은 “누군가 저한테 어제 뭐하셨냐고 물어봤어요. 한참을 생각하다 ‘아, 속눈썹으로 무지개를 만들었습니다.’ 라고 했어요(웃음). 저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을 굉장히 잘 보내요. 주체성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안하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해요”라고 말했다.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하면서도 담담한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신영복 선생. <담론>의 출판 간담회 현장에서 들려준 책과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49627

그렇게 출간된 <담론>은 성공회대학 강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1부에서는 동양고전을 통해 본 세계 인식, 2부에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다루고 있는데, 사형수 시절의 절망과 막막함, “반목과 불신, 언쟁과 주먹다짐”으로 “하루가 팔만대장경” 같았던 무기수 시절의 이야기 등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진솔한 고백들이 많이 실렸다.


“계몽주의 노인권력 바탕에 둔
그런 글쓰기는 지양돼야 해요
‘멘토’에 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사표나 스승은 당대에 없어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해요”

“역사의 장기성·굴곡성 생각하면
목표달성에 과도한 의미 부여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야 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먹물이구나! 참혹한 반성

신영복은 감옥생활 20년을 “나의 대학시절”이라고 표현한다. 감옥은 그에게 ‘사회학’과 ‘역사학’과 ‘인간학’을 가르친 교실이라는 것이다. 24시간 모든 것이 공개되는 감옥은 “목욕탕처럼 적나라하게” 서로의 실체가 드러나는 공간이며, “메끼(도금) 벗겨진” 인간의 민낯을 “어항 속 붕어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첫 5년여간 신영복은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도는 존재였다. 그의 눈에 비친 다른 재소자들은 노동 의욕도 변화 의지도 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일 뿐. 신영복은 최대한 친절하게 그들을 대했지만 동료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낌새를 제일 먼저 알아차린 것도 같이 있는 재소자들이었다. 신영복은 자신만 모르는 ‘왕따’인 채로 5년을 보냈다.

-5년이 지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죠?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서 만나고 그들 얘기를 들으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죠. 그 과정이 그렇게 단선적이진 않아요. 방황하고 실패하고 우회도 하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 내 또래, 마흔한 살짜리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 친구한테 누가 접견을 왔다는 거예요. 모두 깜짝 놀랐죠. 3~4년간 아무도 온 일이 없었는데.”

-누가 왔는데요?

“누가 왔냐고 물으니, ‘웬 재수없는 녀석이 왔다’고만 하고 말을 안 해요.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자기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자기를 삼촌네 맡겨놓곤 도시로 돈 벌러 나갔대요. 그리고 소식이 끊어졌는데 동네 사람들 얘기론 ‘너희 엄마 시집갔다’고 했다고. 근데 오늘 접견 온 남자가, 재가한 엄마가 키운 (의붓)아들이라고 그러더래요. 기분이 나빠서 ‘근데 여기 왜 왔냐? 남 징역살이하는 거 확인하러 왔냐?’고 고함을 지르니까 ‘당신 어머니를 우리 어머니로 모시고 오지 않았으면 지금쯤 내가 거기 있고 당신이 밖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죄송해서 왔다’고 하더래요. 아, 감동이잖아요. 그럼 나는 뭔가? 나도 쟤와 같은 부모, 그런 환경에서 컸다면 지금쯤 같은 죄명으로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나 자신에 대한 반성, 아주 참혹한 반성이 들었어요.”

이후 신영복은 교도소 안에서 금지된 내기축구를 하다가 다른 재소자들과 ‘빠따’를 맞았고, 예배 후에 나눠주는 떡 위문품을 받기 위해 줄을 서는 능청스런 ‘떡신자’가 되었다. 가르치려 드는 인텔리의 완고함에서 벗어나니 도처에 스승이 있고 친구가 있었다. 그는 이 변화를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긴 여행”이라고 말한다.

신영복을 만든 시간들(※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신영복을 만든 시간들(※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그래서인가요? 언제나 쉽고 편안한 구어체나 서간체를 즐겨 쓰시는 이유가? 선생님 글은 여느 교수들처럼 딱딱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고, 동네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아래서 들려주는 얘기처럼 물 흐르듯 편안합니다. 그런 문체도 감옥에서 갈고닦은 노력의 산물인가요?

