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힘' 저자 오항녕 박사 "광해군 눈치외교"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조선의 쇠퇴와 멸망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역동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조선처럼 500년 이상 간 나라는 세계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조선이라면 '당파싸움'이나 '사대주의'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를 전공해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오항녕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은 최근 펴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에서 조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에 맞서 500년 이상 지속했던 조선의 저력을 조명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나서 쇠퇴와 멸망이 아니라 제국의 문명이 오래 유지된 힘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어 '로마인이야기'를 썼다고 하는데 이 책도 출발이 같습니다."
최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그는 "일제 식민사관이 심어놓은 '식민주의'와 근대를 필연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근대주의'에 오염돼 있기 때문에 조선이 안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조선이 근대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자본주의로 간다고 행복해지는가? 근대에 대한 환상을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연구원은 책에서 조선인들의 삶의 양식, 생각, 제도 중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조선 문치주의의 핵심인 경연, 사관들이 남긴 '조선왕조실록', 조선을 이끌어간 핵심사상인 성리학 등을 꼽으며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정책 변화로 대동법을 든다. 공물을 현물이 아닌 쌀로 걷고 호(戶)가 아닌 논밭에 세금을 부여하는 제도다.
"대동법은 예전의 것을 뒤엎은 혁신이었습니다. 백성에게 피해를 안 주는 방법을 찾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다 보니 100년이 걸렸습니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대의를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여론 조사하고, 시범사업을 해서 시행한 것입니다. 이러니 조선이 전쟁을 2차례 겪고도 200년을 더 간 것입니다."
오 연구원은 조선시대에 대한 좋은 점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는 광해군 시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아온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오히려 혹독하게 깎아내렸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했다구요? 제가 보기에는 '눈치 외교', '기회주의 외교'입니다. 일본 학자 이나바가 백성에게 은택을 내린 택민(澤民)군주라고 했는데 황당하죠."
그는 광해군이 자신의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제거한 뒤 왕권 강화를 위해 궁궐 공사를 계속했다고 해석했다. 선조 때부터 짓기 시작한 창덕궁이 완공되고서도 창경궁,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경덕궁(현재의 경희궁), 인경궁 공사를 계속 벌였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는 궁궐 건축에 들어간 돈을 최소한으로 잡아 국가 재정의 15~25%로 썼지만, 실제 20~30%는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나 되는 철을 석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면서 "이 정도면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대후금 외교는 실용주의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눈치 보기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방대한 토목 사업 때문에 양민의 부담이 너무 컸는데 반정 직후 인조 정권은 궁궐 공사를 중단하고 세금을 탕감했다면서 "'반정'은 말 그대로 백성들이 '정상적인 생활(正)로 돌아가는(反)'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안 연구원은 궁궐 공사가 왕권 과시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나무, 돌, 쇠 등 갖가지 재료를 누가 조달했을까요. 권문세가나 왕실이 조달했을 겁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면 건설업체가 이득을 보는 것과 같이 왕실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커넥션이 있었을 겁니다."
그는 "대동법을 시행해서 재정을 확충하고 북쪽이 불안하니 군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광해군은 한 일이 없다"면서 "경제력, 민심, 군사력 등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으니 기회주의 외교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 "조선의 쇠퇴와 멸망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역동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조선처럼 500년 이상 간 나라는 세계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조선이라면 '당파싸움'이나 '사대주의' 같은 단어를 떠올리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선시대를 전공해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오항녕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은 최근 펴낸 '조선의 힘'(역사비평사)에서 조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에 맞서 500년 이상 지속했던 조선의 저력을 조명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읽고 나서 쇠퇴와 멸망이 아니라 제국의 문명이 오래 유지된 힘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어 '로마인이야기'를 썼다고 하는데 이 책도 출발이 같습니다."
최근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그는 "일제 식민사관이 심어놓은 '식민주의'와 근대를 필연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근대주의'에 오염돼 있기 때문에 조선이 안 보인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조선이 근대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한다면서 "자본주의로 간다고 행복해지는가? 근대에 대한 환상을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 연구원은 책에서 조선인들의 삶의 양식, 생각, 제도 중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조선 문치주의의 핵심인 경연, 사관들이 남긴 '조선왕조실록', 조선을 이끌어간 핵심사상인 성리학 등을 꼽으며 조선시대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일어난 가장 큰 정책 변화로 대동법을 든다. 공물을 현물이 아닌 쌀로 걷고 호(戶)가 아닌 논밭에 세금을 부여하는 제도다.
"대동법은 예전의 것을 뒤엎은 혁신이었습니다. 백성에게 피해를 안 주는 방법을 찾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다 보니 100년이 걸렸습니다.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킨다는 대의를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여론 조사하고, 시범사업을 해서 시행한 것입니다. 이러니 조선이 전쟁을 2차례 겪고도 200년을 더 간 것입니다."
오 연구원은 조선시대에 대한 좋은 점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는 광해군 시대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는 후금과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아온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오히려 혹독하게 깎아내렸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했다구요? 제가 보기에는 '눈치 외교', '기회주의 외교'입니다. 일본 학자 이나바가 백성에게 은택을 내린 택민(澤民)군주라고 했는데 황당하죠."
그는 광해군이 자신의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제거한 뒤 왕권 강화를 위해 궁궐 공사를 계속했다고 해석했다. 선조 때부터 짓기 시작한 창덕궁이 완공되고서도 창경궁,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경덕궁(현재의 경희궁), 인경궁 공사를 계속 벌였다는 것이다.
그는 "책에는 궁궐 건축에 들어간 돈을 최소한으로 잡아 국가 재정의 15~25%로 썼지만, 실제 20~30%는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1년치 무기 제조에 들어가는 철보다 10배나 되는 철을 석달 동안 궁궐 짓는 데 허비했다면서 "이 정도면 후금에 대한 방비는 이미 포기한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대후금 외교는 실용주의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눈치 보기가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방대한 토목 사업 때문에 양민의 부담이 너무 컸는데 반정 직후 인조 정권은 궁궐 공사를 중단하고 세금을 탕감했다면서 "'반정'은 말 그대로 백성들이 '정상적인 생활(正)로 돌아가는(反)'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안 연구원은 궁궐 공사가 왕권 과시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했다. "나무, 돌, 쇠 등 갖가지 재료를 누가 조달했을까요. 권문세가나 왕실이 조달했을 겁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면 건설업체가 이득을 보는 것과 같이 왕실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커넥션이 있었을 겁니다."
그는 "대동법을 시행해서 재정을 확충하고 북쪽이 불안하니 군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광해군은 한 일이 없다"면서 "경제력, 민심, 군사력 등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으니 기회주의 외교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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