“어려서 대학신문에 글 쓰고 할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거예요. 지식인의 글쓰기에 대해서 반성 많이 했지요. 글 쓰는 필자들은 독자를 배려해야 해요. 자기 글을 쉬운 글에 담아서 공유하는 노력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신영복은 낮은 곳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고 소통하는 방법을 부단히 고민하고 실험해 왔다. 서화(書畵)는 많은 사람과 깊이있게 교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매체였다. 그의 서화는 책으로도, 달력으로도 나왔고 손수건이나 티셔츠, 우산으로도 만들어졌다. 그가 직접 그린 삽화에 그가 개발한 어깨동무체 혹은 민체(民體)라 불리는 글씨, 그리고 짧고 강렬한 우화와 잠언들은, 심오한 사상이 아름답고 친근한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고 일상의 실용품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원효는 법당에 앉아 경전을 외는 대신, 마을마다 표주박을 두드리고 춤을 추며 불가의 가르침을 담은 노래를 퍼뜨리고 다녔다. 필요한 곳에 서화와 글씨를 헌사하고 토크콘서트로 전국을 돌아다닌 사상가 신영복의 족적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을 따르는 제자는 많지만 선생님처럼 대중과 직접 소통할 줄 아는 제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본인들이 깨닫고 꾸준히 노력해야겠지요. 앞으로 계몽주의적인 노인 권력이 바탕에 깔린, 그런 글쓰기는 지양될 거라고 난 생각해요.”

-계몽주의가 왜 나쁩니까?

“허허, 그게 잘난 사람들이 하는 거거든요. 계급적 편견이라고 봐야 되죠. 자기 가치를 기준으로 타자(他者)를 끌고 들어가는 거잖아요. 계몽주의 프레임은 허물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전 ‘멘토’에 대해서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

-왜요? 요즘 멘토와 힐링의 시대라는데요.

“멘토가 계몽주의의 변형이잖아요. 멘토라는 게 대개 연배가 좀 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를 전하는 건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 앞으로 20~30년 후에 살아갈 세계에 대해서 20~30년 전의 경험을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거 자체가 오히려 진보를 방해하는 거 아닌가요?”

-많은 이들이 선생님을 ‘이 시대의 대표적 스승, 대표적 멘토’라고 부르는데요.

“거대담론도 사라지고 존경했던 사람들의 추락도 많이 보고 하니까 뭔가 사표(師表)로 삼을 만한 대상을 성급하게 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사표나 스승이라는 건 당대에는 존립할 수 없는 겁니다. 어떤 개인의 인격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간 사표가 있다면 공부하긴 참 편하겠죠. 그렇지만 그건 낡은 생각이에요. 집단지성 같은 게 필요하고 집단지성을 위한 공간을, 그 진지를 어떻게 만들 건가가 앞으로의 지식인들이 핵심적으로 고민할 과제예요.”

한번도 안 바뀐 노론 권력

-이번 책에서 제시하신 ‘원형 인식모델’은 우리 사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 같습니다. 토대와 상부구조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음과 양, 화(和)와 동(同), 이상과 현실, 좌와 우를 둥근 원 안의 대칭선상에 놓으셨지요. 대비되는 것들은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그 말씀엔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막상 현실을 보면 이게 쉽지가 않아요. 카운터파트가 격이 너무 떨어져요.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상호보완이고 뭐고 하지 않겠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독선이 도를 넘은 지 오랩니다.

“차이라는 건 단순히 공존하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고, 자기 변화의 시작으로 삼아야 해요. 차이를 자기 변화의 학습교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것, 그게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에 이은 ‘가슴에서 발(실천)로의 긴 여행’이지요. 근데 우리 현실에서 좌-우, 남-북, 진보-보수, 이런 대비 관계가 과연 상생적인 대비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냐? 너무나 비대칭적이어서 도대체 지양(止揚)을 할 수 있는 상생의 파트너가 아니지 않으냐? 그럴 수 있어요. 근데 어느 나라 역사에도 그렇게 이상적인, 완벽한 평형을 유지하는 대비 관계는 극히 드뭅니다. 우리만 하더라도 분단과 외세, 그리고 임란 이후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노론 권력의 오래된 지배구조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 왔잖아요.”

-노론 권력이라고요?

“예, 임란 이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몰아내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지배권력은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노론 세력이 한일합방 때도 총독부에서 합방 은사금을 제일 많이 받았지요. 노론이 56, 소론이 6명, 대북이 한 사람. 압도적인 노론이 한일합방의 주축이거든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도 행정부만 일부 바뀐 거지, 통치권력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그렇게 해왔지요. 대학, 대학교수, 각종 재단, 무슨 시스템 이런 것들 쫙 다 소위 말하는 보수진영이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그 말씀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웃음)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마 이 선생보다 더 속상할걸요, 속으로는.(웃음) 근데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큰 아픔을 같이 짊어지고, 소소한 기쁨을 같이 나눌 이웃 만들기, 그게 신영복이 주장해온 ‘더불어숲’의 정신이다. 그 숲 속, 그의 너른 나무그늘 안에 우리 모두 오래오래 머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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